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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9>후고려기(後高麗記)(12) 
2009/05/06 19:12

[冬十二月, 改沙伐州爲尙州, 領州一, 郡十 · 縣三十, 歃良州爲良州, 領州一, 小京一 · 郡十二 · 縣三十四. 菁州爲康州, 領州一, 郡十一 · 縣二十七. 漢山州爲漢州, 領州一, 小京一 · 郡二十七 · 縣四十六. 首若州爲朔州, 領州一, 小京一 · 郡十一 · 縣二十七. 熊川州爲熊州, 領州一, 小京一 · 郡十三 · 縣二十九. 河西州爲溟州, 領州一, 郡九 · 縣二十五. 完山州爲全州, 領州一, 小京一 · 郡十 · 縣三十一. 武珍州爲武州, 領州一, 郡十四 · 縣四十四 · 良州一作梁州.]
겨울 12월에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로 고치고 1주 · 10군 · 30현을 거느리게 하였고, 삽량주(歃良州)를 양주(良州)로 고치고 주 하나당 1소경ㆍ12군ㆍ34현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청주(菁州)를 강주(康州)로 고치고 주 하나에 11군 · 27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한산주(漢山州)를 한주(漢州)로 고치고 주 하나에 1소경 · 27군 · 46현을 거느리게 하였고, 수약주(首若州)를 삭주(朔州)로 고치고 주 하나에 1소경 · 11군 · 27현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웅천주(熊川州)를 웅주(熊州)로 고치고 주 하나에 1소경 · 13군 · 29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로 고치고 주 하나에 9군 · 25현을 거느리게 하였고,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고치고 주 하나에 1소경 · 10군 · 31현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무진주(武珍州)를 무주(武州)로 고치고 주 하나에 14군 · 44현을 거느리게 하였다.<양주(良州)를 또는 양주(梁州)로도 썼다.>
《삼국사》 권제9, 신라본기제9, 경덕왕 16년(757)
 
신라 경덕왕은 후기 신라의 국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실시했던 군주로 알려져 있다. 중앙집권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그는 신라의 모든 고유한 지명들을 모조리 당풍(唐風)의 한문식으로 고치게 하는 일련의 정책들을 추진했다. 당풍화는 비단 지명에만 그치지 않고 2년 뒤에는 관직들에까지 미쳤는데, 내가 배우기로 중앙집권화는 항상 외국, 특히 이웃한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우리 고유의 문물이 아니면 중앙집권화를 이룰 길이 없었다는 말처럼 들려서 기분나쁘기도 한데 돌려서 얘기하면 당조의 문물이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이 그만큼 지대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는 율령국가를 세우면서 그들의 관직제도 자체를 당의 것과 똑같이 본떠서 썼다.)
 
실로 8세기 당조는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융성한 문물수준과 잘 정비된 행정체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당조 안에서 사방 여러 나라들은 예전과 같은 위세를 누리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해봐야 당조가 만들어놓은 체제 안에서 내부에서만 황제를 칭하는 '외왕내제' 같은 방식으로 바깥으로 표출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당조에 그렇게 적대적이었던 고려를 계승했다는 발해마저도) 안록산의 난 이후 쇠퇴일로를 걸으면서도 여전히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그 한 시대의 기준이자 척도와도 같은 권세를 누리던 당 왕조. 그런 당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시대 앞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李正己, 高麗人也. 本名懷玉, 生於平盧.]
이정기는 고려 사람이다. 본명은 회옥(懷玉)이며,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사실 고려 사람이라는 것만 빼면 이 이정기라는 남자가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모른다.
다만 그 출생지에 대해서는 '평로', 즉 지금의 요령성에 있는 영주(조양)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은 확실히 적어놨다. 고려가 멸망한 뒤 당이 설치했던 이른바 '안동도호부'는 당의 평로군에서 관장했는데, 그 평로군의 총책임자가 절도사다. 그리고 그 부임하는 치소는 영주에 있었다. 고려 유민들이 대거 사민된 곳으로 대조영도 잠시 살았던 그 도시. 그러니까 이정기와 대조영은 본의아니게 동향 사람이 된 셈이지. 살아생전 서로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그가 죽었을 때가 당 건중 2년(781)이고 그때 나이가 49세였다고 했으니 태어난 해는 발해 무왕 인안 13년(732). 장문휴 장군이 등주를 정벌하고, 무왕이 마도산을 치던 임신서정의 혼란기(라고 해야 하나?) 속에서 태어났다. 고려 유민의 저항과 신라의 반발로 평양에 제대로 못 있고 이리저리 떠돌다시피 하던 안동도호부가 평로로 치소를 옮긴 것은 이정기가 태어나기 27년 전인 705년의 일로, 그 무렵 이정기의 선대(조부나 증조부)는 이곳 영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당의 땅에 끌려온 고려 유민들은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지만, 그들에게도 갱생의 길은 있었다. 군인으로 출세하는 것. 당시 당의 정책은 한족뿐 아니라 이민족들에게까지 출셋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더구나 고급 장교는 꼭 이민족 중에서 발탁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던 당에서 고려 유민이 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생존방법이었다. (무예라면 타고난 사람이었으니 어렵지는 않았겠지만)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이정기는 군인으로서 출세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불과 26세에 치청비장, 즉 평로절도의 부장 자리를 얻어 제법 출세했다 자부할 정도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丁亥, 小野朝臣田守等至自渤海. 渤海大使輔國大將軍兼將軍行木底州刺史兼兵署少正開國公揚承慶已下廿三人, 隨田守來朝. 便於越前國安置.]
정해(18일)에 소야조신(小野朝臣, 오노노아손) 전수(田守, 다모리) 등이 발해에서 돌아왔다. 발해대사(渤海大使)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겸 장군 행목저주자사(行木底州刺史) 겸 병서소정(兵署少正) 개국공(開國公) 양승경(揚承慶) 이하 23인이 전수(田守)를 따라 내조하였다[來朝]. 월전국(越前國, 에치젠노쿠니)에 안치시켰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권제21, 천평보자(天平寶字, 덴표쇼호) 2년(758) 9월
 
소야전수(오노노 다모리)라는 자는 일본에서 발해에 파견한 사신이었다. 그렇게 발해를 홀대하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났는지, 일본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왔다.
 
