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9>후고려기(後高麗記)(12)  - 광인"에서 약광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7173661

약광(若光)

《속일본기》에 보면 이때 일본측 송사는 조신인 고려대산(高麗大山, 고마노 다이산)과 련인 이길익마려(伊吉益麻呂, 이키노 마스마로). 고려대산(고마노 다이산)은 옛 고려의 왕족 후손이었다.
 
 
<사이타마현 히타카시 소재 고마진쟈. 고려왕 약광을 모시는 진쟈이다.> 
 
앞서서 잠깐 언급한 바가 있지만, 쟈코오 즉 약광의 성은 고씨, 고려의 왕족이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바, 왜황 천지(天智, 덴지) 5년(666) 고려의 사신으로서 왜를 방문했던 사신 가운데 '현무약광(玄武若光)'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여기서 현무약광이 바로 약광이다. 고려의 왕족이 고(高)씨인데 현무약광이라고 이름을 적은 것은 아마도 그가 고씨에서 갈라져나간 분파라는 의미 같다. 흑치상지도 원래 조상은 부여씨였지만 조상이 '흑치' 땅에 봉해져서 그 땅의 이름을 따서 성씨를 바꾸었다지 않은가. 또한 '현무'라는 것이 '북방'을 상징한다고 하면 고려 북부에 봉해진 고려 왕족으로서 성씨를 '현무'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무방할지도 모르겠다.
 
고려가 멸망한 뒤 약광은 상모국(相模國, 사가미노쿠니) 오이소(大磯)ㅡ 지금의 일본 카나가와 현 오이소마치에 살았는데, 곧 조정으로부터 종5위하의 벼슬을 받고, 대보(大寶, 다이호) 3년(703)에 왜황 문무(文武, 몬무)로부터 고려(고마)라는 성씨와 함께 '왕(王, 고니키시)'라는 카바네(姓)를 하사받았다고 《쇼쿠니혼키》는 전한다. 그 뒤 '고려왕약광(高麗王若光, 고마노고니키시 쟈코오)'이 약광의 일본에서의 정식 이름이 되었지만, 이후 약광이나 '고려왕(고마노고니키시)'라는 성씨는 일본의 역사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왜황 원정(元正, 겐죠) 영귀(靈龜, 료기) 2년(716), 무사시노쿠니(武藏國)에 고려군(高麗郡, 고마노고오리)이 설치될 때, 일본 조정은 동해도(토카이도) 7개 쿠니에서 모두 1799명의 고려인을 추려 이곳으로 옮겼고 약광은 그 군의 책임자격인 대령(大領, 다이료)으로 임명되어 오이소를 떠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척박한 황무지에 불과했던 고려군을 개척하면서 약광은 민생을 안정시켰고, 훗날 간토의 여러 무사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약광이 오이소를 떠난 뒤에도 오이소 사람들은 약광의 덕망을 그리워하며 고려사(高麗寺, 고마지)를 세우고 약광의 영혼을 모셨다고 전한다(지금은 절이 폐사되었다). 만년에 허옇게 세어 성성한 수염 때문에 고려 군민으로부터 '시라히게[白髭] 님'이라고 존경받았지만,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언제 죽었는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무장국(무사시노쿠니)에 있었던 고려향(高麗鄕, 고마노사토). 지금의 사이타마현 히타카시 일부 및 한노우(飯能) 시의 일부에 해당하며, 카즈사노사토(上總鄕)라 불리기도 한다.>
 
고려향(고마노사토)를 중심으로 고려군은 번창했는데, 중세 이후로 히타카(日高) 시를 비롯해 츠루가시마(鶴ヶ島)시 전역과 한노우, 카와고에(川越), 이루마(入間), 사야마(狹山) 시의 각기 일부가 고마군의 일부가 되었다. 고마진쟈의 주신인 현무약광, 고려왕약광(고마노고키시 쟈코오)은 신사에서 고려대궁대명신(高麗大宮大明神), 대궁대명신(大宮大明神), 백자대명신(白髭大明神) 등으로도 불리는데, 그 외에도 사루타히코노미코토(猿田彦命), 타케노우치노스쿠네노미코토(武内宿禰命) 같은 일본 신을 모시고 있으며, (그것도 약광 본인이 그 두 신을 제사 지낼 사당을 지었던 것이 시초라고 했다) 고려신사(고마진쟈)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1868) 이후의 일이다. 약광이 죽은 뒤, 고려군 사람들은 약광을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받들며 이 신사를 지었고, 훗날 시라히게명신과 합사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고려(고마)씨 집안의 족보에는 약광의 적남 가중(家重, 이에시게)가 그의 대를 이었고, 천평(덴표) 20년(748)에 죽었다고 했는데, 에도 시대의 군지(郡志)인 《신편(新編)ㆍ무장풍토기고(武蔵風土記稿, 무사시노후도키코우)》(1830)에서 이에시게의 사망년대를 약광의 것으로 잘못 기록하는 바람에 이것을 그대로 인용한 연구서 등에서는 약광의 죽은 시기가 가중(이에시게)의 사망년대인 것처럼 기록되고 있다.(정확히 약광이 언제 죽었는지는 모른다.)
 
