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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문화
발해의 문화
▶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가임은 여러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발해 문화가 고구려의 문화만을 계승한 것은 아니다. 발해의 중심지는 고구려 영역에 속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독자적인 문화전통을 지닌 곳도 아니었다. 따라서 건국 이후 발해의 문화는 자연히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당의 문화와 고구려의 문화가 그것이다.
▶ 건국 초기의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기의 도성체제와 고분양식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해 문화가 지속적으로 고구려문화를 고수한 것은 아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당의 문화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기층문화는 말갈 문화가 중심이었으면, 여기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의 요소도 있었고, 그 속에서 발해인들 고유의 문화도 창조되었다.
▶ 이처럼 발해문화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요소가 보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활발한 대외관계를 통해 습득된 성과였다. 그렇다면 발해문화에서 볼 수 있는 각각의 문화요소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고구려 문화
▶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 중 대표적인 것은 지붕을 장식하였던 막새기와(瓦當)이다. 연꽃잎을 배치한 막새기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에서 각각 특징적으로 발달하였다. 그 중에서 발해의 막새기와는 부조가 뚜렷하고 힘이 넘치는 고구려의 것을 계승하였다. 발해의 지배계층은 고구려인들이었고, 기와가 사용될 수 있는 건물은 궁궐, 관청, 사원이었을 터이니 그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 발해인의 종교는 불교인데,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고구려의 불교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흙으로 둥글게 구워만든 전불은 바로 고구려의 양식인 것이다. 이밖에 무덤 양식에서도 고구려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발해의 무덤은 흙무덤, 돌무덤, 벽돌무덤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에서 돌무덤은 바로 고구려적인 요소로서, 특히 석실봉토묘(石室封土墓)는 고구려 지배계층의 무덤을 발해에서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정혜공주의 무덤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 한편 발해의 성터를 살펴보면, 평지성과 산성이 있는데, 평지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대부분이고 산성은 돌로 쌓은 것이 대부분이다. 발해의 초기 성은 이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방어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바로 고구려시기 집안의 환도산성과 국내성을 모델로 하여 계승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후 8세기 중반에는 당 문화의 영향으로 장안성을 모방한 평지성 중심의 방어체제로 전환된다.
2) 당나라 문화
▶ 발해가 당나라로부터 받아들인 대표적인 문화요소는 정치, 군사제도라고 할 수 있다. 3성6부제도, 10위의 군사제도, 지방행정제도, 관료제도 등은 모두 당나라의 제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발해는 명칭에 있어서 독자성을 보여주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政堂省) 등의 3성과, 충부(忠部), 인부(仁部) 등의 6부 명칭이다.
▶ 또한 당나라의 3성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기초로 하였다면, 발해의 3성은 행정실무기관인 중대성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것 또한 발해 중앙행정제도의 특성이라고 할 만하다.
통일신라의 집사성(執事省)이나 고려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도 모두 권력이 집중된 곳인데, 발해의 중대성에 비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밖에도 무덤 양식에 있어서 벽돌로 쌓는 방법, 현실(玄室) 벽화 인물의 화풍이나 복식 등이 모두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문왕 이후에 채택된 평지성을 중심으로 한 도성체제도 당나라에서 유입된 것이다. 또한 발해인의 활쏘기, 타구, 격구 등은 페르시아를 거쳐 당나라로 전파된 것인데, 이것은 다시 발해에 전해졌고, 9세기 초에는 발해를 거쳐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3) 말갈 문화
▶ 발해 건국의 중심지는 원래 말갈족의 거주지였다. 따라서 말갈족이 발해 사회의 기층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발해 문화에는 당연히 말갈족의 문화요소가 남아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흙무덤인데, 이것은 고구려의 돌무덤, 당나라의 벽돌무덤과 구분되는 말갈의 전통이다.
▶ 그릇에서도 다양한 양상이 보이는데, 몸통이 홀쭉하고 입술이 두 겹으로 된 것 등은 모두 말갈적이 전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 계통의 것은 물레를 사용하였고 굽는 온도도 높았는데, 이에 비하여 말갈 계통의 것은 손으로 직접 빚었고 굽는 온도가 낮았다고 한다. 이처럼 그릇의 제작기법에 있어서도 다른 문화요소와 구별되는 말갈의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4) 고유 문화
▶ 발해 문화에서 창조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덤 양식의 경우 벽돌로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덤 위에 탑을 쌓았는데, 이것은 바로 발해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정효공주의 무덤이 그 좋은 예이다.
▶ 무덤의 매장방식에 있어서도 발해 고유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발해는 1부1처제를 기본으로 하여 부부합장이 이루어졌지만,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묻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한 가족인지 순장인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왕릉급 무덤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발해에도 순장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 또한 현지의 토착적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밖에도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부분에 도자기를 씌워 빗물로 인한 부패를 방지한 것이라든가, 구멍이 많이 뚫리고 형태도 다양한 허리띠 장식, 독특한 기와 문양 등에서도 발해 고유의 창조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 이상 발해문화에 영향을 끼친 여러 문화요소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적 요소도 드러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해주에서 발굴된 유물의 경우이다. 연해주는 현재 러시아의 영토이지만, 과거에는 발해 영토의 일부분이었다. 따라서 연해주에서도 발해의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곤 한다. 그 중에는 독특한 장식의 도기, 소그드 화폐, 경교 십자가 등도 있는데, 러시아 학자들은 이런 것들이 중앙아시아나 남부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한다.
▶ 발해 문화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초기에는 고구려 문화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 후 8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당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유입하여 더욱 다양한 요소를 띄게 되었다. 하지만 지역적으로는 편차가 없을 수 없었다. 과거 고구려 영역이었던 함경도 등지에서는 고구려전통이 많이 남아있었던 반면, 그렇지 않았던 길림성, 흑룡강성 등지에서는 고구려 외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강했다.
▶ 우리는 흔히 발해 문화가 고구려 문화를 단순하게 계승한 것으로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러나 발해 문화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주변 및 토착 지역의 여러 문화를 발해인들이 혼합하여 만든 창조적 양식인 것이다. 발해 문화가 당나라 문화의 영향 아래 놓여있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중국 측의 입장을 우리는 공정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발해 문화가 그저 고구려의 것을 계승하였다고만 하는 것 역시 우리의 지나친 주관적 판단일 것이다. 발해인의 입장에서 발해 자체의 고유한 문화적 요소를 살펴보려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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