이들 사신이 오갈 때면 항상, 그 사신의 귀국길을 배웅하는 송사(送使)가 뒤따랐다. 일본까지 소야전수(오노노 다모리)를 배웅한 것은 보국대장군 겸 행목저주자사 병서소정 개국공. 송사단의 수장 양승경이 맡았던 관직의 이름이다. 보국대장군이라는 것은 봉호이고, 목저주는 옛날 고려의 목저성이 있었던 곳ㅡ지금의 중국 요령성 소자하 상류의 오룡산성(五龍山城)이라는 곳이 곧 목저성이다.
 
이곳은 옛 고려의 남북 두 길 가운데 험준한 남쪽의 길목에 있었다. 고국원왕 때 선비족의 전연이 이 길을 따라 고려로 쳐들어와 환도성을 불태웠고, 려당 전쟁 때에는 당군이 남소성 및 창암성과 함께 이곳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국내성으로 향했다. 당은 이곳에 목저주도호부를 설치했지만, 발해에 의해 이곳은 다시 수복되어 발해의 주가 설치된 듯 하다. 그리고 그 주의 자사로서 양승경이 임명된 것인데, '임시직'을 뜻하는 '행'이라는 글자가 앞에 붙어있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한다. 아직 이곳에 설치된 목저주가 완벽하게 제 구실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으니.
 
병서소정. 병서란 곧 군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곳, 발해 3성 6부의 하나였던 지부(智部)ㅡ즉 병부에 소속된 관청인 듯 하다. 발해에서는 당의 제도를 본떠 3성 6부제를 도입했지만, 당과는 달리 정당성에 소속된 여섯 부가 좌우 육사로 나뉘어서 관리되었고, 6부의 명칭인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도 충인의지예신(忠仁義智禮信)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는 발해에서 유교 윤리를 도입해 사용하고 또 국가적으로 장려했으며 고려 때보다 더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관청 이름까지 유교 경전에서 따다 지을 정도면 볼장 다 본거지 뭐.
 
다만 병서라는 관청이나 소정이라는 관직은 당의 제도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발해 고유의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해보게 한다. 양승경 말고도, 귀덕장군(歸德將軍)이었던 양태사와 판관 벼슬의 풍방례도 사신단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들어온지 석달만인 12월 임술(24일)에 수도 평성경(헤이죠쿄)에 들어왔다. 
 
[乾元元年, 平盧節度使王玄誌卒. 會有敕遣使來存問. 懷玉恐玄誌子爲節度, 遂殺之, 與軍人共推立侯希逸爲軍帥. 希逸母即懷玉姑也.]
건원(乾元) 원년(758)에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왕현지(王玄志)가 졸하였다. 마침 사신을 파견해 조문하라는 칙이 있었다. 회옥은 현지의 아들을 절도사로 삼을까 걱정하여 바로 그를 죽이고, 군사들과 함께 후희일(侯希逸)을 추대하여 군수(軍帥)로 삼았다. 후희일의 어머니는 바로 회옥의 고모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자신이 섬기던 상관의 아들을 죽이고 대신 고종사촌형을 절도사 자리에 앉힌다ㅡ는 하극상은, 이미 이정기의 상관이었던 왕현지 자신이 선대 평로절도사였던 유정신을 후희일과 짜고 몰래 살해했던 순간부터 예고된 인과였는지도 모른다. 
 
이 무렵의 절도사의 지위란 자신이 통치하는 땅의 민정, 군사, 재정의 실질적인 권한을 모두 틀어쥔 그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천자가 평로에 조문사절을 보낸 것은 평로의 지배권을 당조로 귀속시키려는 조치였겠지만, 사태 파악은 역시나 평로번진의 현지사정에 훤한 이정기가 한수 위였다. 평로군에 있으면서 이정기를 따라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는 쿠데타에 동참했던 병사들은 거지반 그와 같은 고려계였고, 새로 추대된 후희일 역시 이정기와 같은 고려인이었으니. 고려인이 우글거리는 평로번진 안에서 팔이 안으로 굽는 건 당연한 이치.
 
평로번진의 치소는 지금의 차오양, 그러니까 옛날 고려 유민들(대조영 일가까지 포함한)이 강제이주당했던 그곳에 마련되어 있었고, 당의 평로와 노룡 두 군과 영주, 평주의 두 주(州)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설치 목적은 인근의 실위족과 말갈(어쩌면 발해?)을 통제하는데 있었다. 742년경 이곳의 군사로는 보병만 37,500명, 기병은 5,5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대체로 고려인들이 많았다고 여겨진다.
 
허나 평로번진의 앞날도 그리 밝지만은 못했던 것이, 일단 이곳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던 거점으로 당 조정이 경계하던 곳이었다. 거기다 이곳에 모여 살던 해족까지 평로번진에 우호적이지 못했다.
 
[庚午, 帝臨軒. 高麗使揚承慶等貢方物. 奏曰 "高麗國王大欽茂言 '承聞, 在於日本照臨八方聖明皇帝, 登遐天宮, 攀號感慕. 不能黙止. 是以, 差輔國將軍揚承慶, 歸徳將軍揚泰師等, 令齎表文并常貢物入朝'." 詔曰 "高麗國王遥聞先朝登遐天宮, 不能黙止. 使揚承慶等來慰, 聞之感痛, 永慕益深. 但歳月既改, 海内從吉. 故不以其礼相待也. 又不忘舊心, 遣使來貢, 勤誠之至, 深有嘉尚."]
 
