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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숨결따라]칠천량 패배의 쓰라림을 딛고
[기획특집 ③] "창피해 숨기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역사의 교훈 삼아야"
2011-06-04 05:53 | CBS문화부 김영태 기자
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66주년 되는 해이다. CBS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이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기획특집:충무공의 숨결따라]를 마련했다. 여수좌수영과 한산도,거제 칠천량과 진도 울돌목, 남해 관음포 등 주요 전적지를 돌며 오늘 이충무공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그리고 어떻게 기억되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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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7일.화창함. 정유재란 때 우리 수군이 궤멸된 칠천량해전을 취재하기 위해 경남 거제시 하청면에 있는 칠천도를 찾았다.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를 흐르는 칠천량은 임란초기부터 우리 함대가 자주 정박하던 곳으로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칠천도는 2000년 연륙교가 건설되어 거제와 연결되어 있다. 고현터미널에 내려 향토사학자 이승철씨의 차를 타고 연륙교를 통과하면서 잠시 다리 양쪽으로 펼쳐진 바다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섬으로 榕載 '칠천량해전 전시관'을 한창 짓고 있는 하청면 연구리 옥계마을 동끝산 꼭대기에 올라 칠천량해전의 역사를 들어보았다.
정유재란 첫 전투인 칠천량해전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교체되고, 원균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함대를 치러갔다가 일본군의 야습으로 궤멸당한 해전이다. 1597년 6월원균은 바다로 나가 싸우라는 조정의 계속되는 독촉에 못이겨 100여척의 군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떠나 적진을 향하였다.안골포와 가덕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회군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계속해서 부산으로 진격하기를 종용했고, 도원수 권율이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에게 곤장을 때리는 사태에 이른다. 곤장을 맞은 원균은 삼도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7월 14일 부산근해에 이르렀다. 일본함대는 회피전술을 펼쳐 원균함대를 지치게 만들었고,한산도에서부터 종일 노를 저어왔던 장병들은 피로와 기갈에 시달렸다.원균함대는 물을 구하려고 가덕도에 상륙했으나 매복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 의해 조선 수군 400명이 살해당하고, 다시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로 이동했는데 이곳에도 일본군이 매복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튿날인 7월 15일 바다 상태가 나빠져 원균함대는 풍랑을 무릅쓰고 함대를 영등포에서 칠천량으로 이동하였다. 이 때 일본 수군은 조선함대를 습격하기 위해 밤중에 수백척을 동원하여 포위를 마친 후, 16일 새벽 4시쯤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조선수군이 강력한 화포로 원거리에서 공격하기 전에 몰래 조선 군선에 접근해 근접전을 벌이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우리전선 한 척에 일본 군선 여러 척이 포위한 다음 전투 병력이 전선에 뛰어들어 육박전을 벌였던 것이다.출전한 전선 중에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탈출한 12척을 제외한 대부분이 일본함대에게 궤멸되었다.구한말에 회정 김기환이 쓴 <이순신세가>의 한 대목을 보자."배설은 진지를 옮겨 물이 깊은 곳으로 나가기를 강력히 권하였으나 원균이 고집을 세우며 듣지 아니하므로 자기수군만 끌고 바다에 나와 섰다가 일본 함대가 구름같이 습격하여 오는 것을 보고 주장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만 한산도를 향하여 달아나버렸다. 