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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문학

발해가 ‘북국(北國)’이라면 신라는 ‘남국(南國)’이라 할 수 있다. 두 나라가 함께 있는 시대를 ‘남북국시대’라고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15] 발해와 일본이 주고받은 국서는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으며, 당나라 유학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중 당나라 문인이 발해인에게 준 시 등도 소중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일컬을 정도로 번영을 누리고 한문학의 수준을 자랑했지만, 거란족의 침공으로 문헌자료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 남아있는 발해문학 관련 사료는 외국에 전해진 시문과 고고학 발굴의 성과뿐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발해에도 한자를 이용해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구당서>에서 발해에는 “자못 문자 및 서기(書記)가 있다”라고 한 말이 그 증거이며, 한자를 이용해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쓴 것이 거의 확실시되나[16][17] 아직 해독되지 못했다.

발해문인 중 오늘날까지 작품이 남아 전하는 경우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가 일본 문헌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들이다. 일본에 간 발해문인들은 자리잡기 시작한 일본 한문학에 상당한 자극과 영향을 미쳤다. 양태사, 왕효렴, 배구, 배정 등의 시가 남아 있다. 

사신의 일행에 동참한 승려들의 시도 몇 편이 남아 있다. 발해문학작품이 국내에 남은 것은 2편의 비문(碑文)뿐인데,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이다. 이 비문은 번려문의 형식을 갖췄으며, 감각과 표현을 최대한 세련되게 갖춘 귀족문학의 기풍을 아주 잘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두 비문은 고유명사나 숫자 따위만 다르고, 다른 대목은 거의 같았다. 고정된 격식을 마련하고 필요한 대목만 고쳐 썼음을 알 수 있다. Ctrl-c, Ctrl-v 의 폐해 아름답게 표현하는 격식을 너무 존중한 나머지 창의력을 잃고 쇠퇴하는 폐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18][19]

우리나라 문학사를 연구하는 교수들 중에서 발해문학을 우리나라 문학사로 다루는 이는 조동일 교수가 거의 유일하며, 그 이외는 발해문학을 다루지 않거나 제외하고 있다. 이것은 발해문학의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발해문학 자체가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사에 편입된 공동문학권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16] 발해 집터를 발굴했을 때 출토된 기와 등에 문자가 발견되었다
[17] 또한 중국 사료에는 당현종 시절 발해가 보낸 외교문서를 당 조정이 해독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다가 이태백이 겨우 해독해냈다는 기록도 있다.
[18] 여기까지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 4판, 1권 참고
[19] 다만 대상이 묘비란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실제로 묘제는 극도로 보수적이고, 그게 시대적 차이가 없고 왕족 수준의 고위층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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