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B%82%99%EB%9E%91
낙랑
낙랑(樂浪)은 1세기 중엽에 있었던 고대 정권으로 32년 또는 37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다.
역사
<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거서간/남해차차웅/유리이사금 때 북쪽의 낙랑이 자주 침입했다고 한다.
낙랑의 왕은 최리(崔理)로 서기 30년 경에 옥저(沃沮) 지역으로 사냥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간 후 최리의 딸(낙랑공주)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32년에 낙랑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
신라 측의 기록에 따르면 낙랑이 멸망한 때는 37년으로,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한 후 낙랑의 백성 5천여 명이 신라로 와서 투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기록에도 37년에 낙랑을 멸망시킨 기록이 있어 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32년부터 시작된 낙랑과의 전쟁이 37년에 종결된 것으로 보기도 하며, 37년에 멸망한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으로 보기도 한다.[2]
낙랑과 낙랑군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조선시대까지는 낙랑과 낙랑군을 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에 일반적으로 낙랑군의 위치로 파악하였던 평안도 및 황해도 일대가 비정되었으며,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은 중국 측 기록에 낙랑군이 정복된 사실이 없고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찾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낙랑군과 낙랑을 별도의 존재로 파악하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주요 주장으로는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3],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4] 등이 있다.
북조선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사회과학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펴내는 역사연구라는 학술지를 통하여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낙랑"은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서 발견된 '정백1호동 고분'과 '정백2호동 고분'[5]을 통해서, 당시 낙랑은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한나라의 문화와 관련이 없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북조선에서는 한나라가 세운 괴뢰 정권이 만주의 동북지방에 존재했다고 하며 '삼국유사'에서 최리를 낙랑의 "왕"(王)으로 인정한 것도 낙랑이 실제로 존재한 국가였음을 밝혀주는 자료라고 주장한다.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는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기존의 낙랑군 위치인 평안도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6]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인정되고 있지 않다.
둘러보기
낙랑군
주석
낙랑
낙랑(樂浪)은 1세기 중엽에 있었던 고대 정권으로 32년 또는 37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다.
역사
<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거서간/남해차차웅/유리이사금 때 북쪽의 낙랑이 자주 침입했다고 한다.
낙랑의 왕은 최리(崔理)로 서기 30년 경에 옥저(沃沮) 지역으로 사냥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간 후 최리의 딸(낙랑공주)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32년에 낙랑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
신라 측의 기록에 따르면 낙랑이 멸망한 때는 37년으로,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한 후 낙랑의 백성 5천여 명이 신라로 와서 투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기록에도 37년에 낙랑을 멸망시킨 기록이 있어 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32년부터 시작된 낙랑과의 전쟁이 37년에 종결된 것으로 보기도 하며, 37년에 멸망한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으로 보기도 한다.[2]
낙랑과 낙랑군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조선시대까지는 낙랑과 낙랑군을 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에 일반적으로 낙랑군의 위치로 파악하였던 평안도 및 황해도 일대가 비정되었으며,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은 중국 측 기록에 낙랑군이 정복된 사실이 없고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찾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낙랑군과 낙랑을 별도의 존재로 파악하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주요 주장으로는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3],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4] 등이 있다.
북조선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사회과학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펴내는 역사연구라는 학술지를 통하여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낙랑"은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서 발견된 '정백1호동 고분'과 '정백2호동 고분'[5]을 통해서, 당시 낙랑은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한나라의 문화와 관련이 없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북조선에서는 한나라가 세운 괴뢰 정권이 만주의 동북지방에 존재했다고 하며 '삼국유사'에서 최리를 낙랑의 "왕"(王)으로 인정한 것도 낙랑이 실제로 존재한 국가였음을 밝혀주는 자료라고 주장한다.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는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기존의 낙랑군 위치인 평안도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6]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인정되고 있지 않다.
둘러보기
낙랑군
주석
- ↑ 네이버 백과사전 낙랑공주, 《네이버》, 2011년 3월 3일 확인.
- ↑ 대무신왕#낙랑 정벌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 ↑ 권오중, 《낙랑군연구》, 일조각, 1992
- ↑ 문안식,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낙랑·말갈사료에 관한 검토〉, 《전통문화연구》5, 1997
- ↑ 네이버 백과사전 낙랑고분, 《네이버》, 2011년 3월 3일 확인.
- ↑ 신채호, 《조선상고사》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고구려 > 주변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랑군은 침략자였는가 - 한겨레21 (0) | 2013.06.19 |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0> 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肅愼) - 프레시안 (0) | 2013.05.30 |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⑤ 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 - 한겨레 (0) | 2011.10.20 |
2천년전 낙랑군 인구 4만5천세대 28만명 - 한겨레 (0) | 2011.10.19 |
한사군[ 漢四郡 ] - 네이트 (0) | 2011.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