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50504130104

예맥 = 동호 = 숙신 : 범쥬신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6>
김운회 동양대 교수 기사입력 2005-05-04 오후 1:57:01                    
  
이런 동요 들어 보셨죠?
  
“예솔아! ”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대답하면
“너 말구 네 아범.”
  
“예솔아.” 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너 아니고 네 엄마.”
  
(김원석의 동요 : 내 이름 중에서)
  
그러면서 이 동요는 아버지를, 어머니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내 이름 어디에 엄마와 아빠가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어머니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들은 적이 없거든요. 아버지의 이름은 알았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요. 조금이라도 총명한 구석이 있었으면 초등학교 가기 전에 좀 알아두거나 학교에 가지고 가는 서류라도 유심히 보면 알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었던가 봅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당시에 저는 하루 종일 앉아서 그림만 그리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저도 “엄마의 이름은 뭘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물어봤습니다. “엄마 이름은 뭐야?” 그랬더니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엄마 이름 ? 엄마 이름이 ‘엄마’지.” 그런데 늘 이런 식으로 어머니는 넘어가기 일쑤여서 어머니가 제게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마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안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 보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기 보다는 주로 ‘갑돌이 엄마’, ‘평양댁’, ‘갑수 형수’, ‘영철이 마누라’ 등으로 인생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어머니들의 지위가 낮아서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지난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을 해왔지만 당당하게 살지 못하고 항상 뒤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에 가려서 세상을 살아오신 것이지요.
  
(1) 중국 장님, 예맥 코끼리 만지기
  
우리의 뿌리와 깊이 관련이 있는 민족은 예맥ㆍ숙신(肅愼)ㆍ동호(東胡)입니다. 이 세 민족은 아직도 안개 속에 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는 예맥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연구자에 따라서 예(濊)는 샤오싱안링[소흥안령(小興安嶺)] 산맥 동부지역에 맥(貊)은 샤오싱안링 산맥 서부 지역에 거주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라고 하기도 합니다. 때에 따라서 예와 맥은 따로 있기도 했지만 합류하여 하나의 나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맥족이 예족을 지배하였다고 합니다만 기록에 나타난 형태는 예(濊), 또는 예맥(濊貊), 또는 맥(貊)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예와 맥은 분리시켜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의 민족으로 간주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이 점 앞 강좌에서 충분히 보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청동기시대 이래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동질적 문화를 향유한 집단을 예맥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예맥은 주변의 여러 가지 변화하는 생태적 정치적 조건에 따라 여러 종족으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되풀이 합니다.
  
예맥족은 중원(中原)의 문화와 다른 독자적 문화를 형성했는데 비파형 청동검 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성립되기도 했으며 중국의 세련되고 발달된 문화를 만나면서도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합니다. 예맥의 중심은 고조선과 부여(夫餘)지요. 부여는 고구려와 상당기간 공존하면서 예맥문화권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참고로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부여왕이 사용한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 : 예왕의 도장)이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맥에 대하여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저 ‘고조선 = 예맥’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마치 예맥 전체가 고조선을 구성한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예맥의 상당수가 특별한 국가의 구성없이 그대로 자유롭고 독자적인 유목 또는 수렵 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샤오싱안링 산맥 동부 지역에서는 국가의 발달이 미약하고 샤오싱안링 산맥 서부지역에서 국가의 발달이 활발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맥의 일부가 고조선을 구성한 것이죠.
  
우리는 그 동안 기원 전후, 또는 중국의 한(漢)나라 전후 동북아시아에는 동호ㆍ예맥ㆍ숙신 세 민족이 서로 대립하면서 살아간 듯이 배우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아무런 반발도 없이 수용했습니다.
  
우선 그 동안 어떻게 배워오고 가르쳤는지를 한번 봅시다.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북방의 예맥족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융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주의 중부와 서남부, 한반도 동북부에 살고 있던 예맥족은 다시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과 부여ㆍ고구려ㆍ옥저ㆍ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① 만주 서부[요서(遼西) 초원지대]는 동호(東胡)의 근거지로 오환ㆍ선비계(鮮卑系)이며 몽골계이고 ②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소흥안령-장백산맥]는 숙신ㆍ읍루의 후예이며 후에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ㆍ여진의 거주지이며, ③ 송화강-요하 유역의 중부 만주평원(소위 동북평원)과 훈강(渾江) - 압록강 - 대동강 일대의 산악지대는 바로 고조선과 부여ㆍ고구려인들을 포함하는 예맥의 근원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어느 책을 봐도 대동소이합니다. 이것을 지리적인 위치에 맞춰 개략적으로 나타내면, [그림 ①]과 같이 되겠지요.
  

