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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삼한·가야의 교통 일본·중국은 물론 먼 나라 인도까지 진출 - 자동차생활" 중 삼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삼한의 건국과 교통
2002-08-10 자동차생활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 "부여·삼한·가야의 교통 일본·중국은 물론 먼 나라 인도까지 진출 - 자동차생활" 중 삼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삼한의 건국과 교통
2002-08-10 자동차생활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말을 잘 탔던 부여인들은 조직적인 정치와 농경, 목축으로 국력을 키워 고구려가 점령하기까지 만주북부일대를 차지한 강력한 나라로 군림했다. 동서남북으로 도로를 잘 닦고 수레도 폭넓게 이용했다. 삼한과 가야에서는 수상교통이 더 발달했다.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해상교역을 했고, 특히 농업과 철 생산, 철제 수공업 기술이 뛰어났던 가야는 일본과 활발히 교역하며 적극적으로 문물을 전파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삼한시대 배의 토기
삼한의 건국과 교통
기원전 3세기 말경 고조선의 진족(辰族) 일부가 위만조선에 쫓겨 한반도로 남하해 한강 이남에 있던 한족(韓族)과 동맹한 후 한강 이남에 진나라를 세웠다. 진국은 곧이어 진족 출신인 진후(辰候)를 진왕으로 옹립하고 통치상 편리하게 진한, 마한, 변한 3개 행정구역을 나누었는데 이를 삼한(三韓)이라 부른다.
마한은 지금의 경기, 충청, 호남지역으로서 농업과 어업이 발달했으나 후에 백제가 정복했다. 진한은 강원도와 경북, 경남 일부 지역으로 벼와 철의 명산지였다. 변한은 경남을 중심으로 한 남해지역으로 철이 많이 나, 일찍부터 일본·중국에 철을 수출하는 나라로 유명했으나 후에 가야국으로 변했다가 진한과 더불어 신라에 합병되고 말았다.
진왕은 가장 세력이 컸던 마한의 울지국(지금의 충남 익산부근)에 도읍해 삼한에 각각 제후왕을 두고 진국을 통치했다. 진왕은 법으로 엄격히 다스려 매우 조직적인 나라를 만들었고, 특히 철이 풍부해 수공업이 발달했다. 일찍부터 농기구, 무기 등 철기제품과 철화폐를 사용해 경제적으로도 융성했다.
산악지대인 탓에 육상교통 발전 늦어
진한의 양로 풍습, 교통질서법의 시초
삼한의 육상교통은 수상교통보다 발달하지 못했다. 내륙은 험준한 산악지대가 많아 수레를 쓰기는 했지만 장거리 운송수단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고 도성내의 운반수단으로 이용할 뿐이었다. 이런 지형조건 때문에 소와 말을 교통수단으로 많이 이용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남쪽의 한나라와 합병하기 전인 고조선시대, 청천강까지 그 판도가 확장되었을 때는 수레를 많이 썼음을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동강유역 강서군 일대의 12개 토광무덤에서 출토된 각종 철제품들은 기원전 1∼2세기경 진나라의 유물로서 이 중에는 수레와 가마용 부속품들이 많이 들어 있다.
이를 보면 진나라는 일찍부터 고조선의 영향을 받아 청천강과 대동강 유역 등 평야가 넓은 곳에서는 수레나 가마를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레 또는 가마의 유물이나 구체적인 사료가 거의 발굴되지 않아 어떤 모양의 수레와 가마를 만들어 사용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고조선만큼 널리 쓰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진한지를 보면 3세기경 진한에 특이한 교통풍습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도로교통질서법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양로(讓路) 풍습이 그것이다. 길을 가다가 연세가 높은 사람을 만나면 길을 양보해 먼저 가게 하는 것인데, 이는 나라에서 정한 법이 아니라 백성들의 경로사상에서 나온 하나의 아름다운 풍속이었다. 특히 진한의 경북지역은 예로부터 예의 바른 고장으로 알려져 있어 진한의 양로풍습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삼한은 육로교통보다 수상교통이 더 발달했다. 바다와 내륙을 연결하는 강이 많아 많은 양의 물건을 실어나를 때 배를 이용하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로 이용은 고조선시대부터 발달해 이의 영향을 받은 삼한사람들 역시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해상교역을 했다. 이들의 해상교역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사람들처럼 한반도 삼면을 흐르는 해류를 잘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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