경오(3일)에 제(帝, 미카도)가 대(臺)에 나와 앉았다[臨軒]. 고려의 사신 양승경(揚承慶) 등이 방물을 바쳤다. 아뢰어 말하였다.
“고려국왕 대흠무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들으니[承聞], 일본에 조림팔방성명황제(照臨八方聖明皇帝)가 계시어 천궁(天宮)에 오르셨다 하니[登遐], 애도하는 마음[攀號]이 마음에 사무쳐[感慕] 가만 있을 수가[黙止] 없구나. 이에, 보국장군 양승경, 귀덕장군(歸德將軍) 양태사(揚泰師) 등을 뽑아, 표문과 평소의 공물을 갖고 입조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조하여 말하였다.
"고려국왕은 멀리서 선조(先朝)께서 승하하셨다는[登遐天宮] 소식을 듣고 능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신 양승경 등이 와서 조문하였다[來慰]. 이를 듣고 감통(感痛)하며 선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永慕] 더욱 깊어간다. 다만 세월이 이미 바뀌어 나라 안[海內]에서는 탈상을 마쳤다[從吉]. 때문에 그 예를 서로 대하진[相待] 않겠다. 또한 옛 마음[舊心]을 잊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니, 근성(勤誠)이 이른 것이 심히 가상하도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정월
 
서력 759년 음력 정월 무진 초하루. 평성경의 대극전(大極殿)에서 열린 정월 신년하례에 일본의 관료들과 함께 참석한 발해의 사신들은 이틀 뒤, 왜황을 직접 알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말하는 조림팔방성명황제란 효겸 여제의 아버지인 성무 천황을 말한다. 그 유명한 나라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 대불(大佛)을 만든 사람. (성무 천황이 죽은 건 양승경이 사신으로 오기 3년 전의 일이다.)
 
보국대장군(당의 무산계 정2품) 양승경, 그리고 귀덕장군(당의 무산계 종3품하) 양태사, 양씨 성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 양씨 하나밖에 알려져 있지 않고, 양만춘 같은 인물은 고려 말의 위인이자 '양'씨 성을 가진 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양승경은 문왕을 가리켜 고려국왕이라 불렀다. 앞서 일본에 왔던 사신 모시몽이 가져온 효겸 여제의 국서에서 《고려구기》까지 인용해가면서 일본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라는 (미친) 소리를 한 것에 대해 나름 발해 쪽에서 굽혀준 것이라나? 하마다 고사쿠는 일본과 대면하는 차원에서 고려국왕을 칭한 것이지 발해 본국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
 
[乙酉, 帝臨軒. 授高麗大使揚承慶正三位, 副使揚泰師從三位, 判官馮方禮從五位下, 録事已下十九人各有差. 賜國王及大使已下祿有差. 饗五位已上, 及蕃客, 并主典已上於朝堂. 作女樂於舞臺. 奏内教坊踏歌於庭, 客主典殿已上次之. 事畢賜綿各有差.]
을유(18일)에 제(帝)가 임헌하였다. 고려대사 양승경에게 정3위, 부사 양태사에게 종3위를 내리고, 판관 마방례에게 종5위하를 내리며, 녹사 이하 19인에게는 각기 차등이 있었다. 국왕 및 대사 이하에게 녹을 차등있게 내렸다. 5위 이상과 번객, 주전 이상에게 나란히 조당에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무대에서 여악을 연주하였다. 뜰[庭]에서 내교방(內敎坊)이 답가(踏歌)를 공연하고, 객주(客主)와 전전(典殿) 이상은 다음이었다. 일이 끝난 뒤에 녹을 차등있게 내렸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정월
 
앞서의 다른 사신들처럼, 이번에도 발해 사신들은 일본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왜황의 궁전에 초청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재상의 지위에 있던 등원중마려(藤原仲麻呂,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사저에까지 초청을 받았고, 내리(內裏, 다이리)의 여악이며 면 1만 둔이 왜황의 이름으로 하사되었다. 일본 당대의 여러 문사들이 발해 사신들에게 송별시를 지어주었다. 이때 발해와 일본의 사신들이 주고 받은 시는 《경국집(經國集)》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서리 하늘 달 밝은데 은하수는 빛나고 
이국 땅의 나그네 고향 생각 간절하이
긴긴 밤 홀로 앉아 시름 이기지 못하거늘
홀연히 들려오는 이웃 아낙의 다듬이소리
바람결 따라 끊어질 듯 이어지니
밤 깊어 별이 기울도록 잠시도 멎지 않네
고국 떠난 뒤로 저 소리 못 들었는데
먼 이역 땅에서 그 소리 다시 듣네.
 
라는, 유명한 한시 '밤에 다듬이소리 듣고(夜聽○衣聲)'도 이 때에 지어진 것이다.
 