[그림 ①] 일반적으로 보는 동북아시아의 민족. ⓒ김운회  

그런데 [그림 ①]을 보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동호·숙신·예맥을 무슨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단순히 중국의 사서(史書)에 나오기 때문인가요? 그 동안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어떤 관념에 갇혀 사물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림 ①]을 보세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동호는 결국은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하는 지역인데 왜 별도로 나눕니까? 또 이 지역은 후일 고구려가 모두 통합한 지역입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나눌 수 있는 지가 궁금합니다. 갑자기 새로운 민족이 이주해온 흔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고조선의 영역은 [그림 ①]로 보면 동호 + 예맥이 아닙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고조선의 영역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비파형(요령식) 동검의 출토지라고 합니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은 한족(漢族)들이 만든 청동검과는 달리, 칼의 날과 자루가 각기 따로 주조된다고 합니다.
  
이 분야에 전문가인 미국 덴버 대학의 여성 인류학자 사라 넬슨 교수는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Sarah M. Nelson 『The Archaeology of Korea』1993 133쪽).
  
[그림 ②]는 비파형동검 출토지와 고조선의 중심지와 세력범위(영역)등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그림 ②]를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금방 알아차릴 겁니다. [그림 ①]에서 말하는 동호와 예맥의 영역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즉 고조선은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요서(遼西) 및 요동(遼東)에서 발생한 나라인데 그것을 왜 동호와 예맥으로 다시 나눕니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동호지역과 고조선의 중심지역 부분에서 같은 종류의 비파형 동검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유적으로만 말하면 고조선은 차라리 동호(요서)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림 ②] 비파형 동검 분포지역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조선의 세력범위. ⓒ김운회

앞 장에서 말씀 드린 대로 쥬신의 중심지가 하북 → 베이징 → 요동 → 만주 → 한반도 → 한반도 남부ㆍ일본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은 항상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고조선이나 부여는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요동 만주 지역에서도 한족(漢族)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왕이 출현한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류의 책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지역의 인구와 지리적 특성을 거의 모르고 지적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유목이나 수렵은 무계획적이고 자연환경에 큰 영향을 받으므로 국민총생산(GNP)이 매년 일정하지도 않고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죠. 더구나 인구 증가도 한계가 있어 사회가 상당한 부분 정체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유목국가에서는 혈통적으로 가까운 씨족이 모여서 부족을 이루고, 부족이 모여 국가를 이룹니다. 유목사회가 국가를 형성할 때는 그들 부족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부족장이 군주가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즉 유목국가의 특징은 부족 연합국가(部族聯合國家)라는 것이죠. 이 점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지향하는 중국의 정치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더구나 만주 일대는 매우 광대한 지역이지만 인구가 극히 희소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지역적으로 인구를 나누기 시작하면 수십~수백 종의 부족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통치하기도 불가능하지요. 왜 그럴까요?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나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국가체제를 구성하여 오는 경제적 편익(benefit)보다는 비용(cost) 발생이 너무 크다는 말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지금부터 거의 2천 년 전에 현재의 남한(한반도 남단)보다 10배 이상 큰 곳에 수만~수십만 정도가 여기저기 흩어져 산다면 그런 곳을 어떻게 통치하겠습니까?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어느 곳에 행정 중심지를 세우고 어떻게 군대를 주둔시킵니까? 그리고 무기가 겨우 칼이나 창 정도인 시대에 흩어져 살면서 전투력도 왕성한 유목민들을 어떻게 제대로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한(漢)나라 때 기원전후로 실시된 인구조사에 따르면 만주의 총인구는 1백만 명 수준이며 인구밀도도 1.31명/km2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시대지요. 그 후 만주의 총인구는 1201년에는 3,643,975 명, 14세기 후반기에 3백만 명, 1491년에는 총인구 435만 명, 인구밀도 5.42명/ km2 이었다고 합니다[趙文林ㆍ謝淑君 『中國人口史』(北京 : 人民出版社, 1988)]. 그리고 17세기 청 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가 중국(명나라)의 대규모 침공(30만 명 규모)을 격파하기 위해 최대로 동원한 군대가 겨우 2~3만도 채 안됩니다(만주 부분에서 다시 봅시다).
  
그리고 인구 1백만, 또는 3백만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일정 지역에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인구밀도 자체도 허수(虛數)일 가능성이 높지요. 그래서 흔히 만주를 ‘바람이 스쳐가는 땅’이라고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붙박이 농경민과는 다르지요. 이들은 이동성(移動性)이 강하고 그 행동반경은 대단히 넓습니다. 농경민의 입장에서 보는 유목민족과 실제의 유목민족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둡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유목민은 농경민이 사용하는 토지의 열 배에서 스무 배 정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목민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족(漢族) 사가(史家)의 눈에는 이들이 요서 지역에서 출몰하면 동호(東胡)가 되고 요동 지역에서 출몰하면 예맥이 되어 버리겠죠? 그러다가 한참 밀려가서 두만강 유역에 나타나면 읍루가 됩니다. 실제로 유목민들이 요서 지역에서 두만강까지 가는 길은 사흘도 걸리지 않는데 말이죠.
  