일본에서는 이 진쟈의 신을 '출세명신(出世明神)'이라고도 부르는데, 일본의 27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1870~1931), 28대 와카츠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郎: 1866~1949), 30대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1858~1936), 41대 코이소 쿠니아키(小磯国昭: 1880~1950), 44대 시데하라 키쥬로(幣原喜重郎: 1872~1951), 그리고 52대, 53대, 54대에 걸쳐 내각총리대신이 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1883~1959) 등이 모두 이 진쟈를 참배한 뒤에 내각총리대신이라는 고위직을 역임하게 되었다는 데서 연유하며, 지금도 출세를 꿈꾸는 정치꾼들이 이 진쟈를 드문드문 찾는다나. (여담이지만 사이토 마코토는 일제시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던 일도 있다.)
 
주일 한국대사가 이곳에 방문한 적도 있고, 태왕사신기 한창 뜨던 때도 참배객들이 많았었다. 배용준도 저기 갔었을라나. 신사의 방명록에 한국 연예인 이름이 많다던데.
 
 
<고려산(高麗山, 고마잔) 성천원(聖天院, 쇼텐인) 승락사(勝樂寺, 쇼라쿠지). 약광의 셋째 아들 성운(聖雲, 쇼운)이 세운 절이다.>
 
또한 사이타마현 히다카시 신보리에 있는 성천원(쇼텐인)·승락사(쇼랴쿠지)는 고마 일족의 보리사(菩提寺, 선조의 위패를 대대로 모시는 절)로서 약광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이며, 약광의 셋째 아들이라는 승려 성운(쇼운)이 세운 것이다.(절이 있는 산의 이름조차 고마잔高麗山이다) 이 절의 카미나리몬(雷門) 앞 우측에 있는 고려왕묘(고마왕묘)가 약광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쇼텐인 본당 왼쪽에는 약광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절의 본존은 성천환희불(聖天歡喜佛)이라 해서 쇼운의 스승이었던 승락(쇼라쿠) 상인(上人, 대사大師라는 뜻)이 고려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인들에게도 '민족'이라는 의식이 있었을까? 난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은 26대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려인들하고만 혼인했고 자식을 낳아 대를 이었다는 것. 혈연적으로 볼 때 굉장히 폐쇄적인 일련의 공동체가 8백 년 남짓을 일본에 존재하고 있었다. 고려인이 중심이 된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아니라 그냥 자기네들 '수명'이 다 돼서, 알아서 절로 무너졌다. 지금은 히타카군으로 이름이 바뀐 고려군 주민들의 후손들에 의해 공동체는 혈연이 아닌 지연과 문화적인 동질성으로 유지되고 있다.
 

<쇼라쿠지 약도.>
 
내가 이리저리 자료를 긁어모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점 가운데 하나는, "고려가 멸망한 뒤 일본으로 망명한 고려인 망명객들은 어째서 발해가 건국된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고마씨만 해도 고려의 왕족이고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설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하면 일족이 싸그리 이동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을 법 한데, 더구나 발해는 스스로가 고려의 후계를 자처하는 나라였고 고씨가 대씨 다음 가는 귀척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던 나라가 아닌가. 가서 자기들이 고려의 왕족이었다고 밝히면 당장에 귀척 대접 받을 텐데, 당시만 하더라도 변방에 날씨도 개판이고 더구나 이민족과 가까운 그 무사시에서 황무지나 갈아엎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았겠냐고.
 
일본에서 발해로 간 사람이 있기는 있었는데 단지 기록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들은 발해로 망명할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망명한 고려인들은 대씨가 세운 발해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아 발해로의 귀향을 포기하고 그냥 일본에 눌러살기로 마음먹었던 것인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고 쉽게 단정짓기는 어려운 일. 입국절차도 없고 귀화절차도 까다로운 것 없이 바다 건너가서 안착만 하면 될 판국에 바다를 건너기 힘들어서 그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고려에서 왜로 올 때 사용한 항로나 항해방법을 잊어서 그랬다면, 두 나라 사이를 오고간 사신단의 빈도를 생각할 때(폭풍을 만나 자주 욕도 봤지만) 그들을 따라간다거나 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돌아가지 않았을까.
 
 
<약광의 무덤. 승락사 경내에 있다.>
 
나라 잃은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무조건 땅을 치며 울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덩실덩실 춤추었을 리도 없다. 이미 사라져 흩어져버린 약광의 영혼 앞에 대고 심정이 어떠셨는지 물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약광의 삶을 그저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달래며 살았던 사람으로 애석하게 여긴다는 건 너무 편협한 해석이다. 우리는 우리 시각에서 약광을 바라보지만, 일본 사람들은 또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에게 약광은 한편으로는 단순한 이방인일 뿐이고 망명객에 지나지 않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땅을 개척하고 다스린 '일본의' 위인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적어도 그와 고려인들이 이주해 살았던 사이타마 현에서는)
 
사람은 어떤 세상을 살든 그 세상에 견뎌내게 돼있다. 나쁘게 말하면 '현실에 대한 순응'이고 '현실의 안주'지만,
좋게 말하면 '적응력' 즉 '생존력'이다.(나는 좋게 말해달라는 말을 별로 달가워않는다) 약광이나 고려인들이 당시 살았던 무장국(무사시노쿠니) 고려군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황무지, 게다가 '하이(에미시)'라는 이민족들의 땅과 접한 변경지대였다. 풀도 한 포기 자라지 않던 그 땅을 개척해 옥토로 만들어냈다. 고려인들은ㅡ마치 '잡초'와도 같은 생명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정착해서 그 척박하던 곳을 백화가 만발하고 시원한 바람 부는 옥토로 변모시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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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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