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gradnews.org/tc/495

[195호]학술대회1- 고구려발해학회 국제학술대회: 고구려 중기의 국제관계
2012/09/06 12:42

현장스케치

고구려발해학회는 2012년 8월 24일 국립중앙박물관 제1강의실에서 <고구려 중기의 국제관계>라는 제목으
로 제18차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규철 고구려발해학회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학회는 고구려 관련 학술연구가 지나치게 광개토왕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점을 반성하고 당시 시대상을 국제관계라는 측면에서 거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번 해는 고구려 광개토왕 서거·장수왕 즉위 1,600주년이 되는 해이자 한국과 중국, 일본이 영토문제에 있어 대립의 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때인 까닭에 더욱 주목된다. 학술대회의 한 관계자는 “고구려발해학회를 통하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학술대회 광의의 취지를 설명하기도 했다. 본지에서는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4~5세기 고구려의 남방진출과 대신라 관계>를 요약 및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학술대회 내용<4~5세기 고구려의 남방진출과 대신라 관계>
- 장창은(국민대 국사학과 강사)

고구려사에서 4~5세기는 최전성기로 일컬어진다. 이 시기에해당하는 광개토대왕(391~412), 장수왕(413~491), 문자명왕(491~519) 때 고구려는 비약적인 영역확장을 추구하고 실현했다. 그러므로 4~5세기 국제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고구려 남방 진출사는 정확하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살핀 연구는 꾸준히 축적됐다. 그 결과 4세기 말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되어 가는 과정, 광개토왕의 남정과 실성왕에서 눌지왕대까지 신라 내정에 간섭하는 모습, 장수왕의 남진과 이에 대응하는 양상,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대립하는 모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제고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연구성과의 진전에도 연구자 간의 견해 차이로 인한 쟁점과 연구상 미진한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인데, 몇 가지 쟁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광개토왕의 남정범위, 고구려의 국원 진출시기, 신라의 고구려세력 축출시기, 『삼국사기』지리지 소재 고구려고지의 신빙성 문제 등이다.이런 쟁점들을 바탕으로 고구려 중기 남방진출사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돕기 위하여 광개토왕의 남정이 가지는 의미와 장수왕대전반기인 5세기 전반부터 중반까지 대신라 관계의 추이 속에서 고구려의 국원 진출시기를 추적하고, 신라가 고구려세력을 소백산맥이북으로 축출한 이후의 장수왕이 보복전으로써 남진하는 양상을 검토한다.

1) 광개토왕의 남정과 죽령로의 장악

적어도 390년대 초반까지는 고구려가 죽령로를 개통하지 못한 듯하다. 고구려는 영락 6년과 10년의 남정으로 중부내륙과 영서지역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죽령로를 얻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예성강에서 한강 하류 유역에서 공방전을 벌였던 백제를 남한강 상류에서 남서진하여 측면에서 압박할 수 있는 교두보를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라에 진출하는 교통로를 다변화할 수 있었다. 곧 광개토왕대의 대규모 신라 구원전은 앞으로 신라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명분과 기회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광개토왕대 58성의 공취와 신라 구원전의 결과가 그대로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는지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광개토왕대 고구려의 북한강과 남한강 상류에 대한 지배는 죽령로 중심의 제한적 거점지배로 생각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2) 5세기 초·중반 대신라 우호관계의 이완과 고구려의 국원진출

광개토왕 남정 시 실성(實聖)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실성은 나물왕 46년(401) 7월에 신라로 돌아왔고, 다음 해 2월 나물왕이 죽은 후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나물왕의 아들이 어려서 국인(國人)이 실성을 옹립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물왕의 맏아들 눌지가 그 당시 왕위를 잇지 못할 정도로 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성왕이 10여 년간 고구려에 체류해 있었으므로, 즉위 배후에는 고구려가 있었을 소지가 다분하다. 실성왕(402~417)은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나물왕을 제거하고 즉위한다. 실성왕은 즉위 직후 왜와 우호를 통하고 볼모를 파견한다. 이는 직계 후손을 견제하는 것이자 동시에 이전 왕대부터 지속해서 쳐들어온 왜국에 대한 새로운 외교전술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성왕은 나물왕의 아들 눌지를 제거하려다 도리어 고구려 세력의 지원을 받은 눌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고구려가 신라 내부의 정치세력이 나물왕 직계와 방계 실성 간에 갈등하는 국면을 적절히 이용한 셈이다. 433~434년에 백제와 신라가 적어도 갈등관계를 청산하고 우호를 모색한 것은 당시 삼국 관계에 있어서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고구려와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는 메시지를 표방한 신라의 입장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신라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 고구려가 처한 대내외적 사정때문인 듯하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국원 진출시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성시기 경기 동남부 일대 백제의 방어체제를 분석한 연구로는 백제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이천 설성산성·설봉산성 등을 축조해 고구려에 대한 방어체제를 구축했다고 한다. 또한, 원주 법천리에서 중국의 수입된 양형청자·청동초두가 출토된 데 주목해 백제가 4세기 후반에 법천리 세력을 매개로 남한강 유역의 수로를 장악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나아가 법천리 고분에서 5세기 후반부터 1세기 정도 공백기가 나타나는 현상을 고구려의 국원 진출과 관련지었다. 충주지역에 소재한 장미산성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여러 정황으로 장미산성이 백제 동남향 최전방 방어성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 가 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원 진출시기는 고고학적 정황과 중원비의 연대를 조합해 보면 5세기 초반에서 중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5세기 중·후반 고구려의 남진양상과 대신라 공방전의 전개