따라서 한족(漢族) 사가(史家)의 눈에는 분명히 다른 종족으로 보고 기술하더라도 실제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알타이 산맥에서 압록강까지 가는데 말을 타면 2주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농경민이 이 길을 걸어서 간다면 아마 살아서는 다 가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유목민의 특성을 전제하지 않고 유목민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될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림 ①]에서 나타나는 숙신(肅愼)ㆍ읍루(挹婁)도 실제와는 좀 다릅니다. 숙신이 반드시 만주 동부와 연해주에만 출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숙신은 현재의 산시성(山西省)과 베이징(北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서 막 출현합니다.
  
그리고 읍루는 그 민족적 계열이 가장 혼란하여 동북아시아 전체 역사를 혼란에 빠뜨린 민족입니다. 분명한 것은 읍루를 해명해야만 쥬신의 비밀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읍루는 숙신이 아니라 아이누족을 의미합니다. 즉 숙신과 일정한 교류를 가진 정도의 아이누족이라고 봐야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는 『진서(晋書)』에 나타나는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는 식의 표현은 읍루에 대한 혼란을 크게 가중시킨 서술이죠. 이 때문에 숙신은 오히려 안개 속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숙신 대신에 사용한 읍루가 아닌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는 읍루는 예맥계열이 아니라 아이누족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아이누족이 살고 있는 연해주(두만강 동북부)에서 태평양 북부 연안에 이르는 지역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인구가 극히 적어서 사실상 민족으로 분류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인구 규모라고 봐야합니다. 이 부분은 숙신편에서 다시 깊이 다루고 이 정도로 일단 넘어갑시다.
  
이 정도 이야기를 하고나면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김 선생, 당신 말이 이상해. 도대체 당신 결론은 뭐야? 그러면 예맥·동호·숙신이 같다는 거야 뭐야?”
  
맞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다만 예맥·동호·숙신 등이 ‘같다’는 말보다는 ‘구별이 안 된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분포 범위가 지나치게 넓은데다 인구는 극히 희박하면서도 이동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저기서 출몰할 수 있죠) 여러 가지 변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또 말씀하실 겁니다.
  
“에이, 너무 지나쳐. 그럼 증거를 대 봐.”
  
그럽시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증거를 대 보겠습니다.
  
일단 몇 가지만 먼저 얘기해야겠네요. 동북아시아의 인종분포를 살펴봅시다. 예맥은 기존의 학계에서 사용하는 말인데 저는 이것을 범쥬신으로 표현해보았습니다.
  

[그림 ③] 선사시대의 동아시아 인종분포. ⓒ김운회  

[그림 ③]는 현재 고교 역사지도(2004년 천재교육 : 교육인적자원부 검정)에 있는 그림인데 대체로 그 동안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누족들은 예맥과는 분명히 다르게 묘사되어있군요. 그렇죠? 그러면 다시 [그림 ③]과 우리 민족의 체질상 공통성을 담은 [그림 ④] 을 비교해 보시죠.
  
거의 똑같지요? 하나의 그림은 역사적 사료에 의한 그림이고 하나는 생물학적인 체질을 분석한 그림인데 그 분포 유형이 거의 일치하니 말입니다. 물론 현재의 베이징이나 요동반도 부근에는 한족(漢族)의 이주와 동화(同化)가 심하게 일어난 지역이라 과거의 흔적은 많이 사라졌음을 [그림 ④]는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누 분포지역은 제외되어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의 읍루(아이누)가 거주한 지역이 제외되어있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거문화나 장례습속은 민족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잘 바뀌지 않는 대표적인 문화입니다. 장례습속은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고 주거문화를 한번 봅시다[참고로 김한규에 따르면 고조선 문화와 중국 문화가 확실히 다른 부분은 묘장문화(墓葬文化)라고 합니다(김한규『요동사』141쪽)].
  
쥬신의 대표적 주거문화는 구들, 즉 온돌(溫乭)입니다. 학자들은 구들이 고조선ㆍ부여나 고구려(손진태 선생, 최남선 선생의 견해)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이미 구들이 개발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림 ④] 체질이 상통하는 지역(조용진 『얼굴』85쪽)ⓒ김운회

구들(온돌)은 물론 그리스나 로마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만 쥬신의 주거문화와는 여러 면에서 거리가 있어 이를 제외하면, 온돌의 기원에 관한 대부분의 견해들은 ① 중국 서북부 산시성(山西省), 또는 ② 동호(東胡), ③ 만주 등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대표적인 쥬신의 주거 문화라는 말이죠.
  
잘 아시겠지만 온돌은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난방시설중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온돌 시설만 알았어도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했던 초기 미국인들이 그렇게 많이 얼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구들(온돌)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중국 북부와 여진족이 살았던 심양 일대에도 분포되어 있습니다. 심양 지역은 바로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중심 영역이죠. 온돌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 곳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랴오닝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연화보 유적인데 이것이 고조선 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곳은 바로 요하(遼河) 중류지역으로 고조선의 중심지이죠. 바로 동호 지역인 셈입니다.
  