[二月戊戌朔, 賜高麗王書曰 "天皇敬問高麗國王. 使揚承慶等遠渉滄海, 來弔國憂. 誠表慇懃, 深増酷痛. 但隨時變礼, 聖哲通規, 從吉履新. 更无餘事. 兼復所貽信物, 依數領之. 即因還使, 相酬土毛絹■疋, 美濃■卅疋, 絲二百■, 綿三百屯. 殊嘉尓忠, 更加優, 賜錦四疋, 兩面二疋, 纈羅四疋, 白羅十疋, 彩帛■疋, 白綿一百帖. 物雖輕尠, 寄思良深, 至宜並納. 國使附來, 无船駕去. 仍差單使送還本蕃. 便從彼郷達於大唐, 欲迎前年入唐大使藤原朝臣河清, 宜知相資. 餘寒未退, 想王如常. 遣書指不多及.]
2월 무술 초하루에 고려왕에게 글을 주었다.
"천황(天皇, 미카도)은 공경히 고려국왕에게 묻소이다. 사신 양승경 등이 멀리서 창해(滄海)를 건너와서 국우(國憂)를 조문하였소. 은근한 성표(誠表)에 괴로움은[酷痛] 더하였소. 다만 시세를 따라 예(禮)도 변하니, 성철(聖哲)의 통규(通規)로서 동짓날에[履新] 이르러 탈상하였소[從吉]. 재차 다른 일[餘事]은 없었소. 겸하여 다시 전해온 바 신물(信物)들은 정해진 수량대로[依數] 잘 받았소. 즉 인하여 사신을 돌려보내고, 토모(土毛)로서 보답하되[相酬] 견(絹) ■필, 미노(美濃)의 시(絁) 서른 필, 실 2백 꾸러미, 금(綿) 3백 둔을 보내오. 몹시도 아름다운 그 충심에 재차 기쁨[優]이 더하여 금(錦) 네 필, 양면(兩面) 두 필, 힐라(纈羅) 네 필, 백라(白羅) 열 필, 채백(彩帛) 서른 필, 백면(白綿) 백 첩을 내리오. 물건은 비록 가볍고 적지만 가져온 뜻은 양심(良深)하여 마땅히 함께 바치기에 이르렀소. 국사(國使)에게 부쳐 오니 배와 수레가 그친[去] 적이 없소. 거듭 단사(單使)에게 부쳐 본번(本蕃)으로 송환할 것이오. 편안히 저 향(鄕)을 따라 대당(大唐)에 이르러 전년의 입당대사(入唐大使) 등원조신(藤原朝臣, 후지와라노아손) 하청(河淸, 카와키요)를 맞이하고자 하니, 마땅히 서로 도울 바를[相資] 알 것이오. 꽃샘추위[餘寒]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왕을 생각함이 평소와 같소. 보내는 뜻은 글로 이루 다 적을 수 없소."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지난번에 평군광성에 이어 이번에는 등원하청을 맞이하려 한다.
 
[八月己亥, 遣大宰帥三品船親王於香椎廟. 奏應伐新羅之狀.]
8월 기해(6일)에 대재수(大宰帥, 다자이노소치) 삼품선친왕(三品船親王, 미시나후네 신노)를 향치묘(香椎廟, 카시이묘)로 보냈다. 신라 정벌의 정상[伐新羅之狀]을 주응(奏應)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후쿠오카 카시이궁. 이곳에 일본 조정은 신라 정벌을 고하며 전의를 다졌다.>
 
일본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시 카시이궁. 오늘날까지도 일본 황실에서 10년에 한 번씩 길일을 택해서 칙사를 보내 제사를 지낼 정도로 각별하게 생각하는 신사다. (2005년에도 이곳에 제사를 지냈음) 왜황 중애(仲哀, 추아이)가 쿠마소 정벌 도중 급서했을 때, 신공 황후가 그 자리에 신궁을 지어 왜황의 신령을 모신 것이 그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로(養老, 요로) 7년(723년) 축조를 시작해 신귀(神龜, 진키) 원년(724년)에 준공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이 두 곳을 아울러 카시이묘라 했다.
 

<신공황후가 직접 심었다는 삼나무 '능삼(綾杉, 료우스기)'. 카시이궁의 어신목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바, 신공 황후는 우리 나라 고대 삼국을 일본 열도에서 정벌해 관가를 두고 다스렸다는 소위 '삼한정벌'의 주역이었다.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실존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전설상의 인물 신공 황후의 영험을 빌겠다는 뜻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이쯤까지 놓고 보면 일본의 신라 공격은 거의 기정사실화된 정책방향이었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지 않을까.
 
[壬子, 令大宰府造行軍式, 以將伐新羅也.]
임자(18일)에 대재부(大宰府, 다자이후)에 명하여 행군식을 하고 장차 신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6월
 
일본은 신라를 치려 하고 있었다.
 
[壬午, 造船五百艘. 北陸道諸國八十九艘, 山陰道諸國一百■五艘, 山陽道諸國一百六十一艘, 南海道諸國一百五艘, 並逐閑月營造,  三年之内成功. 爲征新羅也.]
임오(19일)에 배 5백 척을 만들었다. 북륙도(北陸道, 호쿠리쿠도)의 여러 국(國)에 89척, 산음도(山陰道, 산인도)의 여러 국에 一百■五척, 산양도(山陽道, 산요도)의 여러 국에 161척, 난카이도(南海道)의 여러 국에 105척, 아울러 만드는데[營造] 기간 제한[逐閑月]을 두어 3년 안에 성공하도록 하였다. 신라를 정벌하고자 함이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9월
 
신라정벌을 주도한 것은 당시 일본 조정에서 실세로 군림하던 등원중마려(후지와라노 나카마로). 이 무렵 신라와 일본의 사이가 거의 극악을 치닫고 있었으니 일본으로서는 심사가 뒤틀려 있어도 한참 뒤틀려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게 나라를 잃고 도망쳐오다시피 한 백제와 고려의 옛 유민들이 신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신라 정벌을 주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국내에서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등원중마려(후지와라노 나카마로) 본인에게 쏟아지는 정치적인 불만들을 바깥으로 쏠리게 하자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소위 전국통일 이후에 할일이 없어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쏠리고, 영토도 넓히고 할 겸 조선침략을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를 비롯한 세력들이 신라 정벌을 강하게 주장했다는 것. 하지만 그 무렵 그들은 동쪽에 있던 에미시족과도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기에 신라를 칠만한 군사력까지 낸다는 것은 참으로 같잖지도 않아보였다.
 