(1) 신라 왕경 안에 주둔했던 고구려 군사의 축출 시점은 ‘453년 7월 이후 머지않은 때’로 추정된다. 454년 8월 고구려가 신라 북변에 쳐들어온 것은 이에 대한 보복전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454년에 이르러 기존의 우호 관계에서 대립관계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스럽게 경북 일대에 주둔했던 고구려 군사단도 소백산맥 이북으로 급속히 축출되었을 것이다. 장수왕은 신라가 자국의 영향권에서 이탈해가고 숙적 백제와 공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위와의 관계 때문에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펼칠 수 없었던 것 같다. 454년과 455년에 신라와 백제에 쳐들어간 기사가 조촐하게 남겨진 까닭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북위와의 긴장관계가 안정된 462년 이후 장수왕의 남방진출은 어찌 보면 예견된 것이었다.

(2) 신라의 대고구려 방어성 구축 신라가 고구려의 실직성 공략 후 하슬라(강원 강릉)사람들을 동원해서 니하(신라시대 한강 상류를 지칭)에 성을 쌓은 까닭은 삼척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직성 서북쪽에서 쳐들어 오는 세력의 방어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니하성을 정선군의 송계리 산성으로 비정한 최근 일련의 연구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신라로써도 실직성에 고구려군이 주둔한 상태라면 하슬라에서 대규모의 국민을 동원해 축성사업을 벌이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가 물러간 후 삼척의 실직성을 방어하기 위해 니하성을 축조한 것 같다. 신라가 소백산맥의 서북쪽 너머에 축성사업을 했던 까닭은 소백산맥의 지형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곧 소백산맥의 북사면이 남사면보다 경사가 완만해서 고구려군이 군사작전 시에 신라군보다 유리했기 때문이다.

(3) 고구려의 대신라 공세와 교착고구려가 신라를 본격적으로 공격한 것은 백제 한성을 공략한 이후였다. 곧 481년 3월에 말갈군과 함께 신라 북변을 침입해 7성을 빼앗고 지금의 포항시 흥해까지 진군하였다. 신라로서는 수도 인근까지 위협당하는 위기상황이었다. 하지만 신라·백제·가야의 동맹군이 길을 나누어 방어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니하 서쪽까지 추격해서 고구려군 1천 명의 목을 벤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때고구려군이 남진한 경로는 어디였을까? 일단 468년의 니하성 축조로 삼척 이북의 방어체제가 안정적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므로 동해안로 일변도의 남진은 아닐 것이다. 이는 백제·가야의 동맹군과 길을 나누어 방어했다는 것으로도 방증 된다. 그렇다면 내륙루트밖에 없는데, 죽령로 일대에는 신라군이 방어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우회하는 경로가 유력하다. 고구려는 작전선을 바꾸어백제와 신라의국경선이 맞닿아 있는 미호천 유역을 공략하였다. 곧 484년 모산성(충북 진천군)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나제동맹군의 활약으로 고구려군이 대패하였다. 고구려는 문자명왕(491~519) 즉위 후에도 신라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494년 7월에는 신라군과 싸워승리하였다. 고구려가 살수원으로 진출한 경로는 장수왕대와 사뭇 다른 인상을 주는데 경기 남부와 진천지역을 거쳐서 미호선 서쪽으로 남하하는 루트가 484년 모산성 전투의 패전으로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수원은 충주지역에서 달천을 따라 남진하면 쉽게 도달할 수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국원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곧 고구려가 5세기 중반 국원을 장악한 이후 지속해서 영역지배 하였음을 시사한다. 다만 그동안 중원비 외에 고구려의 충주지역 지배와 경영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 자료가 부족했었다. 국원의 활용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과 연결된 죽령로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5세기 고구려의 남방 교전 지역과 고고학 발굴양상을 종합해 볼 때,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죽령로를 남진 경로로 활용하였고, 장수왕대인 5세기 중반 국원을 차지한 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우산성 공략은 죽령로와 남진거점인 국원에서 남한강상류를 거쳐 신라를 압박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 결과 남한강 상류의 거점성인 우산을 확보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새로운 공세 루트를개척해나가는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교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해 보면, 문자명왕대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압박은 계속되지 못한 듯하다. 결국, 고구려의 대신라 남방진출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에 따라 삼국관계도 새로운 국면으로 재설정되었던 것이다.

취재 및 정리 = 배재윤 기자 (baejaeyoo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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