구들(온돌)에 관한 최초의 중국 기록은 5~6세기경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수경주(水經注)』라는 문헌으로 토은현 진궁산의 절 건물에 온돌을 사용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토은은 지금 북경 동남 방향에 인접한 땅으로서, 전문가들은 중국에 있어 온돌의 남방 한계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10세기경에 저술된 『구당서(舊唐書)』에는 일반적으로 가난한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은 반드시 산곡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사는데 모두 띠풀로 지붕을 이고 겨울에는 긴 구덩이[長坑]을 만들어 그 구덩이 아래에 불을 때어 방을 덥힌다(「高麗」 : 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暖).” 라고 하고 있습니다. 송나라 때 서몽화의 『삼조북맹회편』을 보면, 숙신의 후예로 알려진 여진 사람(만주 쥬신)들의 주거를 기술한 것으로 “기와가 없고 집둘레에는 목상이 둘려 있으며 그 아래서 불을 때는데 구덩이[坑]을 통해 방을 덥힌다. 그리고 그 덥힌 방에서 잠도 자고 식사도 하고 생활도 한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숙신ㆍ여진이 세운 금나라의 기록인 『대금국지(大金國志)』에도 “흙으로 방바닥을 만드는데 그 아래서 불을 때어 덥히고 그 위에서 침식기거(寢食起居)를 한다.”고 하고 청나라 초기 저작물인 고염무의 『일지록』을 보면 중국의 동북부 만주 일대는 온돌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온돌 문화권의 범위를 북쪽으로는 만주 흑룡강 상류로부터 서쪽은 중국 북부 지역 즉 허베이(河北), 산시(山西) 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두만강ㆍ연해주까지 남쪽은 한반도 끝까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몽골에서도 게르 바닥에 난방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몽고를 중심으로도 온돌에 관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은 양반 다리(가부좌)하고 앉아서 휴식을 하는데 이런 자세는 쥬신족들이 아니면 하기 힘든 자세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 사람은 양반다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유럽인이나 미국인도 마찬가집니다. 이 자세는 온돌 문화에서 크게 발달한 휴식자세라고 할 수 있죠. 다른 인종이나 민족에게서는 보기 힘든 자세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단 체질과 같은 생물학적 특성과 시간이 흘러도 잘 변하지 않는 주거문화에 있어서 예맥ㆍ동호ㆍ숙신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시겠죠? 그럼 이제부터 다시 하나씩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2) 예맥 = 동호 = 숙신
  
예맥이 쥬신 역사의 본류라는 것은 여러 사서에서도 나타납니다. 일단 그것을 한번 정리해두고 넘어갑시다.
  
선진시대에는 발(發)을 맥(貊)과 대신하여 사용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조선(朝鮮 : 고조선)을 맥(貊)과 동일시합니다. 그런데 고조선은 맥의 일부에 불과하지요? 후한대(後漢代)에서는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맥(貊)과 동일시하기도 하고(『후한서』4 「和帝紀」) “부여(夫餘)는 본래 예(濊)의 땅”이라고 하기도 하고(『후한서』85 「東夷傳」), 동예(東濊)를 가리켜서 예맥으로 칭하기도 합니다(『삼국지』「동이전」)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예(濊)·옥저(沃沮)·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있다”고 합니다(『後漢書』「東夷列傳」: 濊及沃沮句麗本皆朝鮮之地也).
  
예맥은 중국의 한나라 이전에는 마치 맥과 예가 요동을 동과 서로 나누어 차지하는 것처럼 서술이 되다가 한나라 이후에는 예맥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서(漢書)』에는 예맥조선(濊貊朝鮮)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漢書』24 「식화지」). 앞서 본대로 예와 맥은 하나의 범주로 봐야합니다.
  
예맥이라는 종족은 『관자(管子)』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허뻬이(河北)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선비나 동호 등도 모두 이들로 볼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소제기(紹帝紀)」)에 따르면, 예맥은 오환(烏桓)ㆍ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중원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환ㆍ선비는 동호의 대표적인 민족이 아닙니까? 결국 동호나 예맥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죠.
  
맥(貊)은 중국의 고대 전적에서 야만족의 대표적인 종족으로 묘사되어왔습니다. 예를 들면 『시경(詩經)』에 “(저 멀리) 추족과 맥족이 사는 곳까지 북쪽 나라 모두 다스리기 위해 왕께서 소공을 제후로 봉하셨네(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라든가 “회수의 오랑캐와 맥족과 같은 야만족, 그리고 남쪽의 야만인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르고 복종하지 않는 자 없으니(淮夷蠻貊 及彼南夷 莫不率從)” 라든가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맥은 중국인들이 보았을 때 그저 중국의 북방 또는 동방에 사는 오랑캐로 보이네요. 쉽게 중국식으로 말하면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을 합쳐서 부른 말로 보입니다.
  
그리고 『논어(論語)』에는 공자가 특이한 말을 하고 있어서 주목이 됩니다. 즉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 살기를 원하자[子欲去九夷]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곳은 얼마나 지저분한 곳인데 사시기를 바랍니까?(「子罕篇」)”라고 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군자가 그 곳에 산다면 그 더러움이 문제인가?[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상당수의 한국 학자들은 이 말에 감읍(感泣)하여 이를 토대로 여러 가지 억설(공자가 ‘구이’를 그리워한다는 둥 ‘구이’가 그만큼 살만하다는 둥 아니면 공자도 한국인이라든가)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큰 의미는 둘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역설적인 표현법에 불과한 듯합니다.
  
