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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구려(小高句麗)
글:김종식
출처: ‘낱낱이 파헤친, 고구려본기’, ‘정사, 고구려’에서
<699년에 측천무후는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뒤에 점차 자국(自國)으로 만들고 818년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악공(樂工)를 보냈다.>
위에서 “뒤에 점차 자국(自國)으로 만들고 818년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악공(樂工)를 보냈다”고 되어있는데, 당회요(唐會要)에 따르면 818년 고려(高麗)국이 당에 사신을 보내고 악공(樂工)을 바쳤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고려(高麗)국이라는데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했다는 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측천무후는 조선군왕 고보원에게 진봉시켜 주겠다면서 오라고 했으나 오지 않자, 고덕무를 안동도독(安東都督)에 임명했던 것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구려 왕족이 계속해 안동도독에 임명된 것은 요동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기미통치방식의 적용이라는 설과, 요동지역의 확보가 어려워지자 그 지역을 고구려의 친당적인 구(舊)고구려왕족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어 변경을 다스렸다는 설 등이 있다.
아무튼 안동도독으로 임명되어 요동땅으로 부임했던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 역시 당나라 서울과 관계를 적당히 하고, 당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독자적인 행보를 했던 것이다. 그 후 고덕무의 자손들이 고구려의 대를 이어 소고구려를 세웠고, 고덕무의 후손이 120여년이 지난 후에 당나라에 악공을 보낸 것이다. 악공이란 요즘말로 예술단원을 말하는데, 당나라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건 그렇고, 말하자면 고덕무는 소고구려국의 시조가 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소고구려는 또 무엇인가? 매우 생소하므로 좀 더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소고구려는 8세기말∼9세기초에 요동지역에 살던 고구려유민이 자립하여 세운 나라이다. 당나라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했으나, 고구려유민의 저항과 신라의 적극적인 공세에 밀려 676년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8세기 중엽까지 당나라는 요동의 고구려유민사회에 기미주(羈靡州)를 설치하고 다스렸다. 기미주의 장(長)은 고구려인이었으며, 고구려유민은 안동도호부의 통제와 감독 아래에서 자치를 행하였다.
그리고 당나라는 고려조선군왕(高麗朝鮮郡王)으로 봉한 고구려 왕손(王孫)을 수도 장안(長安=요즘의 서안)에 머물게 하면서, 원거리에서 요동에 있는 고구려 유민사회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그 후 측천무후가 690년에 당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바꾸었고, 측천무후가 705년에 죽으므로 나라이름을 다시 당나라로 환원시켰다. 측천무후 시기에는 각 부족국가가 당나라에 패하여 그 백성들이 영주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왔는데, 영주도독 조홰의 횡포에 반발하여 거란족·말갈족·고구려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대조영이 698년에 발해를 세우는 등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다.
아무튼 그 후 755년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당나라의 요동지배는 전면적으로 붕괴되었다. 이 틈을 타서 발해(渤海)는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뻗쳐 목저주(木底州)와 현도주(玄菟州)를 설치하였다. 안녹산의 난을 진압한 뒤 당나라의 세력이 다시 요서지역을 장악했지만, 중앙정부와 동부 번진(蕃鎭)세력 간에 대립이 심하여 요동지역으로의 진출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따라 요동지역은 당과 발해의 완충지대로 남았다. 이때 요동지역에 머물던 고구려유민이 세력을 결집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소고구려국이다.
당회요(唐會要)에 따르면 818년 고려(高麗)국이 당에 사신을 보내고 악공(樂工)을 바쳤다고 한 기록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회요(唐會要)기록에 나오는 고려를, 이미 멸망한 고구려와 구별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소고구려라고 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당회요에는 고구려라 하지 않고 고려(高麗)라고 기록된 것은 매우 특이한데, 그 당시에는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했던 모양이다. 이 책의 들머리에서 고구려가 고려라고도 불렀다는 이야기를 한바 있는데, 이 기록 말고도 고구려를 고려라고 기록한 사료들이 무수히 많다.
아무튼 소고구려의 주민 구성은 고구려유민이 중심이 되었고, 건안성(建安城)에 강제 이주된 백제유민과 말갈족 기미주의 주민이 그 일부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8세기 이후 요동지역은 인구가 매우 줄어들었고, 또 요동평야는 사방이 탁 트인 곳으로서 방어에 어려움이 있어 소고구려의 기반은 매우 취약하였다. 820년대 발해의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가 크게 팽창한 때에, 소고구려국은 발해에 병합되었다. 이후 거란이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유민을 요동지방으로 강제로 이주시킴에 따라, 요동의 고구려유민은 발해인에 흡수되어 발해유민으로서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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