[辛亥, 迎藤原河清使判官内藏忌寸全成. 自渤海却廻, 海中遭風, 漂着對馬. 渤海使輔國大將軍兼將軍玄菟州刺史兼押衙官開國公高南申相隨來朝. 其中臺牒曰 "迎藤原河清使惣九十九人. 大唐祿山先爲逆命, 思明後作乱常, 内外騷荒. 未有平殄. 即欲放還, 恐被害殘, 又欲勒還, 慮違隣意. 仍放頭首高元度等十一人, 往大唐迎河清. 即差此使, 同爲發遣. 其判官全成等並放歸卿. 亦差此使隨徃, 通報委曲."]
신해(18일)에 등원하청(후지와라노 카와키요)와 사신 판관 내장기촌(内藏忌寸, 쿠라다노이미키) 전성(全成, 마타나리)를 맞이하였다. 발해에서 却廻하여 바다 위에서 바람을 따라 대마(對馬)에 표착하였다. 발해의 사신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겸 장군ㆍ현도주자사(玄菟州刺史) 겸 압위관개국공(押衙官開國公) 고남신(高南申)을 따라[相隨] 내조하였다. 그 중대첩(中臺牒)에서 말하였다.
"등원하청(후지와라노 가와키요)를 맞이해오고자 보낸 사신은 모두 99인이다. 대당의 녹산이 앞서 반역[逆命]하고 사명은 뒤에 作乱常하여 안팎으로 소란스럽다[騷荒]. 잠잠할 날이 없다. 즉시 돌려보내고자 하나 해를 입을까 두렵고, 늦게 돌려보내자니 인의(隣意)를 등지게 될까 慮이다. 이에 고원도(高元度) 등 11인을 앞세워, 대당에 가서 하청(가와키요)을 마중하게 하였다. 즉시 이 사신에 부쳐 함께 출발시킨다[發遣]. 그 판관 전성(마타나리) 등도 아울러 돌려보낸다. 또한 이번 사신에 딸려 따라보내어[隨徃] 자세한 사정을[委曲] 통보한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10월
 
중대첩. 발해의 정치제도인 '3성 6부'의 하나인 중대성에서 발행한 첩지다. 《속일본기》에 기록된 이 중대성첩 내용은 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낸 최초의 첩문으로, 발해의 대일본외교 자세가 국왕의 계서를 통해서 진행되던 차원에서 '중대성'이라는 전문화되고 조직화된 관부를 통해 실무적으로 진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에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고원도 일행은 이로부터 3년 뒤인 대흥 23년(761) 8월에 당에서 돌아와서 발해의 견당하정사 양방경을 따라 입당할수 있었음을 보고했다. (이 시기에 이르면 목저주에 이어 현도주에도 발해의 자사가 파견되었다.)
 
발해에서 파견한 4차 견일본사 고남신의 사신단과 함께, 등원경청(후지와라노 가와키요)를 당에서 맞이하고자 보냈던 사신 고원도 일행 99명 가운데 당에 안 갔던 내장전성(구라다노 마타나리) 등 88명이 동행했는데, 태풍을 만나 쓰시마에 닿았다가 겨우 대재부(다자이후)를 거쳐서(10월 병진) 난파(나니와)의 강구를 지나(12월 19일) 12월 병신일(24일)에 평성경(헤이죠쿄)로 들어왔다.
 
[四年春正月癸亥朔, 御大極殿受朝. 文武百官及渤海蕃客, 各依儀拜賀. 是日, 宴五位已上於内裏, 賜祿有差.]
4년(760) 봄 정월 계해 초하루에 대극전에 행차하여 조하를 받았다. 문무백관과 발해의 번객이 각기 예를 갖추어 배하하였다. 이 날에 5위 이상에게 내리(內裏, 다이리)에서 잔치를 열어주고 차등있게 녹을 내렸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4년(760)
 
고남신이 이끄는 발해 사신들은 일본 관료들과 함께 나란히 정월 대극전 조하에 참석했고, 닷새 뒤에 준닌 천황을 알현하기에 이르렀다.

[丁卯, 帝臨軒. 渤海國使高南申等貢方物, 奏曰 "國王大欽茂言 '爲獻日本朝遣唐大使特進兼秘書監藤原朝臣河淸上表. 并恒貢物, 差輔國大將軍高南申等, 充使入朝.'" 詔曰 "遣唐大使藤原河淸久不來歸, 所鬱念也. 而高麗王差南申令齎河淸表文入朝, 王之款誠, 實有嘉焉."]
정묘(5일)에 제(帝, 미카도)가 임헌하였다. 발해국의 사신 고남신 등이 방물을 바치고 아뢰었다. "국왕 대흠무께서 말씀하시기를, '견당대사(遣唐大使) 특진(特進) 겸 비서감(秘書監) 등원조신(藤原朝臣) 하청(河淸)이 바친 표를 바친다. 아울러 평소 보내는 물건은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고남신 등에 부쳐 사신으로[充使] 입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조하여 말하였다.
"견당대사(遣唐大使) 등원하청(藤原河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는 바였다. 이에 고려왕이 남신에게 부쳐 하청의 표문을 갖고 입조하라 명하였으니, 왕의 관곡한 정성이 실로 가상하도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4년(760) 정월
 
서기 760년 정월에 순인 천황을 알현한 고남신은 흠무왕의 전지를 구두로 전하고, 등원하청(후지와라노 가와키요)의 상표문을 전했다.
 
[己巳, 高野天皇及帝御閤門. 五位已上及高麗使依儀陳列. 詔授高麗國大使高南申正三位, 副使高興福正四位下, 判官李能本, 解臂鷹, 安貴寶並從五位下. 錄事已下各有差. 賜國王絁卅疋, 美濃絁卅疋, 絲二百■, 調綿三百屯, 大使已下各有差. 賜宴於五位已上及蕃客, 賜祿有差.]
기사(7일)에 고야천황(高野天皇, 타카노 미카도)와 제(帝, 미카도)가 각문에 행차하였다. 5위 이상과 고려의 사신이 의례대로 나란히 섰다. 조하여 고려국의 대사(大使) 고남신에게 정3위, 부사(副使) 고흥복(高興福)에게 정4위하, 판관(判官) 이능본(李能本)ㆍ해비응(解臂鷹)ㆍ안귀보(安貴寶)에게 나란히 종5위하를 내렸다. 녹사(錄事) 이하는 각기 차등이 있었다. 국왕에게 명주[絁] 서른 정, 미농(美濃, 미노)의 시(絁) 서른 정, 실 2백 꾸러미, 솜[調綿] 3백 둔을 내리고, 대사 이하에게는 각기 차등이 있었다. 5위 이상과 번객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차등있게 녹을 내렸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4년(760) 정월
 
왜황은 이들을 극진히 환대했고, 이들은 2월에 야코리노 요우구와 함께 발해로 귀국했다.
 