제가 이 글을 인용한 이유는 공자가 구이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이(九夷)는 일반적으로 보면 예맥족의 총칭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한번은 주목할 필요도 있다는 말이죠. 참고로 『한서(漢書)』에는 “사맥(四貉)이 모두 복속하였다.(『漢書』22 「예악지」)”는 말이 있고 다른 문헌에서도 “제맥(諸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동안 많은 연구로 몽골 - 만주 - 한반도에 거주했던 여러 종족들이 동일한 민족, 또는 동일한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연구와 증거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유 엠 부찐은 “맥족의 분포 지역은 오늘날의 랴오시(遼西 : 요하 서쪽) 지역(그 이전 시대에는 산둥반도의 일부 지역 포함), 요하(遼河) 중상류의 계곡, 랴오뚱(遼東) 반도 한국의 서북부 해안 지대를 포함한다. 그리고 예족은 지린(吉林)의 남부 및 동북만주 지역이다.”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유 엠 부찐 『고조선』(소나무 : 1990)].
  
북한학자 리준영은 맥족은 고대 중국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리국(槀離國)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이고, 북한의 탁월한 사가인 리지린 선생은 이들이 동호(東胡)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맥족이 지역적인 분포나 문화적인 특성이 동호와는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동호 = 맥(예맥)’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리지린 선생은 『고구려역사』에서 B. C. 3세기경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를 침입함으로써 맥족이 멸망”했으며 당시의 잔존세력들이 집단적으로 동부지방 즉 송화강(흑룡강의 최대 지류) 유역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그들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이며 그 시기는 대략 B. C. 232년경(B. C. 3세기)이라고 합니다.
  
리지린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황해 연안과 발해만 한반도에 거주했던 종족인 조이족(鳥夷族)과 예맥족이 융합하여 기원전 2천년 경에 숙신(肅愼)이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다(리지린『고조선연구』1963). 여기서 리지린 선생이 지적하는 시기는 의문스럽지만 예맥족과 숙신족도 구분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뻬이(河北) 지역과 남만주지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한(漢)나라 이후에는 흑룡강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죠. 그런데 한(漢)나라 이전 숙신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대부분 겹치고 있으며, 조선(朝鮮)과 숙신이 같이 나오는 기록이 없어 숙신(肅愼)은 조선(朝鮮)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이 부분은 ‘숙신편’에서 다시 논의합시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동호(東胡)나 숙신(肅愼)을 예맥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처럼 보고 있었기 때문이죠. 또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왔습니다. 마치 동호나 숙신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면 죽을병이라도 생길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 동호에서 거란(契丹)이 나온 것으로 말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과 몽골(蒙兀)은 민족적으로 다르지 않고 거란 또한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과 다르지 않죠. 이 점은 앞으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밝혀 갈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만주 서부는 동호(東胡),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는 숙신, 중부 만주평원에서 대동강은 예맥이라는 식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죠.
  
왜냐하면 이 민족들이 소재한 위치가 뒤죽박죽인데다 서로 섞여있어서 도대체 분간이 되지 않고 여기저기서 이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하는 기록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을 다른 종족이나 민족으로 나눌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죠.
  
같은 주거문화, 유사한 장례문화, 같은 토템, 같은 무속(巫俗)에 언어도 같은 계열이고 생물학적 체질과 체격조건도 같은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환경 변화에 따른 생활양식이 다른 것뿐인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버드나무를 신목(新木)으로 숭배하는 사상은 흉노·몽골·거란·선비·여진·고구려 등 모두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江上波夫 「匈奴の祭祀」『ユウラシア古代北方文化』東京 1948 227-231쪽). 참고로 선비·오환 등도 동쪽과 푸른색을 숭상합니다. 실제로 『삼국지』(「위서」), 『요사(遼史)』 등에 나타나는 오환ㆍ선비(동호)의 습속은 현대 한국인과도 매우 유사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예맥이 단순히 만주 중부에서 대동강 지역에 이르는 곳에서만 살아온 것이 아니죠.
  
이전의 강좌에서 본 예맥의 신화(단군신화)로 파악해 보더라도 중국의 베이징 부근으로 밀려난 예ㆍ맥족들이 요동 - 만주 - 연해주 지역의 곰토템 민족들과 융합하면서 쥬신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곰토템 지역으로만 보더라도 ① 유라시아 아메리카 형(시베리아 산림지대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남 : 야생의 곰을 종족의 수호령, 또는 수렵신으로 간주)과 ② 아이누형(연해주에서 북해도에 걸쳐 나타남 : 곰을 사육하여 의례적으로 죽여서 나눠 먹지만 곰을 조상으로 간주) 등이니 이 지역들은 사실상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북해도에 이르는 태평양 주변의 전 지역을 의미하고 있지요.
  