배설은 원균의 함대가 전멸할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한산도의 함락도 아주 가까운 것을 짐작하고 한산도에 들어오는 길로 병기고와 군량 수만석에 불을 지르고 거기에 살던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피난시켰다."불과 다섯달 전 이순신이 체포될 때 원균에게 넘겨준 한산본영의 군량미 9914석과 화약 4000근, 총통 300자루, 180여 척의 전선과 거북선이 가라앉고 불더미 속에서 재로 변하고 말았다. 통제사 원균은 칠천량을 탈출하여 고성땅 추원포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함대가 참패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임진왜란 해전사>를 쓴 해군사관학교 이민웅(역사학)교수는 첫째는 수군의 군령권이 통제사가 아닌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속해 있었다는 점. 두 번째 원인은 '도망', 세 번째 원인은 이를 막지 못한 원균의 지휘책임, 즉 통솔력 부족을 꼽았다. 수륙의 전력과 작전상황을 분석한 원균은 수륙병진 전술을 주장했고, 해로차단전술은 조정 신료들뿐 아니라 선조까지도 동조한 것이었다. 해로차단전술은 임진왜란 때 주효했으나, 정유재란 때는 일본군이 해안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오히려 우리 수군이 포위당할 위험이 컸다. 그래서 원균은 육지에 있는 일본군을 압박해 해안으로 나오게 한 뒤 바다에서 격퇴시키는 수륙병진작전을 주장했던 것이다. 패전의 땅 칠천도에는 승전지와는 달리 번듯한 사적 하나 없다. 다만 구전에 의한 설화만 전해져올 뿐이다. 하청면 연구리에는 금곡,옥계,연구, 곡촌 등 4개 마을이 있다. 연구리도 거북 구(龜)를 써서 거북선과 관련된 지명임을 알린다. 금곡마을 화전산(花田山)은 당시 조선수군이 잠복해있던 곳으로 가마솥에 밥을 지어먹던 곳과 수군에게 소를 공급하던 푸줏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피처럼 붉은 바위가 있는데, 왜군에 희생된 조선수군을 상징한다고 했다. 각시골은 부녀자들이 우리수군들을 위해 부식을 준비했던 곳이고,처녀골은 조선수군이 전멸했을 때 왜군이 상륙하자 처녀들이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칠천도는 예로부터 해산물이 풍부해 황금어장을 의미하는 '돈섬'으로 불리웠다. 옥계마을 이장 서흥수(76세)씨는 "이곳이 패전지가 아니었으면 국가적으로 개발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며 "이제껏 이곳 사람들은 기가 죽고 부끄러워서 패전지임을 숨기고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패전의 원인을 숙고하고,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역사적 교훈으로 삼게 하자는 여론에 일었다. 이에따라 경상남도가 이곳에 지난해부터 '칠천량해전 공원조성사업'을 시작해 판옥선 모양의 전시관을 짓고 있는 중이며, 내년 말까지 공원조성을 마칠 계획이다.
동끝산 자락의 옥계마을 반대편 해안으로 내려가자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잔잔한 물결이 출렁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앞쪽에는 일본군이 주둔했다는 씨릉섬이 보이고, 햇살이 강한데도 모래사장은 산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 칠천도 주민들은 올해 7월 이곳에 화장실과 샤워실을 갖추고 해수욕장을 개장할 예정이다. 칠천도는 거제시에서 제일 큰 섬으로 현재 1,300명이 살고 있으며, 일주도로가 16km에 이르러 고즈넉한 풍경이 매력적이다. 부산-거제간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예전에 부산에서 칠천도까지 2시간30분 걸리던 것이 지금은 40분이면 올 수 있다. 250미터 높이의 옥녀봉까지 1시간 30분 코스의 등산로가 있고,매년 1-3월이면 어촌체험마을 프로그램이 한달에 두번 진행된다. 굴과 홍합,바지락,해초 등 자연산 어패류를 직접 잡아볼 수 있다.
동끝산이 바라다보이는 옥계마을쪽 상두골만 해안에는 거북선 발굴을 위한 민간 탐사선 두 척이 물위에 떠있었다. 당초 거북선 탐사는 해군본부가 1984-5년에 벌였다가 성과없이 중단했다. 이어 경상남도는 칠천량 해전의 가슴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당시 침몰한 거북선을 찾기 위한 탐사를 2008년 6월 1일부터 추진했다. 아직까지 흔적을 찾지 못했다. 칠천도를 나와 연륙교를 건너는 동안 대형크루즈 한척이 다리 쪽을 돌아나갔다. 거제 고현항에서 진해를 오가는 미남크루즈로, 이곳 칠전량을 거쳐가며 칠천량해전의 전적지였음을 알린다. 야코가 죽고 우세스러워 숨겨만 왔던 그 패배의 쓰라린 기억.이제 칠천도 사람들은 그 아픈 기억을 딛고 역사적 교훈을 함께 나누자고 손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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