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이 길어 "6) 청산리독립전쟁"의 "(5) 맹개골전투"이후 뒷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6) 청산리독립전쟁 : (5) 맹개골전투, (6) 만기구전투, (7) 쉬구전투, (8) 천보산전투, (9) 고동하곡전투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Ⅰ.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3.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 > 6) 청산리독립전쟁 > (5) 맹개골전투~(9) 고동하곡전투
(5) 맹개골전투
1920년 10월 22일의 어랑촌전투를 끝내고 이튿날인 23일 아침부터는 독립군부대들은 안투/안도현 황커우링/황구령(黃口岭/嶺) 방면을 향하여 소부대를 편성해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어랑촌전투에서 승리한 그날 밤에는 완루고우/만록구(万鹿沟/萬鹿溝 ; 별칭 완로우고우/完楼沟/完樓溝/완루구)의 삼림 속에서 노영을 하고 다음날인 10월 23일 아침 ○령 방면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작은 보대들로 병력을 나누고 길을 나누어서 하오 3시경 ‘맹개골’ 삼림 속을 통과할 때 일본군 기병 30명이 이 골짜기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곧 삼림의 변두리에 매복했다가 일본군이 접근해 오자 일제히 공격을 가하여 일본군 기병 10여 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 전투에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전리품으로 군마 5필, 군용지도 4장, 시계 5개, 기타 피복·장구 등 다수를 노획하였다.註 078
(6) 만기구전투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맹개골전투를 거친 후 맹개골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완치고우/만기구 후방 삼림 속에서 휴식 중일 때 전방 약 100미터의 지점에서 일본군 보병 약 50명이 밀집하여 서서히 행군해 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당시 소부대들로 나누어 행군하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그것이 뒤따라 오는 독립군인지 일본군인지 판별하지 못하고 사령관 김좌진이 큰 소리로 “아군인가?” 하고 소리쳐 물었다. 일본군은 이 소리를 듣고 즉각 산개하여 전투 태세를 취하므로 독립군은 그제야 그것이 일본군인 줄 알고 일제 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 30여 명을 즉각 사살하고 나머지 적을 패주시켰다.註 079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얼마 후에 일본군 200여명이 패주한 자기 부대를 찾아 행군해 오는 것을 발견했으나, 독립군 자신의 행군 예정을 지키기 위하여 전투를 피하고 후방 삼림 속으로 들어가서 숙영하였다.
(7) 쉬구전투
* 시고우/서구(西沟/西溝)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10월 23일 밤을 삼림 속에서 숙영한 다음 24일 아침 ‘쉬’구로 향하였다. 이 때 일본군 기포 6문과 보병 100여 명이 방심한 채 촌락의 전방을 통과하여 독립군 50명이 행군하고 있는 삼림 쪽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 50명은 즉각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군 포병을 모두 섬멸하고, 동시에 뒤따라오는 보병을 다수 살상하여 패주시켰다.
또한 마침 이 때 삼림의 좌편으로부터 일본군 기병 1개 소대가 나타나서, 말은 촌락에 매어 두고 산개하여 삼림 쪽으로 올라왔다. 독립군은 이를 발견하여 약 20분 동안 공격을 가해서 이를 대부분 섬멸하고, 기갈이 심하므로 전투를 중지한 채 삼림 속으로 돌아갔다.註 080
* 기갈 : 배고픔과 목마름
(8) 천보산전투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의 독립군연합부대는 10월 24일과 25일에 톈바오/천보산 남쪽 부근에서 일본군 1개 중대를 습격하였다.
이범석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한 부대는 10월 24일 8시와 9시 두차례에 걸쳐 천보산 부근의 은·동광을 수비하고 있던 일본군 1개 중대를 두 차례 습격하였다.註 081 일본군이 국자가에 있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대 1개 소대의 긴급 증원을 요청하고 있는 곳에서도 그들이 패전했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홍범도연합부대에 속한 한 독립군부대는 10월 25일 새벽 식량 조달을 위하여 천보산 부근에 나갔다가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註 082 독립군의 천보산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경악하여 이에 대비하도록 부근에 있는 일본군 보병 1개 대대를 긴급히 천보산에 증파하였다.註 083
일본군이 천보산에 긴급히 1개 대대의 병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실에서, 천보산전투에서의 일본군의 큰 피해를 알 수 있으나, 일본군측에서는 정확한 전사자와 부상자의 통계는 발표하지 않았다.
