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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500년전 당나라군 침입막던 요새 청석관 건재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6>
중부일보 2010.02.16  남도일보 2012.01.05 00:00

연개소정의 무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쌍정산 남쪽 비탈

연개소문의 고장 건안성
 
요령성에서 연개소문의 전설이 가장 많이 떠도는 곳이 개주(蓋州·영구시 관할)시 청석령(靑石嶺) 지역이다. 고구려시대 건안성(建安城)이 바로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최근 들어 두 번 이 고장을 답사했다.

건안성의 방벽 청석관

개주시에서 대련~하얼빈 간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7.5km가량 나가면 청석령진(鎭·한국의 면에 해당)이란 곳이 있는데 이 지역에 고구려 시기의 유적 건안성과 성의 남쪽 방벽 청석관(靑石關)이 있다. 청석관은 원래 개주에서 북으로(5km) 나드는 좁은 통로에 설치된 관문으로, 이 고장에 청석령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개주시 청석령진 역시 청석령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청석관은 1천500여 년 전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 당나라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관문으로서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청석관은 그 당시 평곽현(平郭縣·옛 평지성), 즉 현재의 웅악(熊岳)과 옛 건안성(建安城)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개주향토지(蓋州鄕土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 총장(總章) 1년에 건안성을 세우고 건안주도독부에 소속시켰다. 서기 404년 고구려인이 이곳을 점령하고 건안성을 축조했으며 청석관을 방벽으로 삼았다… 명(明) 신종(神宗) 만력(萬歷) 대에 청석관을 복원하고 인공으로 500m 남짓한 통로를 뚫었는데 좁은 곳은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관문은 청벽돌로 쌓았고 높이 6.7m, 너비 2.7m로 문 위에 ‘청석관’이라 새겼다. 청석관 남측 길 서쪽 벼랑에는 청조(淸朝)의 명인 왕이렬(王爾烈)이 쓴 석비가 있었고, 청석관 북측 길 동쪽 벼랑에는 청(淸) 강덕(康德) 원년(서기 1934년) 8월 개평현 현장 신광서(辛廣瑞)가 세웠다는 청석관 복원비가 있었으며, 청석관 남쪽 양켠에는 절교비(節敎碑) 여러 개가 있었다. 1950년 대련~하얼빈 간 도로를 신설할 때 청석관을 뜯어내고 길을 넓히면서 이 청석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86년 개현(현재의 개주-필자) 정부에서 청석관 남쪽에 시비(市碑) 1기를 세웠는데 동북3성에서 이름난 서예가 심연의(瀋延毅)가 생존에 쓴 ‘옛 청석관(古靑石關)’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95년 현지 유지 방지가(方志家)와 이운형(李芸馨)이 7만여 원을 투자해 원 청석관 동쪽 비탈 10여m 위치에 청석관 관문을 중수했다.”

필자가 청석관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청석령 산자락을 파헤치고 뻗어나간 하대도로(하얼빈~대련 국도의 현지 호칭) 비탈길 남·북 양쪽에서 차량들이 윙~윙~거리며 고갯마루를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노라니 넓은 아스팔트길을 따라 지나가는 차량들도 저렇게 힘들어 보이는데 옛날에 사람들이 한걸음 한걸음씩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와 군사들이 겹겹이 지켜선 이 요새를 통과하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당백의 관문이었다.

청석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100m가량 사이 둔 돈대산(墩臺山) 위에 봉화대가 하나 보인다. 봉화대의 너비와 길이는 각각 8m, 높이도 8m로 여섯 단의 석대 위에 청벽돌로 건물을 쌓았다. 옛날에 청석관을 지키던 고구려인들은 이 봉화대를 통해 건안성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한다.

청석령 지역에 주전(朱甸)이라는 마을에도 봉화대가 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이 봉화대는 약 1m 두께의 청벽돌로 쌓고 안에 흙을 채워 넣었다. 봉화대 밑자리와 윗부분은 정사각형이며 네 모서리가 각각 동서남북 쪽을 향해 있다. 봉화대 밑자리의 너비와 길이는 각각 약 8m, 수직고도 역시 약 8m이다. 천년이 훨씬 넘은 봉화대는 담벼락이 몇 군데 갈라져 있지만 석회로 된 청벽돌 이음새가 아주 단단해 보였다. 이곳 주민에 의하면 인근 마을 상대(商臺)에도 이런 형태의 봉화대가 있었는데 벌써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다고 했다.

우우산에서 북쪽으로 내려다 본 비운채 마을, 이 곳은 옛날 고구려군의 연마장이었다.

연개소정의 ‘깜박 사랑’이 화근?

청석관과 주변의 지세를 살펴보면서 이 관문이 함락될 경우, 안에 있는 건안성과 모든 사람들은 자연히 위험에 처하게 됐을 것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때 이런 일이 있어 상상치도 못한 후과를 초래했다는 현지 설화를 필자는 들었다.