[是日, 渤海使高南申等歸蕃.]
이 날(20일)에 발해의 사신 고남신 등이 귀국[歸蕃]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2, 천평보자(天平宝字) 4년(760) 2월 신해
 
《속일본기》에 보면 이때 일본측 송사는 조신인 고려대산(高麗大山, 고마노 다이산)과 련인 이길익마려(伊吉益麻呂, 이키노 마스마로). 고려대산(고마노 다이산)은 옛 고려의 왕족 후손이었다.
 

<사이타마현 히타카시 소재 고마진쟈. 고려왕 약광을 모시는 진쟈이다.> 
 
앞서서 잠깐 언급한 바가 있지만, 쟈코오 즉 약광의 성은 고씨, 고려의 왕족이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바, 왜황 천지(天智, 덴지) 5년(666) 고려의 사신으로서 왜를 방문했던 사신 가운데 '현무약광(玄武若光)'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여기서 현무약광이 바로 약광이다. 고려의 왕족이 고(高)씨인데 현무약광이라고 이름을 적은 것은 아마도 그가 고씨에서 갈라져나간 분파라는 의미 같다. 흑치상지도 원래 조상은 부여씨였지만 조상이 '흑치' 땅에 봉해져서 그 땅의 이름을 따서 성씨를 바꾸었다지 않은가. 또한 '현무'라는 것이 '북방'을 상징한다고 하면 고려 북부에 봉해진 고려 왕족으로서 성씨를 '현무'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무방할지도 모르겠다.
 
고려가 멸망한 뒤 약광은 상모국(相模國, 사가미노쿠니) 오이소(大磯)ㅡ 지금의 일본 카나가와 현 오이소마치에 살았는데, 곧 조정으로부터 종5위하의 벼슬을 받고, 대보(大寶, 다이호) 3년(703)에 왜황 문무(文武, 몬무)로부터 고려(고마)라는 성씨와 함께 '왕(王, 고니키시)'라는 카바네(姓)를 하사받았다고 《쇼쿠니혼키》는 전한다. 그 뒤 '고려왕약광(高麗王若光, 고마노고니키시 쟈코오)'이 약광의 일본에서의 정식 이름이 되었지만, 이후 약광이나 '고려왕(고마노고니키시)'라는 성씨는 일본의 역사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왜황 원정(元正, 겐죠) 영귀(靈龜, 료기) 2년(716), 무사시노쿠니(武藏國)에 고려군(高麗郡, 고마노고오리)이 설치될 때, 일본 조정은 동해도(토카이도) 7개 쿠니에서 모두 1799명의 고려인을 추려 이곳으로 옮겼고 약광은 그 군의 책임자격인 대령(大領, 다이료)으로 임명되어 오이소를 떠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척박한 황무지에 불과했던 고려군을 개척하면서 약광은 민생을 안정시켰고, 훗날 간토의 여러 무사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약광이 오이소를 떠난 뒤에도 오이소 사람들은 약광의 덕망을 그리워하며 고려사(高麗寺, 고마지)를 세우고 약광의 영혼을 모셨다고 전한다(지금은 절이 폐사되었다). 만년에 허옇게 세어 성성한 수염 때문에 고려 군민으로부터 '시라히게[白髭] 님'이라고 존경받았지만,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언제 죽었는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무장국(무사시노쿠니)에 있었던 고려향(高麗鄕, 고마노사토). 지금의 사이타마현 히타카시 일부 및 한노우(飯能) 시의 일부에 해당하며, 카즈사노사토(上總鄕)라 불리기도 한다.>
 
고려향(고마노사토)를 중심으로 고려군은 번창했는데, 중세 이후로 히타카(日高) 시를 비롯해 츠루가시마(鶴ヶ島)시 전역과 한노우, 카와고에(川越), 이루마(入間), 사야마(狹山) 시의 각기 일부가 고마군의 일부가 되었다. 고마진쟈의 주신인 현무약광, 고려왕약광(고마노고키시 쟈코오)은 신사에서 고려대궁대명신(高麗大宮大明神), 대궁대명신(大宮大明神), 백자대명신(白髭大明神) 등으로도 불리는데, 그 외에도 사루타히코노미코토(猿田彦命), 타케노우치노스쿠네노미코토(武内宿禰命) 같은 일본 신을 모시고 있으며, (그것도 약광 본인이 그 두 신을 제사 지낼 사당을 지었던 것이 시초라고 했다) 고려신사(고마진쟈)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1868) 이후의 일이다. 약광이 죽은 뒤, 고려군 사람들은 약광을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받들며 이 신사를 지었고, 훗날 시라히게명신과 합사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고려(고마)씨 집안의 족보에는 약광의 적남 가중(家重, 이에시게)가 그의 대를 이었고, 천평(덴표) 20년(748)에 죽었다고 했는데, 에도 시대의 군지(郡志)인 《신편(新編)ㆍ무장풍토기고(武蔵風土記稿, 무사시노후도키코우)》(1830)에서 이에시게의 사망년대를 약광의 것으로 잘못 기록하는 바람에 이것을 그대로 인용한 연구서 등에서는 약광의 죽은 시기가 가중(이에시게)의 사망년대인 것처럼 기록되고 있다.(정확히 약광이 언제 죽었는지는 모른다.)
 
