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6547311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2>후고려기(後高麗記)(5)"에서 이다조 관련 내용만 따로 옮깁니다.

이다조(李多祚)  

왠지 요즘 들어 글을 날려 쓰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역시 나 혼자뿐일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려계 집안은 비단, 왕족인 횡성 고씨나 장군가인 진주 강씨, 문관가인 익산 이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여기서 또 고려계 가문을 하나 더 추가시켜야 할 것 같다. 장흥 이씨 일족. 이들을 고려계 가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해동역사》를 뒤적이다가 발견한 한 인물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부터였다.
 
이다조(李多祚). 장흥 이씨 일족의 시조이자 당의 우림위대장군(羽林衛大將軍)ㆍ상주국(上柱國) 요양군왕(遼陽郡王)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남자.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측천무후의 휘하에서도 그녀를 도와 돌궐과의 전투에 참전했고, 705년에는 장간지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중종을 옹립함으로서 당조의 부활에 공을 세웠으나, 707년 위황후와 대립하던 태자 이중준과 함께 다시 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살해된 인물이다. 장흥이씨족보는 그가 당의 황족이고 조상이 농서군왕에 봉해졌다고 적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신당서》와 《구당서》는 모두, 이다조를 향해서 "대대로 말갈의 추장이었다[代爲靺鞨酋長]"고 적고 있다.
 
측천무후가 여제로서 당조를 다스리던 시대, 그는 돌궐이나 흑수말갈, 거란족과의 전투에서 수차례 공을 세웠고, 그 공로로 우응양대장군(右鷹揚大將軍)부터 우무위대장군(右武威大將軍), 우림대장군(羽林大將軍)의 무관직을 지냈다. 발해 건국의 단초를 제공한 696년의 영주지역 거란족의 반란 때에도 그가 나서서 진압했다. 그는 당조에 의해서 군사 지도자로 발탁된 이민족 장교, 번장(蕃將)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는데 그의 생애는 묘하게, 백제 유민들과 겹치는 일이 많았다. 686년 그가 돌궐을 공격할 때 함께했던 사람이 그 유명한 백제인 흑치상지(黑齒常之)였고, 698년 하북도후군총관(河北道後軍總管)으로서 돌궐족의 카파간 카간(默綴可汗)이 이끄는 군대를 격퇴할 때에도 그의 옆에는 백제계 번장 사타충의(沙吒忠義)가 있었다. 조국을 잃어버리고 적국의 장수로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다조도 흑치상지나 사타충의와 같은 망국의 유민으로서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작 측천무후의 손에 수많은 번장들이 '숙청'되는 와중에도, 누명을 쓰고 옥에서 자결한 흑치상지와는 운명을 달리했으니.
 
우우림대장군으로 황궁 방위까지 맡게 된 그가 요양군왕의 칭호를 수여받은 것은(장흥이씨족보에는 농서군왕으로 기록되어 있음) 측천무후와 그 일족이 장악하고 있던 중국 천하를 이씨에게 도로 '되찾아준' 공로에 대한 대가였다. 유교 이념상 용납될 수 없는 '여주(女主)'였지만,그 여주를 위해 수많은 이민족의 피를 칼에 묻힌 그에게 한때나마 섬기던 주인을 배신하는 것은 그리 쉬운 선택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측천무후에게 발탁되어 정치를 돕다가 결국 측천무후를 배신한 승상 장간지나 적인걸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구체적인 심경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없어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이다조가 다른 신료들과 함께 측천무후를 몰아내고 태자 여릉왕 현(顕)을 중종으로 복위시킨 뒤에도 당조는 여전히 '여주'들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중종의 신임을 받은 황후 위(韋)씨가 신임 승상이자 부마였던 무삼사(武三思) 등과 연합해, 천자의 복위공신들을 제거하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위황후의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는 멀쩡한 황태자인 중준(重俊)을 폐위시키고 황태녀(皇太女)로서 황위를 다시 빼앗으려 했다. 
 
