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64325

<이산> 채제공 사실은 사팔뜨기?
번암 채제공의 일화 몇 가지
08.03.26 08:05 l 최종 업데이트 08.03.26 08:05 l 김영남(magpie)

요즘 한창 재미있는 사극 드라마가 있으니 바로 <이산>이다. 영조, 정순왕후, 정조 등 주인공들 얘기는 학교 다닐 적에 많이들 배우셔서 아실 테니 넘어가고,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바로 이 분 번암 채제공 대감이시다.

▲ 한인수 : 사극 <이산, 정조>에서 번암 채제공 역할을 맡고 있는 중견 탤런트 한인수씨다. ⓒ MBC

조선 개국 초기 명재상으로 황희와 맹사성이 있다면 후기에 내려와서는 단연 번암이 꼽힌다. 영조 시절부터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며 내공을 쌓았고, 정조 대에 이르러서는 재상에 올라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정치가로서, 정조의 업적이라고 할 만한 굵직한 프로젝트 중 번암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전 상인들의 독과점을 폐지하여 상공업과 시장경제를 부흥시킨 ‘신해통공’도 그렇고, 수원 화성 축조 역시 번암이 앞장서 이끌었던 프로젝트들이다.

TV 드라마에서는 탤런트 ‘한인수’ 아저씨, 중후하게 잘생긴 저 아저씨가 그 역할을 맡고 있지만 사실 번암의 생김새는 그리 썩 뛰어난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조와 마찬가지로 당대에 보기 힘든 팔순의 장수를 누렸고, 임금들의 두터운 신임까지 얻은 명재상이었던지라 여러 본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그림이다.


▲ 번암 채제공 초상화(부분) : 화원 '이명기'가 그린 번암의 초상화. 자세히 보면 사시가 심했음을 알 수 있다. ⓒ 이명기

이 그림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이명기’의 작품인데, 임금이 하사하신 부채라든지 정교한 화문석, 아름다운 복식이며 그림 한 장에 참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바로 사팔뜨기다. 

아니, 그런데 중인 계급의 미천한 화원이 영의정씩이나 되는 큰 어른을 그리면서 사팔뜨기를 그대로 그렸어? 이런 발칙한 놈이 있나? 사시도 좀 교정하고 화장을 해서 검버섯도 좀 숨기고, 요새 말로 '뽀샵' 처리를 좀 해서 아름답게 그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 말이다.

서양의 화풍과는 달리 조선의 초상화는 오로지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것을 최고로 쳤다. 그림에 그 사람의 정신이 담겨야 한다면서,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라면서 주름살은 물론 검버섯이나 곰보자국까지도 숨기지 않고 똑같이 그렸다. 어찌나 사실적으로 똑같이 그렸던지 어느 학자는 옛 초상화의 얼굴에 나타난 주인공들의 질병까지 알아맞히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런 극사실주의 화풍에 따라 번암 채제공은 사팔뜨기로 그렸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지수재 유척기는 주당들의 상징인 딸기코를 그대로 그렸고, 뻐드렁니 때문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구강구조를 가진 송인명 역시 있는 그대로 그렸던 것이다. 특히 공재 윤두서는 스스로 자화상을 그리면서도 '뽀샵' 처리를 하지 않고 선명한 다크서클을 그대로 그리기도 했다.

그런 화풍으로 볼 때 오늘의 주인공인 번암 역시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저렇게 생긴 분이었다. 하지만 탤런트 중에 어떻게 사팔뜨기를 찾을 수 있으랴. 별 수 없이 한인수씨를 캐스팅했지만 제작진들도 나름 고민이 컷을 것이다. 

번암 얘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으니 그의 지인지감,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다. 하루는 번암이 길을 가다가 어느 대문에 붙은 입춘첩을 보고 그 댁 주인을 찾는다.


▲ 추사 김정희의 글씨 :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여손, 대충 그 뜻은 두부와 오이, 생강보다 나은 반찬이 없고, 부부와 자손들이 모이는 모임보다 좋은 자리는 없다는 뜻이다. ⓒ 추사 김정희

“이 아이가 글씨를 배우면 천하의 명필이 되겠지만… 인생이 기구할 테니… 당장 그만두게 하시오.”

여섯 살 난 아이가 쓴 글씨를 보고 그 앞날을 예언한 번암. 바로 이 아이가 김정희였고, 과연 번암의 예언대로 역대 최고의 명필, 최고의 석학이 되었지만 예술적, 학문적 성취에 비해 일생 동안 삶이 기구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었다.

오늘 주제는 사실 번암의 관악산 산행기인데 잡설이 너무 길었다. 이제 번암을 따라 관악산으로 가보자. 당시 67세의 나이로 노량진 근처에서 은거해 살고 있었던 번암이 하루는 동생과 아들을 비롯한 집안 식구들과 함께 관악산 연주대에 오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처음엔 물정 모르고 말을 타고 갔지만 길이 험준해 곧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고, 넝쿨 붙잡고 골짜기를 헤매다가 암자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는, 말 그대로 조난을 당하기도 했다. 다행히 일행 중 한 명이 길을 찾아 모두들 환호하며 암자에서 하루를 묵는다. 

요즘은 당일 코스지만 그 시절엔 사흘 길이었다. 오며 가며 하루씩을 절에서 묵어야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노량진에서 말 타고 10리를 갔다고 하니 관악산 북면, 지금의 서울대 입구 방향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하루를 묵었다는 불성암은 오늘날 산의 남쪽면 과천 쪽에 있으니 그들이 어느 길로 들어가서 어떻게 해메 다녔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튿날 아침 연주대 가는 길은 워낙 험해서 나무꾼들이나 중들에게도 힘겨운데 대감께서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스님들에게 번암은 명대사 한 마디를 날린다. 

“천하만사는 마음에 달렸을 뿐이네. 마음은 장수요, 기운은 졸개이니, 장수가 가는데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

그 후 번암이 연주대에 오르는 길을 묘사한 부분은 참으로 재미있다. 천길 낭떠러지 절벽에 바짝 붙어서 눈을 옆으로 돌리지도 못하고 늙은 나무뿌리를 겨우 붙잡고, 그야말로 노인네가 생전 안 다녀본 산길을 설설 기면서 오른 것이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고쟁이가 뾰족한 부분에 걸려 찢어져도 안타까워할 틈이 없다’고 했겠는가.

마침내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간 연주대에서 이 노인네는 도성을 내려다보며 오래 전 미수 허목(1595~1682)이 연주대에 오른 일을 상고하며 탄식을 한다.

“미수 어른은 83세에 연주대에 오르면서도 걸음이 날 듯했다는데, 나는 기력이 쇠진하고 숨이 차서….”

또한 자신도 훗날 여든 셋이 되면 남의 등에 업혀서라도 이 연주대에 다시 오리라 다짐도 한다. 노인네가 욕심도 많지, 당대에 67세면 이미 드물게 장수한 편이거늘 여든 셋까지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번암은 꼭 팔십을 채우고는 돌아가시는 바람에 여든 셋에 다시 연주대에 오르겠다는 그의 희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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