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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바다 동시방어 전초기지..요동성.안시성 1차방어선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7>
중부일보 2010.02.22 남도일보 2012.01.12 00:00
건안성의 중요한 전략적 위치
연개소문의 고장 건안성
건안성 안의 서남쪽 모습
건안성은 요동 고구려 성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지리적으로 건안성은 요동성에서 요동반도를 이어주는 교통 요충지에 위치해 요동에서 말하면 남으로 바다 쪽의 방어요새, 즉 남북, 육해(陸海) 양면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고, 요동성과 안시성을 지켜주는 1차 방어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당나라군 동정(東征) 시기, 당 태종 이세민은 요동성을 바라고 가다가 건안성에 다다랐을 때 “건안성을 함락시키면 안시성은 내 손 안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건안성은 해성(海城)에 있는 안시성과 함께 백암성, 요동성 등의 고구려성이 함락된 후에도 오랫동안 버텼던 성이다. 당 태종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안시성에 이르렀을 때 안시성 성주 양만춘(정사에는 나오지 않고 야사에만 나오는 인물)은 험준한 성을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갖은 방법으로 안시성을 쳐도 끄떡하지 않으니 당 태종은 안시성을 버리고 먼저 건안성을 치자고 했다. 이에 이세적이 반대하고 나섰는데, 그 이유는 먼저 건안성을 친다면 당나라군의 보급기지인 요동성과 멀어지게 되므로 고구려군이 보급로를 차단할 경우 위험해 질 것이라는 데서였다.
건안성을 먼저 치자는 태종의 심산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장량(張亮)이 이끄는 수군 4만 명이 건안성을 둘러싸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건안성이 안시성에 비해 공격하기 쉬운데다 건안성을 치면서 안시성에 일부 군사를 남겨 공격을 함으로써 안시성의 군사가 나오지 못하게 견제한다면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이세적의 간언에 타협하고 안시성부터 치기로 하여 결국 안시성에서 저지당해 실패했다.
‘고려성촌’과 건안성
개주시에서 청석관을 지나 대련~하얼빈 간 국도를 따라 북으로 2km쯤 가면 길 동쪽으로 뻗어나간 길목에 고려성촌(高麗城村)이라고 쓴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고구려산성, 즉 건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고려성(사실은 고구려성이다. 중국 기타 지역에도 고구려를 고려로 오인하고 또 그렇게 표현하는 현상이 많다. 지명이나 이정표도 마찬가지다)촌은 세 개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4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길 입구의 마을은 보천구(寶泉溝), 조금 더 들어가면 무림구(茂林溝), 이 두 마을 중간에서 남쪽으로 돌다리를 건너면 고려성촌에 이르게 된다. 고려성촌으로 들어가면 고려성산성(옛 건안성)으로 가는 북문이 나 있는데 고려성촌은 이 북문을 사이에 두고 다시 성 안, 성 밖 두 마을로 나뉜다. 성 안의 부락은 또 서문을 기준으로 성 안으로 내려가며 상촌, 하촌으로 나누어 불린다.
건안성은 서기 404년에 고구려가 요동성과 함께 이 지역을 점령한 뒤 축조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13년, 즉 동진(東晉) 원흥(元興) 3년(서기 404년) 11월 고구려가 요동 각지를 점령했다. 요동지역을 확고하게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군은 부근에 많은 산성을 구축했다. 이는 전쟁 시 군사와 백성들을 산성에 이주시킴으로써 험준한 지세에 의지해 굳게 지키려 함이다. 때문에 당(唐)은 수차 동정(東征)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평곽성과 건안성은 바로 이러한 두 겹의 방어시설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중국명승사전(中國名勝詞典)》에는 건안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 건안성은 개현(지금의 개주시) 북쪽 7.5km 거리를 둔 청석령진 고려성촌 동산에 위치해 있다. 건안성의 산세는 가파르고 서남쪽 가장 높은 산봉우리(노청산)는 해발 308.7m로 산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발해가 눈앞에 펼쳐진다. 산성은 6세기 무렵 축성됐는데 당나라 때 건안주로 고친 것은 건안주도독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산성은 불규칙적인 원형이며 가운데는 마을과 과수원, 밭이고 주변으로는 험한 산등성이를 따라 돌로 성벽을 쌓았고 부분적으로는 토성을 쌓았다. 어떤 곳은 가파른 벼랑이 성벽을 대신하고 있으며 산성의 둘레는 약 5km이다. 산성에는 성문이 세 개, 수문이 한 개 있으며 전망대는 네 개가 있다. 산성 중앙에는 작은 산이 솟아있다. 금전산이라 부르는 이 산봉우리의 높이는 20m로 그 위에 건물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전망대로 이용하던 곳이다. 금전산 주위로 우물 5개와 저수지 하나가 있다. 우물은 겨울에도 얼지 않고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 병사들이 주둔하기에 적격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고구려 시기의 붉은 줄무늬 기와 조각이 가장 많고 돌절구와 철갑옷 조각, 말등자, 철촉 등이 있다.”
필자는 처음 답사할 때 고려성 밖에 있는 마을 어귀에서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는 두 노인을 만났다. 이들에게 산성 탐방의 뜻을 설명했더니 왕계창(王繼昌)이란 82세 된 노인이 흔쾌히 안내해 주겠다고 우리 차에 올랐다. 그는 먼저 산성(건안성) 북문 터로 안내했다. 북문 터에는 현재 석면제품 공장이 들어서 있다. 검은 공장철문 옆에는 개주시 정부에서 세운 ‘고려성산성’이란 비석이 세워져 있고, 몇m 밖으로 길 가장자리에는 ‘옛 건안성’이라고 새긴 비석이 마주 서 있다. 이 두 비석이 폐쇄된 공장 문 앞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쓰레기, 공장폐기물과 함께 방치된 것을 본 필자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북문은 필자가 보기에는 서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려 보였지만 현지 사람들은 모두 북문이라 불렀다. 이 북문 터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산등성이가 점점 높아지면서 이어지는데 이 산등성이를 탄 성벽 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성문 남쪽으로 수십m 위쪽에는 약간 꺼진 부분이 있는데 이곳은 옛날 수문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300여m 나아가면 서문 터가 나온다. 북문 터에서 서문 아래쪽까지는 토성인데 남북 바위산 중간을 토석으로 다져 쌓아 축조한 성벽이다. 현재 성벽은 허물어져 없고 흙 둔덕만이 남아 이곳이 옛적 성벽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북문 터를 보면 남쪽 성벽은 약간 안쪽으로, 북쪽 성벽은 약간 바깥쪽으로 어긋나게 마주치면서 성문이 서남쪽을 향해 나 있는데 성문 북벽 터가 10여m로 넓게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적을 방어하기 유리하게 이곳을 옹성 형태로 축조한 듯싶다. 동문 역시 이와 비슷한 형태로 축조돼 있다. 그 단절된 성벽을 보면 층층이 판축기법으로 견고하게 다져 쌓은 흔적이 확연한데 1천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생한 걸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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