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823318
[충무공의 숨결따라]'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
[기획특집⑤]남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충무공의 첫 유해안치와 가묘 있는 곳
2011-06-07 08:47 | CBS문화부 김영태 기자
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66주년 되는 해이다. CBS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이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기획특집:충무공의 숨결따라]를 마련했다. 여수좌수영과 한산도,거제 칠천량과 진도 울돌목, 남해 관음포 등 주요 전적지를 돌며 오늘 이충무공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그리고 어떻게 기억되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편집자 주]
1.여수 - 이충무공의 효심이 살아숨쉬는 곳 http://tadream.tistory.com/5919
2.한산도- 학익진의 승리,조선수군들의 노고 http://tadream.tistory.com/327
3.칠천량- 패배의 쓰라린 기억, 역사의 교훈삼아 http://tadream.tistory.com/5918
4-1.진도- 왜덕산, 적장후손들이 찾는 평화의 무덤 http://tadream.tistory.com/5905
4-2. 진도- 명량해전에서 쇠사슬 사용은 사실인가? http://tadream.tistory.com/325
5.남해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http://tadream.tistory.com/5920
2011년 5월 18일 저녁 무렵 경남 남해 관음포를 찾았다.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 이순신의 유해가 처음 육지에 안치된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남해 충렬사에서 관음포까지는 4km 거리이다.해안도로를 따라 바다를 바라보며 달릴 수 있었다. 관음포 가는 길 초입에 이락사가 있고, 그 입구에 유언비가 눈에 띄었다. 자연석으로 된 유언비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위엄을 풍겼다. 이충무공의 인품과도 닮았다.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습 알리지 말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이락사(李落祠)는 이곳 관음포를 이순신이 떨어진 바다,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불리던 것을 따서 사당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곳은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즉 이충무공이 돌아가신 곳으로 경상남고 남해군 사적지로 지정되었으며, 유허비가 모셔져 있다. 1832년(순조 32) 이순신의 8세손 이항권이 통제사로 와서 왕명으로 제단을 설치하고 유허비를 세웠다. 이락사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순신 영상관'에서는 입체영상으로 노량해전을 감동을 전하고 있다.
이락사에서 노량해협이 바라보이는 관음포 첨망대로 발길을 옮겼다. 500미터 거리의 소나무 숲길은 신선한 바다바람과 함께 호젓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첨망대에 이르자 저녁 노을이 진 고요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편 멀리 남해대교가시야에 들어왔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펼쳐진 곳, 그 치열했을 전투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이 원수 모조리무찌른다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하늘에 빌었던 이순신은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노량해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철군하던 일본군의 퇴로를 조명연합수군이 차단하여 벌인 전투이다. 1598년 11월 18일 순천 예고성의 고니시군을 포위하고 있던 조명연합수군은 노량해협으로 함대를 이동하여 일본구원군이 오는 길목을 막고 전투를 벌였다. 일본의 구원군은 사천과 남해에서 온 500여 척의 대규모 함대였다. 11월 19일 새벽 노량해협을 통과해오는일본함대를 맞아 조명연합수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양측은 마지막 싸움이 될 각오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조명연합수군의 화포공격에 타격을 입은 일본 함대는 퇴로를 찾아 남해도 연안을 따라 가다가 관음포 쪽으로 들어갔다. 일본수군은남해도를 돌아나가는 해로로 착각했으나 관음포는 섬으로 들어가는 포구였으니 일부는 섬에 상륙하여 도주하였지만 나머지는 갇힌 신세가 되어 더욱 치열한 접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혼전과 격전 속에 큰 하늘의 별이 바다에 떨어졌으니 이순신이 54세 되던 해였다. 이순신의 일기는 이 해전이 벌어진 바로 전날인 11월 17일로 끝을 맺고 있다.
이순신의 전사를 보고받은 날 이를 기록한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다." ...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만약 순신을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다면 어찌 한산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27일)
관음포의 가청고개는 노량해전과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어느날 류성룡의 형 류운룡이 점을 쳐보니 3일 후에 일본 밀정이 중으로 가장하여 자기집에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후 3일만에 과연 중으로 가장한 밀정 두 사람이 자기 집으로 찾아왔다.류운룡은 모르는 척하고 두 명의 중을 극진히 대접하고 술을 많이 먹여 취하게 하였다. 중들이 잠든 사이 류운룡이 중들의 행랑을 뒤져보니 자세하게 그려진 조선지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몰래 꺼내어 관음포에서 강진만을 사이에 둔 좁은 육지 즉 가청고개를 푸른 물감으로 칠하여 바다와 같이 그려 넣고 다시 행랑 속에 넣어두었다. 그 후 노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조명연합군에 대패하고 패전한 잔여병이 관음포구로 들어와서 지도를 펴보니 강진만으로 해로가 있는 것을 보고 도망하였으나 가청고개가 가로막혀 지도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갇혔다고 하여 갇힌고개라고도 하고 지도에 푸르게 칠을 하였다고 하여 가청加靑고개 라고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남해 충렬사는 관음포에서 4m 떨어진 해안가 산자락에 있다. 충렬사 아래 해안에는 실제 크기(34.2미터)의 거북선 한척이떠 있었다. 2층구조로 된 이 거북선은 해군사관학교에서 전문가 16명의 고증을 거쳐 1980년 복원하여 관리하다가 1999년 이곳에 옮겨졌다. 전체 길이 충렬사는 이충무공이 전사한 이후 시신을 아산으로 운구하기 전에 이곳에 옮겨져 잠시 안치했던 가묘가 있던 곳이다. 원래 봉분이 없었으나 관광객의 볼거리를 위해 봉분을 만들었다.
남해군은 이충무공의 호국정신과 얼을 되새기기 위해 대내외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남해군은 이락사에서 충렬사에 이르는 해안로를 따라 '이순신 호국길'을 조성중에 있다. 길가 곳곳에 충무공 명언을 담은 표지석을 설치해 올해 충무공 순국일 전에 개통할 예정이다.작년 12월 16일 (이순신 순국일 음력 11월 19일을 양력으로 맞춘 날자)엔 충무공 이순신 운구행렬 재현행사를 가졌다. 12월 16일은 재현행사에 앞서 이순신 장군 운구행렬 및 장례의례 연구 발표회를 통해 전문학자 6명의 고증을 거쳤다. 운구행렬 재현행사는 이락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남해 충렬사에 이르고, 이곳에서 배로 이동하여 그 당시 통제영이 있었던 완도 고금도로 도착하여, 고금도에서 충남 아산까지 육로를 통해 올라가 현재 묘소에 이르는 코스로 진행되었다. 남해역사연구회 정의현 회장은 "이러한 것은 충무공 정신을 전국적으로 알리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고,격년제로 전국행사로 시행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올해 12월에 개통하는 이순신 호국길, 내년 12월엔 충무공 이순신 운구행렬 재현행사가 답사객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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