이다조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707년, 그는 태자 중준과 함께 위황후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정변을 일으켰다. 우우림장군(右羽林將軍) 이사충(李思衝)ㆍ이승황(李承況)ㆍ독고의지(獨孤禕之)ㆍ사타충의 등과 함께 우림군의 정예병 3백여 기를 이끌고, 전횡을 휘두르던 무승사 부자를 비롯한 무씨 일족을 죽였지만, 황후 위씨와 안락공주를 사로잡는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중종이 보낸 유경인(劉景仁)의 우림군 군사들과 현무문에서 대치하다가 다른 우림군 동지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두 아들도 연좌되어 죽고, 가산도 적몰당한 뒤 다시 그가 복권된 것은 3년만이었다. 이융기의 정변으로 황후 위씨가 살해되고 예종이 즉위했을 때, 이다조는 비로소 복권되었다.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현종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린다.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함은 전책(典冊)에서 칭한 바요, 의리에 감동하여 목숨을 희생함은 명절(名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故) 우림위대장군ㆍ상주국ㆍ요양군왕 이다조는 삼한의 귀종이자[三韓貴種] 백전(百戰)의 맹장으로서, 금위영(禁衛營)에 있으면서 총애를 받아 황실을 보위하는 데 마음을 두었고, 정성과 신의를 바쳐 적도들을 평정하였다. 그의 신명스러움에 힘입어 간특한 자를 다시 치워 없앤바, 그의 길이 남을 말과 아름다운 공렬에 대해 포상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다. 그러니 추숭(追崇)의 은전(恩典)을 내려 살아 생전의 명을 회복시킴이 마땅하다. 그의 옛 관직을 회복시켜 주고, 이어 그 처자식들을 모두 용서해 주도록 하라.
 
조서 안에서 현종은 그를 가리켜 "삼한귀종(三韓貴種)"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중국 학계가 한민족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하는 말갈족의 사내를 가리켜 부르는데 '삼한'이라는 말을 썼다. 이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현종이 말갈족의 사내를 향해서 삼한의 귀한 종족이라고 부른 이유, '말갈'이라는 호칭이 지금의 만주족들 선대의 호칭이 아니라 7~8세기경의 동아시아에서는 '고려 변방에 사는 주민(촌사람)'들을 얕잡아 부르던 별칭이었다는 학설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기록이 그 학설에 설득력을 실어줄지도 모르겠다.
 
의식하지 않았었지만 현종의 옆에는 유난히도 많은 고려 유민들이 있었다. 환관으로서 현종이 즉위하기 전 임치왕 시절부터 그를 옆에서 보좌했던 왕모중도 있고, 시성(詩聖) 두보도 칭찬해 마지않았던 '파미르의 범' 고선지 장군, 그리고 훗날 안록산의 난 때에 반란군에게 빼앗긴 수도 탈환에 공을 세우게 되는 왕사례(王思禮)의 아버지 왕건위(王虔威)도 현종조에 활약했던 고려인 출신의 무장 즉 번장(蕃將)이었다. 현종이 개원지치라는 정관지치 이래 최고의 태평성세를 이루는데 측천무후가 발탁한 인재가 많은 역할을 했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현종의 옆에서 그의 측근으로서 활약했던 고려인 출신의 관료들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조국을 멸망시킨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야만 했던가 싶어 측은한 감이 든다. 내가 어떤 말로 꾸며서 말하든, 고려를 멸망시킨 당을 위해서 활약한 그들은 고려나 그 후신인 발해의 입장에서는 역적이고 배신자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다조라고 해서 그 비난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다만 이들이 668년 고려 멸망에 일조한 흔적 내지는 발해 건국을 직간접적으로 방해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긍정할 여지가 보인다.
 