청석관을 넘어 대련~하얼빈 간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1.5km가량 내려가다 보면 서쪽으로 구불구불 뻗어나간 길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좀 나아가면 꽤 큰 마을 하나가 있다. 여기가 바로 우우산(羽牛山·돈대산 서쪽으로 이웃한 작은 산) 자락 북쪽 언덕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비운채(飛雲寨)라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연개소문의 여동생 연개소정에 관한 설화가 많다. 지금 촌민 600여 가구, 3천여 명으로 청석령진에서도 가장 큰 마을에 속하는 이 고장은 1천400여 년 전 고구려군의 기병 연마장이었다고 전한다. 여당(麗唐)전쟁 시기, 평곽성과 건안성이 선후로 당나라군에게 함락되고 연개소문이 도주하자 그의 애첩인 마비운(馬飛雲)도 달아나다가 당나라군에 잡혀 죽임을 당해 이곳에 안장됐는데 비운채라는 마을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고 전한다.

그에 앞서 연개소문은 건안성을 지켰고 그의 여동생 연개소정은 비운채에 거주하면서 청석관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현지에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개소정은 무예가 매우 출중했고 비도(飛刀)를 잘 날렸다 한다. 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군마를 거느리고 청석관에 이르러 관문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연개소정이 뛰어나와 설인귀와 접전을 벌였다. 수십 합을 겨루자 개소정은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났다. 이것이 계책인줄 모르고 바싹 뒤쫓던 설인귀는 말과 함께 미리 파놓은 고구려군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개소정은 설인귀를 달래어 항복을 하게 하는 한편 이곳에서 함께 살 것을 권했다. 설인귀는 거짓으로 응하고 그날 밤 개소정에게 술을 잔뜩 권하여 취하게 한 뒤 그녀를 죽여 버렸다. 그리고 곧장 청석관으로 달려가 관문을 지키는 고구려 군사들을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당나라군이 들어오게 했다. 당나라군에 의해 청석관과 비운채는 함락되고 개소정이 죽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연개소문은 건안성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연개소정이 자신의 탓으로 죽게 됐다는 설화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건안성을 지키고 개소정에게 비운채에 있으면서 청석관을 지키게 하였을 때, 만약 적정(敵情)이 생겨 위급할 경우 돈대산 봉화대에 낭연(狼煙·승냥이 똥을 태워서 연기를 내는 것, 이렇게 피운 연기는 흩어지지 않고 한 줄기가 되어 하늘로 곧추 올라간다고 함)을 피워 건안성과 연락하도록 서로 약속했다. 한 번은 연개소정이 시험 삼아 낭연을 피우게 했는데 연개소문이 급보인 줄 알고 급히 달려왔다. 와서 보니 개소정의 장난이었으므로 꾸짖고 돌아갔다. 그 후 설인귀가 쳐들어오자 당해내지 못한 개소정은 낭연을 피워 건안성에 급보를 전했다. 하지만 한 번 속은 바 있는 연개소문은 결국 원병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연개소정이 설인귀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설인귀는 전쟁터를 정리한 후 개소정의 시신을 비운채 부근 양지바른 산비탈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청석령진지(鎭志)》에는 이에 대해 기록해 놓은 진지의 필자가 직접 목격한 글이 남아 있다. “… 필자가 어릴 적에 비운채에서 청석관으로 가는 수레길을 자주 다녔다. 비운채 남쪽 두둑 동쪽으로 나 있는 길 북켠의 산 남쪽 비탈 밭에 봉분 하나가 외롭게 있는데 봉분 앞 남쪽에는 약 3척 높이의 윗머리가 둥근 비석이 있었다. 여기가 바로 개소정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이 무덤은 합작화 초기(1950년대 중기-필자) 평분(平墳) 운동을 할 때 생산대(마을-필자)에서 트랙터로 밀어 버려 비석은 딴 곳으로 옮겨졌는데 행방불명이다.” 후에 여러 나라 학자들이 연개소정의 묘지를 찾으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한다.

금년 2월에 필자는 이곳 지방지 기록에 근거하여 현지인의 안내로 연개소정 무덤이 있던 산비탈을 현지 답사했다. 답사한 바로는 개소정 묘터는 비운채 동남쪽 쌍정산(雙頂山) 남쪽 자락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지세를 살펴보면 비운채 남쪽으로 우우산이 있고, 그 동쪽에 돈대산이 있으며, 돈대산 동북쪽 비탈에 청석관이 위치하고 있다. 청석관에서 큰길을 따라 북으로 좀 나아가다가 길 서쪽, 비운채 마을 동남쪽에 산봉우리 두개가 가깝게 붙어 있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쌍정산이라 부른다. 쌍정산 남쪽 비탈이 비운채 마을 남쪽 두둑에서 동쪽으로 청석관으로 나아가는 옛 수레길 북켠의 양지바른데 넓게 펼쳐져 있다. 여기가 바로《청석령진지》에 기록된 개소정 무덤이 있던 곳의 위치와 완전히 일치한 고장이다. 연개소정은 1천여 년이란 긴긴 세월을 이 안식처에서 외로이 지내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그녀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진 몰라도 50여 년 전에 사라졌던 묏자리에 하나둘씩 무덤이 나타나 밭과 과수원에 산재해 있다. 아마 이곳은 묏자리로 쓰기에 적합한가 보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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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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