일본에서는 이 진쟈의 신을 '출세명신(出世明神)'이라고도 부르는데, 일본의 27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1870~1931), 28대 와카츠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郎: 1866~1949), 30대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1858~1936), 41대 코이소 쿠니아키(小磯国昭: 1880~1950), 44대 시데하라 키쥬로(幣原喜重郎: 1872~1951), 그리고 52대, 53대, 54대에 걸쳐 내각총리대신이 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1883~1959) 등이 모두 이 진쟈를 참배한 뒤에 내각총리대신이라는 고위직을 역임하게 되었다는 데서 연유하며, 지금도 출세를 꿈꾸는 정치꾼들이 이 진쟈를 드문드문 찾는다나. (여담이지만 사이토 마코토는 일제시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던 일도 있다.)
 
주일 한국대사가 이곳에 방문한 적도 있고, 태왕사신기 한창 뜨던 때도 참배객들이 많았었다. 배용준도 저기 갔었을라나. 신사의 방명록에 한국 연예인 이름이 많다던데.
 

<고려산(高麗山, 고마잔) 성천원(聖天院, 쇼텐인) 승락사(勝樂寺, 쇼라쿠지). 약광의 셋째 아들 성운(聖雲, 쇼운)이 세운 절이다.>
 
또한 사이타마현 히다카시 신보리에 있는 성천원(쇼텐인)·승락사(쇼랴쿠지)는 고마 일족의 보리사(菩提寺, 선조의 위패를 대대로 모시는 절)로서 약광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이며, 약광의 셋째 아들이라는 승려 성운(쇼운)이 세운 것이다.(절이 있는 산의 이름조차 고마잔高麗山이다) 이 절의 카미나리몬(雷門) 앞 우측에 있는 고려왕묘(고마왕묘)가 약광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쇼텐인 본당 왼쪽에는 약광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절의 본존은 성천환희불(聖天歡喜佛)이라 해서 쇼운의 스승이었던 승락(쇼라쿠) 상인(上人, 대사大師라는 뜻)이 고려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인들에게도 '민족'이라는 의식이 있었을까? 난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은 26대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려인들하고만 혼인했고 자식을 낳아 대를 이었다는 것. 혈연적으로 볼 때 굉장히 폐쇄적인 일련의 공동체가 8백 년 남짓을 일본에 존재하고 있었다. 고려인이 중심이 된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아니라 그냥 자기네들 '수명'이 다 돼서, 알아서 절로 무너졌다. 지금은 히타카군으로 이름이 바뀐 고려군 주민들의 후손들에 의해 공동체는 혈연이 아닌 지연과 문화적인 동질성으로 유지되고 있다.
 

<쇼라쿠지 약도.>
 
내가 이리저리 자료를 긁어모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점 가운데 하나는, "고려가 멸망한 뒤 일본으로 망명한 고려인 망명객들은 어째서 발해가 건국된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고마씨만 해도 고려의 왕족이고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설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하면 일족이 싸그리 이동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을 법 한데, 더구나 발해는 스스로가 고려의 후계를 자처하는 나라였고 고씨가 대씨 다음 가는 귀척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던 나라가 아닌가. 가서 자기들이 고려의 왕족이었다고 밝히면 당장에 귀척 대접 받을 텐데, 당시만 하더라도 변방에 날씨도 개판이고 더구나 이민족과 가까운 그 무사시에서 황무지나 갈아엎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았겠냐고.
 
일본에서 발해로 간 사람이 있기는 있었는데 단지 기록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들은 발해로 망명할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망명한 고려인들은 대씨가 세운 발해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아 발해로의 귀향을 포기하고 그냥 일본에 눌러살기로 마음먹었던 것인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고 쉽게 단정짓기는 어려운 일. 입국절차도 없고 귀화절차도 까다로운 것 없이 바다 건너가서 안착만 하면 될 판국에 바다를 건너기 힘들어서 그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고려에서 왜로 올 때 사용한 항로나 항해방법을 잊어서 그랬다면, 두 나라 사이를 오고간 사신단의 빈도를 생각할 때(폭풍을 만나 자주 욕도 봤지만) 그들을 따라간다거나 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돌아가지 않았을까.
 

<약광의 무덤. 승락사 경내에 있다.>
 
나라 잃은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무조건 땅을 치며 울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덩실덩실 춤추었을 리도 없다. 이미 사라져 흩어져버린 약광의 영혼 앞에 대고 심정이 어떠셨는지 물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약광의 삶을 그저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달래며 살았던 사람으로 애석하게 여긴다는 건 너무 편협한 해석이다. 우리는 우리 시각에서 약광을 바라보지만, 일본 사람들은 또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에게 약광은 한편으로는 단순한 이방인일 뿐이고 망명객에 지나지 않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땅을 개척하고 다스린 '일본의' 위인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적어도 그와 고려인들이 이주해 살았던 사이타마 현에서는)
 
사람은 어떤 세상을 살든 그 세상에 견뎌내게 돼있다. 나쁘게 말하면 '현실에 대한 순응'이고 '현실의 안주'지만,
좋게 말하면 '적응력' 즉 '생존력'이다.(나는 좋게 말해달라는 말을 별로 달가워않는다) 약광이나 고려인들이 당시 살았던 무장국(무사시노쿠니) 고려군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황무지, 게다가 '하이(에미시)'라는 이민족들의 땅과 접한 변경지대였다. 풀도 한 포기 자라지 않던 그 땅을 개척해 옥토로 만들어냈다. 고려인들은ㅡ마치 '잡초'와도 같은 생명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정착해서 그 척박하던 곳을 백화가 만발하고 시원한 바람 부는 옥토로 변모시켰으니.
 
[丁酉, 送高南申使外從五位下陽侯史玲■, 至自渤海. 授從五位下. 餘各有差.]
정유(11일)에 고남신을 송별한 사신 외종5위하 양후사(陽侯史, 야코리노후비토) 영구(玲璆, 요우구)가 발해에서 왔다. 종5위하를 내렸다. 나머지는 각기 차등이 있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3, 천평보자(天平寶字) 4년(760) 11월
 
상원(上元) 2년(761) 2월, 사사명도 그 아들 조의(朝義)에게 살해되어 반란군은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상원 2년, 발해 문왕 대흥 24년(761년) 5월, 후희일의 2만 평로군은 유주에서 사조의의 군세를 격파한다. 유주의 범양ㅡ지금 북경 서남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에서,29세의 이회옥이 사조의의 군세를 격파하는데 큰 활약을 했다.
 