(9) 고동하곡전투
청산리독립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구동허/고동하의 골짜기에서 1920년 10월 25일 한밤중부터 26일 새벽까지 일본군이 홍범도부대를 야습했다가 도리어 반격당해 쫓겨서 패주한 전투였다.註 084
당시 일본군의 보고를 정리해 보면,
① 일본군은 홍범도부대를 찾아 밀림 속에 들어가 헤매다가 10월 25일 밤 10시경에 구동허/고동하 골짜기에서 천신만고 끝에 홍범도부대의 연기를 발견하고 정각 12시에 일본군 150명 이 먼저 반야(飯野 ; 이이노) 소좌가 이끄는 2개 소대를 앞세워 야습을 돌격전으로 감행하였다.
② 그러나 홍범도부대는 대비가 되어 있어서 가까운 지점에서 여러 곳에 산개하여 매복해 있다가 응전과 반격을 단행하였다.
③ 일본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후퇴하여 부근의 최고봉인 1743고지에 쫓겨 올라가게 되었다.
④ 일본군이 홍범도부대에게 쫓길 때에는 제2선에 있던 예비대가 홍범도부대의 공격을 막는 제1선을 담당하였다.
⑤ 1743고지에 쫓겨 올라온 일본군장교와 병사들은 패잔으로 전전긍긍하다가 먼동이 트고 날이 밝아오자(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얼굴에 희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註 085
일본군은 독립군을 얕보고, 150명의 소부대로서 낮에도 일본군은 생소하여 들어가기 어려운 밀림 속에 밤중에 겁없이 들어가서 먼저 야습을 감행했다가 일본군보다 2배나 병력이 많으며 밀림전에 숙달된 홍범도부대의 매복작전에 걸려 45분간의 격전 끝에 제1선을 맡았던 2개소대가 거의 전멸되고 패잔병들이 홍범도부대에게 쫓기어 1743고지로 도망해 올라왔다가 날이 새어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청산리독립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고동하곡전투는 밀림유격전에 능숙한 홍범도부대가 제발로 밀림 속으로 찾아 들어온 일본군 150명의 토벌대 중에서 2개소대(약 100명)를 섬멸해버린 전투였다.
고동하곡전투를 마지막으로 하여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의 독립군은 10월 26일 낮부터는 안도현 방면으로의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청산리독립전쟁은 일단 멈추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에 걸쳐 숨가쁘게 전개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청산리독립전쟁은 한국 독립군의 대승리로 일단 막을 내린 것이다.
주
註 078 『독립신문(獨立新聞)』(제98호/第98號), 1921년(年) 3월(月) 12일자(日字),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2/二), 「경전장교김훈씨담(經戰將校金勳氏談)」참조.
註 079 주 78)과 같음
註 080 주 78)과 같음
註 081 이범석(李範奭), 앞 책, p.481 ;「전보(電報)」 조선(朝鮮) 제(第)124호(號), 1920년(年) 11월(月) 2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229 참조.
註 082 「불령단의탈출 및 양식의 보충(不逞團ノ脫出及糧食ノ補充)」간정(間情) 제(第)44호(號) 1920년(年) 10월(月) 28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379 ;「시월중(十月中), 정보에 의거한 간도지방불령선인의 행동개황(情報ニ據スル間島地方不逞鮮人ノ行動槪況)」간정(間情) 제(第)59호(號), 1920년(年) 11월(月) 10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p. 405~406 참조.
註 083 김정주(金正柱), 앞 책, p.59 참조.
註 084 「전보(電報)」조특(朝特) 제(第)120호(號), 1920년(年) 10월(月) 28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p. 226~227 참조.
註 085 김정주(金正柱), 앞 책, pp.58~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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