[그림 ⑤] 곰토템 관련 지도. ⓒ김운회  

제가 이 같이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맥(貊)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사서(史書)로 보면 서주(西周) 시대 이후 나타났다가(『시경(詩經)』「大雅 韓奕篇」)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에는 소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예맥은 없어졌을까요? 그것은 아니지요. 이들의 명칭이 역사 자료에서 사라진 이후 말갈이나 물길(勿吉 : 기분 나쁜 놈), 읍루(挹婁 : 아이누 같은 놈들) 등이 대신하고 있으니까요(그 이유가 궁금하죠? 다음 장부터 상세히 해설해 드립니다). 그리고 이 명칭들이 요동의 서부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해(東海 : 동예지역)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우리가 동호(東胡)나 숙신(肅愼)을 예맥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처럼 본 것은 2천년 역사연구의 가장 큰 잘못이며 이것이 우리가 쥬신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실패하게 만든 근본 요인입니다. 예맥과 동호ㆍ숙신(肅愼)은 초기에는 허뻬이(河北) 및 중국 동북 지역에 후기에 갈수록 요동 -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찾아가려는 쥬신의 실체지요. 한족식(漢族式)으로 말하면 북적(北狄)과 동이(東夷)를 두루 포괄한 민족입니다. 이들은 농경민처럼 특정 지역에 붙박이로만 살아간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3) ‘똥고양이’ 입양(入養)하기
  
이제 예맥이 한국과 중국 양국의 역사 전쟁에서 왜 중요한 문젯거리가 되는지를 한번 알아봅시다.
  
한국의 학계에서는 맥과 예를 한민족(韓民族 : 한국인) 구성의 뿌리로 이해하고 이들이 남방의 한(韓)과 더불어 한민족을 형성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현대 중국의 학계에서는 예와 맥을 한족(漢族)의 구성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네요. 왜 중국인들이 그 동안 ‘똥고양이[濊貊]’로 부르면서 가까이 하면 마치 큰일이라도 생길 듯이 더럽게 생각하다가 이제 와서는 이 ‘똥고양이’를 입양하여 자기네 민족이라고 부산을 떨고 있는 지 말입니다. 사람도 아닌 ‘똥고양이’를 하나의 가족(家族)으로 생각해준다니 중국인들은 참으로 인도적(人道的)입니다.
  
어쨌든 예맥은 현재의 한국과 중국이 모두 공통된 민족 구성원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역사전쟁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 학계의 시각은 지금까지 본대로 역사적인 근거가 희박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중국은 예맥을 ‘똥고양이’ 오랑캐라고 간주해오다가 최근에 들어서 굳이 이들을 한족의 영역으로 억지로 구겨 넣으려고 하는가 말입니다. 진작에 다만 3~4백 년 전이라도 한족(漢族)에 넣어주었으면 소중화주의자(小中華主義者)들도 감읍(感泣)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맥이 분명히 한족(漢族)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밝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와 맥이라는 민족이 기원 전후로 여기저기서 나오다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숙신·읍루·물길·말갈·질위·여진 등등의 명칭들이 요동과 만주 일대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요동(遼東)과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예맥족의 역사는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 이후에는 없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 선생들이 우리 민족을 자꾸 예맥이라고만 하면 우리는 길 잃은 ‘역사의 고아’가 되어버리죠.
  
예를 들어봅시다. 부산출신 김복순씨는 신의주 출신의 최영철씨와 결혼하여 최예솔이라는 아이를 두고 있다고 합시다. 옆집에 사는 아줌마는 김복순씨를 ‘예솔 엄마’라고 하고 슈퍼마켓 할머니는 ‘부산댁’, 최영철씨는 ‘솔아’ 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김복순씨의 동창인 정연희씨는 ‘복순아’라고 부릅니다.
  
자 이제 봅시다. 사람은 하나인데 사람들은 ‘예솔 엄마’, ‘부산댁’, ‘솔아’, ‘복순아’라고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산댁’과 ‘솔이 엄마’가 다른 사람입니까? 이렇게 명칭을 다르게 부르는 것은 김복순씨의 사정이 아니라 이 김복순씨를 부르는 사람들의 사회적 환경 개인적인 사정이나 지위 또는 친분관계 등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지요.
  
예맥(濊貊 : 똥고양이)은 중국인들이 함부로 기록하고 내뱉은 말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지속성’이지요. 예맥의 이름이 역사의 기록에 사라지고 또 다른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면 그것을 추적하는 것이 옳지요. 단순히 예맥이라는 민족의 일부가 고조선을 구성하였다가 역사에서 사라지고 다만 그들의 일부가 북만주로 도망가 부여를 구성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한반도 남단에 흘러들어왔다고만 이해하여 그들의 영역이 현재 한국의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 등이니 그 곳만이 이들의 역사 영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그들은 전라ㆍ경상ㆍ충청뿐만 아니라 요동과 만주에도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말이죠.
  