[乙未, 令美濃, 武藏二國少年, 毎國廿人習新羅語. 爲征新羅也.]
을미(9일)에 미농(美濃, 미노)ㆍ무장(武藏, 무사시) 두 국(國)의 소년에게 명하여, 국마다 스무 명씩 신라말을 배우게 했다.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서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3, 천평보자(天平寶字) 5년(761) 정월
 
신라 정벌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배를 만들게 한 것에서 시작해, 이제는 신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쿠니에서 스무 명씩 뽑아서 신라말을 배우게 했다.

[甲子, 迎藤原河清使高元度等至自唐國. 初元度奉使之日, 取渤海道, 隨賀正使揚方慶等, 往於唐國. 事畢欲歸. 兵仗樣, 甲冑一具, 伐刀一口, 槍一竿, 矢二隻分付元度. 又有内使, 宣勅曰 "特進秘書監藤原河清, 今依使奏, 欲遣歸朝. 唯恐殘賊未平, 道路多難. 元度宜取南路先歸復命." 即令中謁者謝時和押領元度等向蘇州. 与刺史李■平章, 造船一隻長八丈. 并差押水手官越州浦陽府折衝賞紫金魚袋沈惟岳等九人水手, 越州浦陽府別將賜緑陸張什等卅人送元度等歸朝. 於大宰府安置.]
갑자(12일)에 등원경청(후지와라노 카와키요)와 사신 고원도 등을 당에서 맞이하였다. 처음 원도가 사신으로 가던 날, 발해의 길을 따라 하정사(賀正使)를 따라 양방경(揚方慶) 등이 당으로 갔다. 일이 끝나고 돌아오려 했다. 병장기와 갑주(甲冑) 한 벌, 벌도(伐刀) 한 자루, 창 한 자루, 화살 二隻 푼을 원도에게 부쳐 주었다. 또한 有内使하여 칙서를 전달하여 말하였다.
"특진(特進) 비서감(秘書監) 등원경청(후지와라노 가와키요)는 지금 사신에 의지하여 그 나라로 돌려보내 달라 아뢰었다. 무시무시한 잔적(殘賊)이 평정되지 못한 탓에 도로에 어려움이 많다. 원도는 마땅히 남쪽 길을 따라 먼저 돌아가서 복명(復命)하라."
곧 중알자(中謁者) 사시화압령(謝時和押領) 원도 등에게 소주(蘇州)로 향하게 했다. 与刺史 李■平章하여 배 한 쌍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여덟 장이었다. 아울러 따로 압수수관(押水手官) 월주(越州) 포양부절아상(浦陽府折衝賞) 자금어대(紫金魚袋) 심유악(沈惟岳) 등 아홉 명 선원[水手], 월주 포양부별장(浦陽府別將) 사녹육장습(賜緑陸張什) 등 서른 명, 원도 등을 보내 귀조(歸朝)하였다. 대재부(大宰府, 다자이후)에 안치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3, 천평보자(天平寶字) 5년(761) 8월
 
등원하청(후지와라노 카와키요)이 왜에 도착한 것은 《속일본기》에 따르면 발해 대흥 25년, 당에서 발해 사신들과 조우하고 1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癸酉, 以右虎賁衛督從四位下仲眞人石伴爲遣唐大使, 上總守從五位上石上朝臣宅嗣爲副使. 以武藏介從五位下高麗朝臣大山爲遣高麗使, 又以從四位下藤原惠美朝臣朝獵爲仁部卿. 陸奥出羽按察使如故. 從四位下和氣王爲節部卿. 從五位下藤原惠美朝臣辛加知爲左虎賁衛督, 從四位下仲眞人石伴爲播磨守.]
계유(22일)에 우호륙위독(右虎賁衛督) 종4위하 중진인(仲眞人, 나카노마히토) 석반(石伴, 이시토모)를 견당대사(遣唐大使)로 삼고, 상총수(上總守, 가즈사노카미) 종5위상 석상조신(石上朝臣, 이소노카미노아손) 택사(宅嗣, 야카츠구)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무장개(武藏介, 무사시노스케) 종5위하 고려조신(高麗朝臣, 고마노아손) 대산(大山, 오야마)을 견고려사(遣高麗使)로 삼았다. 또한 종4위하 등원혜미조신(藤原惠美朝臣, 후지와라노에미노아손) 조렵(朝獵, 아츠카리)를 인부경(仁部卿)으로 삼았다. 육오(陸奧, 무츠)ㆍ출우(出羽, 데와)의 안찰사(按察使)는 예전과 같았다. 4위하 화기왕(和氣王, 카즈키오)을 절부경(節部卿)으로 삼았다. 종5위하 등원혜미조신(藤原惠美朝臣) 신가지(辛加知, 시카치)를 좌호륙위독(左虎賁衛督)로 삼고 종4위하 중진인 석반을 번마수(播磨守, 하리마노카미)로 삼았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23, 천평보자(天平寶字) 5년(761) 10월
 
대흥 24년(761년) 12월, 평로군은 다시 한 번 사조의의 군세에 맞서 승리를 거둔다. 사조의의 부장이었던 범양절도사 이회선의 군세를 격파하고, 범양까지 남하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회옥이 큰 공을 세웠는데, 2만 평로군은 계속 진군을 계속해 발해만의 묘도 열도를 따라 등주로 상륙했다. 옛날 장문휴가 상륙했던 이곳 산둥 지역에, 평로군은 그들의 거점을 마련하려 했고, 앞서 이곳에 와서 활약하고 있던 전신공 세력과 합세하기에 이르렀다.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안전한 거점이 없으면 이리저리 떠도는 약탈군대로 전락할 수밖에 없으니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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