장흥 이씨 일족은 이후 북송 철종 때에 이부상서를 지내다 참소를 당해 고려로 도망친 후손 관진(冠珍)이 병마부사로서, '동북 9성'으로 대표되는 윤관 장군의 북방개척에 참가했다. 장흥이씨 족보에는 이관진이 여진족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적었는데, 실제로 그의 기록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도 예종 4년 기축(1109)을 끝으로 더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1109년에 그는 길주성에 있었다. 길주성을 공격한 여진족은 성밖 10리에 작은 성을 쌓고 목책 여섯 군데를 세워 수개월 동안 맹렬하게 공격했는데, 이때 길주성을 지키며 그는 하룻밤 사이에 여진족이 무너뜨린 내성을
다시 쌓고 지키면서 싸웠지만 싸움이 오래되고 힘이 지쳐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길주성을 구하러갔던 윤관의 부장 오연총까지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패했다고 했으니, 아마 1109년의 맹렬한 전투에서 그는 필경 전사했을 것이다. 조상은 조국을 등지고 당조의 벼슬을 하며 살다 갔지만, 후손은 다시 조국 고려로 돌아와 고려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아마도 혼란의 시대 조국을 등졌던 시조 이다조를 대신해 관진 자신이 조국에 되갚아주고 싶었던 묵은 빚이었을 거다. 아주 오래 묵은 빚.
 
장흥이씨족보는 인물의 선후관계나 기록된 사실은 얼추 들어맞는 것도 있지만 역사 기록에 비춰보면 엉터리로 적어놓은 것이 많다. 당장 이관진의 관직만 해도, 그가 고려에서 윤관의 '동북9성'개척이라는 위대한 사업에 한몫한 것은 《고려사》에도 나오는 역사적 사실이지마는 관진의 벼슬에 대해서는 족보에 기록된 뭐, '정토장군도총독 병마대원수'는 실려있지 않고 다만 1107년에 척준경을 도와 여진족의 포위망을 뚫을 때 장군(정4품)이었고, 1109년에 길주성에서 군사를 지휘할 때도 마찬가지로 정4품 병마부사(兵馬府使)였다. 족보에는 그가 '돌아오는 길'에 동관(東關)ㅡ지금의 강원도 땅에서 죽었다고 했다. 고려의 예종은 슬퍼하면서 그를 동주, 지금의 철원 땅에다 묻고 사방 30리 땅을 묘에 붙여주었는데 지금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의 9세손 처유(處柔)는 고려 충정왕 원년(1349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하게 되었다. 한림학사와 이부시랑을 거쳐서 공민왕 때에는 이부상서(吏部尙書)를 맡았다고 하지만 역사에는 이름이 빠져있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졌을 때, 조선 태조는 고려 유신들을 불러서 조선의 신하로 삼으려 했고 그 가운데에는 이처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태조가 황해도병마절도사 자리를 주면서 여러번 불렀지만 이처유는 끝까지 고려의 유신으로서 살다 죽기를 원했고, 결국 분노한 이태조에 의해서 장흥 땅으로 유배당한다. 유배지 장흥에서 그는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본관을 장흥으로 고친다. 족보에 기록된 바 이다조의 선대조가 '농서'를 본관으로 삼은 이래로 줄곧 '농서 이씨'였지만 이처유 때부터 '장흥 이씨'가 된 것이다. 이후 이처유의 아들에서 비롯된 그의 후손들은 장흥을 본관으로 삼고 이다조를 시조, 이관진을 중조(中祖)로, 이처유를 이관조(移貫祖) 즉 '본관을 바꾼 조상'으로 모시고 받들고 있다.



yesuro
구당서/열전에서 번역하신 그 부분을 찾았습니다. 아마도 그 조서는 예종이 상황으로 있고 현종이 황제로 있을 때 내려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구당서/열전>은 예종이 조서를 내렸다고 말하고, <책부원귀>는 현종이 조서를 내렸다고 기록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좋은 자료,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다조가 "삼한귀종"이었다. 아주 의미심장한 문구였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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