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차 해전
주요현황
전투명 | 일시 | 장소 | 전과 |
---|---|---|---|
노량해전 | 1598. 11. 18 ~ 11. 19 | 경남 남해군 노량, 관음포 일대 |
적선 500여척 중 450여척 격침, 이순신, 흥양현감 고득장,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전사 |
전투개요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은 진영을 고하도로 옮긴 뒤 1598년 2월 17일 다시 고금도로 이동시켰다. 해로통행첩과 운주당을 운영하고 수군재건에 노력을 한 결과 삼도수군은 칠천량해전 이전을 넘는 군용을 갖추게 되었다.
1598년 7월 16일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이순신을 지원하게 되었고, 합동으로 절이도 전투와 광양만 해전을 수행했다.
7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은 조선에서 철군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11월, 조선수군의 계속되는 압박으로 고니시는 퇴로가 막혔고, 거듭 진린에게 뇌물을 보내 철군의 길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한 이순신에 의해 좌절되었다.
11월 17일 고니시가 보낸 통신선에 의해, 각지에 흩어져있던 왜군들이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노량으로 모여들었다.
11월 19일 조·명 연합함대는 좌우로 편을 갈라 행진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포구와 섬들마다 복병을 배치하여 적을 대비하도록 해가며 진군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도진의홍) 등 사천에 웅거하고 있던 적들은 5백여 척(《선조실록》에는 3백여 척)을 이끌고 경상남도 사천으로부터 남해 노량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광주양(光州洋)을 지나 곧장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수군들은 대적선의 항로 전방인 죽도와 관음포 사이에 배치하고, 명나라 수군은 죽도 북쪽에 매복하였다. 왜적선이 노량수로를 지나 관음포 앞바다로 다가왔을 때, 우리 수군들은 좌우에서 번개처럼 나타나 일시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적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갈팡질팡하다가는 이윽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우리 수군에게 대항해 오는 것이었다. 그러자 우리 수군들은 적선에 근접하여 불붙는 땔감을 마구 던져 적의 배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적들은 날이 새기 시작할 무렵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관음포(觀音浦)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도진의홍) 등 사천에 웅거하고 있던 적들은 5백여 척(《선조실록》에는 3백여 척)을 이끌고 경상남도 사천으로부터 남해 노량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광주양(光州洋)을 지나 곧장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수군들은 대적선의 항로 전방인 죽도와 관음포 사이에 배치하고, 명나라 수군은 죽도 북쪽에 매복하였다. 왜적선이 노량수로를 지나 관음포 앞바다로 다가왔을 때, 우리 수군들은 좌우에서 번개처럼 나타나 일시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적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갈팡질팡하다가는 이윽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우리 수군에게 대항해 오는 것이었다. 그러자 우리 수군들은 적선에 근접하여 불붙는 땔감을 마구 던져 적의 배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적들은 날이 새기 시작할 무렵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관음포(觀音浦)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노량 서쪽에는 변월도(邊月島)를 비롯하여 수많은 섬들이 깔려 있어 대도군도(大島群島)라고 하는데, 바로 이 바다에서 싸우다가 남해 관음포로 쫓겨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밖에서 보면 탁 트인 바다이자, 수로처럼 보이지만, 돌아서기만 하면, 바다가 막혀 달아날 길이 없는 곳이다. 왜적선들은 다시 돌아서서 대항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앞장서서 전군을 지휘하며 북을 힘차게 치게 했다. 위기에 몰린 왜적들은 마치 발악을 하듯이 이순신의 배를 포위하며 달려들었고, 이순신은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이를 본 진린은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이순신을 구원해 주었다.
한편 명나라 장수 등자룡이 앞장서서 적을 추격하다가 명나라 쪽에서 잘못 던진 화기에 자신의 배가 불이 붙었다. 그 사이에 왜적들이 배를 공격하여 등자룡은 전사하고 배는 불에 타버렸다.
이때 또 진린의 배가 적선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적의 장수 세 명이 층각선에 앉아 전투를 지휘 독려하고 있는 것을 보고 총과 화살을 그쪽으로 집중 사격을 가하여 그 중의 한 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을 본 적들은 자기 장수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 진린의 배에서 포위망을 풀고 그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에 진린은 위급함을 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순신과 진린은 다시 힘을 다하여 호준포를 쏘아 적선을 계속 깨뜨렸던 것이다.
조·명 연합수군의 공격으로 왜적선은 200여 척이 격침되었다. 이순신은 계속 군사들을 독려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중, 왜군이 쏜 총탄에 왼쪽 가슴이 관통되었다. 이순신은 급히 명령하여 방패로 자신을 가리라고 명했다. 이순신은 숨을 거두면서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라는 말을 남겼다.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은 이를 지켜보았고, 군관 송희립은 이들이 곡을 하는 것을 막은 뒤 이순신을 대신하여 기치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독전했다.
장병들은 끝까지 싸워 마지막으로 퇴각하는 왜적선 500여 척 중에서 20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 344명을 죽였으나, 온전하게 도망갈 수 있었던 배는 50여 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 노량해전에서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 고덕장(高德蔣) 등 장수 10명도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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