생각해 봅시다. 요동ㆍ요서ㆍ만주 일대에 있던 모든 예맥족이 고조선이 망하자 일부는 부여로 가고 나머지는 몽땅 한반도로 올 수 있습니까? 기차가 있습니까? 고속버스가 있습니까? 황해 바다를 건너올 페리호가 있습니까? 설령 그것이 있다한들 이들을 어떻게 다 데려온단 말입니까? 더구나 예맥이 사라진 텅 빈 요동과 만주에 동호·숙신·읍루·물길 등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같이 많은 인구가 타임머신이나 공간이동도 없이 갑자기 어디서 왔겠습니까?
  
따라서 예맥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숙신·읍루·물길 등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4) 이런 젠장, 거란과 선비와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니
  
이쯤 했으면 ‘예맥 = 숙신 = 동호’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숙신과 관련해서는 ‘숙신편’에서 궁금증을 해소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숙신ㆍ동호ㆍ예맥 등을 일컫는 범칭으로 ‘범(凡) 쥬신’ 또는 ‘원(原) 쥬신’이라는 용어를 써야한다고 보지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또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이런 젠장, 거란과 선비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니. 김 선생, 거란은 분명히 우리와는 다르잖아? 또 그렇게 배웠어. 사실 거란 같은 오랑캐족속을 우리와 같은 계열의 민족으로 본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아. 기분 나빠.”
  
허어, 그렇습니까? 흥분하지 마시고 좀 따져봅시다. 제가 앞서 거란의 원류인 동호의 영역이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한다는 점은 말씀드렸죠? 그리고 체질이나 체격도 일치하고(‘아침안개 속의 쥬신’), 주거문화나 토템도 일치(‘똥고양이와 단군신화’)한다고 말씀 드렸죠? 그렇다면 그 동호(東胡)에서 거란(契丹)이 나온 것은 아실 테니 일단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遼史)』를 봅시다.
  
『요사(遼史)』에서는 “(거란 수도인 중경의 동부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遼史』「地理志二」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금법(八條禁法)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遼史』卷四十九 :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고 하고 있지요.
  
앞으로 제 9장(알타이 신화)에서 보시겠지만 이 요나라야 말로 정치적인 군장과 종교적인 수장을 겸하는 단군왕검(檀君王儉)식 통치를 보여준 대표적 경우입니다.
  
『요사(遼史)』에 따르면, 요나라의 태조는 “천명을 받은 군주는 마땅히 하늘을 섬기고 신을 경배한다(受命之君 當事天敬神 :「耶律倍傳」)”라고 하여 샤머니즘을 아예 국교(國敎)로 숭상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島田正郞 『遼朝官制の硏究』(1979) 321쪽]
  
이런 점들을 보면 차라리 우리는 동호의 후예라고 해야 하겠죠? 이젠 납득이 가십니까? 그래도 또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말하시는 분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에이, 그래도 대부분 사학자들이 예맥과 동호계열의 선비(鮮卑)는 다르다고 하던데. 김 선생, 당신 쥬신의 범위를 너무 넓게 보는 거 아니야? 당신, 간단히 말해봐 선비와 고구려가 무어 닮은 점이라도 있는지.”
  
그렇군요. 좀 더 구체적인 예가 필요하다는 말씀인데요. 이 점을 다시 봅시다.
  
앞서 본 대로 리지린 선생의 연구는 예맥족과 숙신·선비는 구분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선비와의 연관성에 대해서 간략하나마 알아봅시다.
  
실제에 있어서 고구려나 몽골은 기원적으로 타브가치(Tabgachi : 拓跋鮮卑), 즉 선비족(鮮卑族)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이 때 사용된 ‘치(chi)’는 몽골계 언어의 인칭대명사입니다. 예를 들면 장사치·벼슬아치 등의 치와 같은 것이죠]. 이 점은 몽골이나 북방 유목민들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참고로 선비(鮮卑)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교수는 사비(Sabi)라는 만주어가 “상서(祥瑞)롭다”는 의미이므로 기린과 같은 성스러운 동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만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유라시아 고대북방문화』에서 가죽 허리띠에 붙어있는 동물모양의 버클의 음역에 불과하다고 고증하였습니다.
  
타브가치는 흔히 탁발선비(拓跋鮮卑)라고 기록된 민족으로 북위(北魏)를 건설한 민족인데 고구려ㆍ몽골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의 원주지가 맥족이나 몽골과 겹치고(같거나 인근지역)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나 풍속이 거의 같다고 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94~95쪽].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사신이 와서 북위의 세조(世祖)에게 민족 발상지를 설명해주자 세조가 그 곳에 사람을 파견하여 축문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魏書』「烏洛侯傳」). 그런데 내몽골 자치구 후룬뷔일멍(呼倫貝爾盟) 어룬춘(鄂倫春) 자치기(自治旗) 아리하(阿里河) 진 서북 10km 지점에 있는 천연동굴에서 이 축문 비석이 1980년 7월 30일에 발견되었다는 것이지요[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97쪽]. 이 비석은 아리하, 즉 아리수(阿利水) 인근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이 강 이름이 고구려의 시조가 건너간 강과 같은 이름이죠. 이 부분은 다음 강좌에서 상세히 다루지요.
  
북위(北魏 : 386-535)는 북중국을 통일(439)하여 고구려와 이웃하고 남방으로는 한족(漢族)의 송나라(420-479)와 대치합니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 따르면, 장수왕의 부음(494)을 듣고 북위의 효문제는 “오호, 슬픈 일이로다. 내가 직접 문상(問喪)가지는 못하더라도 이곳에서나마 애도(哀悼)를 표하고자 하니 제단을 마련하고 상복을 준비하도록 하라.”라고 합니다(『魏書』高祖 紀第七下 : 帝爲高麗王璉 擧哀於城東行宮). 이 기록은 그대로 『삼국사기』와 일치합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長壽王 七十九年 : 王薨 … 魏孝文聞之 制素委貌 布深衣 擧哀於東郊).
  
그러나 북위는 중국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한족(漢族)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지도층 내부에 큰 반목과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후일 요(遼)나라도 북위의 전철을 그대로 밟습니다. 이것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충돌할 때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이기도 합니다.
  

[그림 ⑥] 북위시대. ⓒ김운회  

그러나저러나 예맥의 대명사인 고구려가 선비족들과 같은 계열의 민족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골자는 동호ㆍ선비니, 예맥이니, 앞으로 나올 숙신ㆍ물길ㆍ말갈이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 명칭들이 현란한 욕으로 만들어져 여러 종족으로 탈바꿈한 것은 전적으로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에 의한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농경민의 시각을 반영한 말들이라는 것이지요.
  
(5) 요약 합시다
  
그 동안 우리는 한국인은 북방의 예맥족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융합되었다고 알아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족(韓族)이라는 개념도 삼한(三韓)식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리고 동호·숙신·말갈·물길·거란·선비 등과 우리는 전혀 다른 민족으로 보고 가르치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예맥은 사서에서 곧 사라져 잊혀지고 맙니다. 사실로 치면 예맥이 다른 이름들로 바뀌어 간 것에 불과한데 말이죠. 예맥은 지속적으로 다른 명칭으로 바뀌어 가는데, 그것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숙신이나 말갈·여진 등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민족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예를 들면 김복순씨는 변함이 없는데 사람들은 ‘예솔 엄마’와 ‘부산댁’을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이죠. 이를 알려면 ‘예솔 엄마’와 ‘부산댁’이 어디에 사는지를 알면 됩니다. 만약 이사를 갔다면 ‘예솔 엄마’가 움직일 때 ‘부산댁’이 어디로 움직이는 지를 관찰하면 될 일이죠. 뿐만 아니라 ‘예솔 엄마’와 ‘부산댁’의 인상착의와 행동양식을 파악하면 ‘예솔 엄마’와 ‘부산댁’의 관계는 금방 알 수가 있죠.
  
그리고 한족(韓族)이라는 말도 그 근원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한(韓)이라는 말이 그저 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 지방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착각하고 있네요. 그저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것을 앵무새처럼 인용하고 있습니다[이 점은「환국(桓國)ㆍ한국(汗國)ㆍ한국(韓國)」부분에서 다시 상세히 분석해 드립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기원후 5세기경에 고구려로 통일되는 것은 인정합니다.
  
앞서 본 대로 이런 분석들은 얼마나 단편적으로 역사를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사학계의 생각들 가운데 받아들일 만한 것은 고구려에 의해 여러 쥬신이 통합되고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합시다.
  
첫째, 예맥은 쥬신의 역사의 뿌리이자 여명기 쥬신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고 이 예맥은 동호와 숙신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맥 = 동호 = 숙신 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이누는 제외됩니다.
  
둘째, 한반도에 사는 쥬신(한국인)이 역사의 여명으로 보는 고조선은 예맥의 나라이지만 그 예맥을 모두 포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맥의 일부가 단지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왔다고 해서 그들만이 예맥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셋째, 예맥이라는 말은 단순히 고조선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했던 민족에 대한 일종의 범칭(凡稱)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명칭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사라지면서 물길ㆍ말갈ㆍ여진 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맥이라는 민족과 물길ㆍ말갈ㆍ여진 등과 다르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는 곳이 같고 생물학적 특성과 체질이 같고 문화가 같은데 도대체 왜,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넷째, 예맥ㆍ동호ㆍ숙신은 쥬신을 구성하는 3대 구성요소로 고구려는 그 성장 과정에서 이들을 통합하여 이들에게 보다 강한 일체감을 부여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漢)나라가 중국인들에게 한족(漢族)이라는 일체감을 부여했듯이 고구려 역시 쥬신에게 고려(高麗), 또는 쥬신이라는 일체감을 생성시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예맥ㆍ숙신ㆍ동호를 포괄하는 말은 ‘원(原)쥬신’ 또는 ‘범(凡)쥬신’이라는 표현이 가장 타당하리라 봅니다. 앞으로는 우리 민족의 원뿌리에 대해 욕설을 사용하지 말고 이 용어들을 사용하기를 권고 드립니다.
  
이제 예맥이 어떤 방식으로 초기 쥬신의 역사를 형성하는지를 살펴봅시다.
  
ⓒ프레시안/김운회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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