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korea.aks.ac.kr ,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590&docId=1820230&categoryId=1590
* 민족문화백과사전 (검색어) "발해" 글에서 [건국과 성쇠] 중 "1.건국" 내용만 가져왔음.
* 민족문화백과사전 (검색어) "발해" 글에서 [건국과 성쇠] 중 "1.건국" 내용만 가져왔음.
1. 발해의 건국
발해의 | [건국과 성쇠] | 1. 건국 http://tadream.tistory.com/6937 | |
2. 발전, 3. 내분, 4. 융성 http://tadream.tistory.com/6938 | |||
5. 멸망과 부흥 http://tadream.tistory.com/6939 | |||
[정치제도] | http://tadream.tistory.com/6940 | ||
[강역과 행정구역] | http://tadream.tistory.com/6941 | ||
[사회구성] | http://tadream.tistory.com/6942 | ||
[경제] | http://tadream.tistory.com/6943 | ||
[문화] | http://tadream.tistory.com/6949 |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인 698년에 건국되었다. 건국의 기폭제가 된 것은 696년에 요서(遼東) 지방의 영주(營州: 지금의 요령성 朝陽)에서 일어난 거란족의 반란이다.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도시로서, 주변 지역에서 귀순해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이민족들이 다수 거주하였다. 그러한 이민족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 해족(奚族), 말갈족 등이 있었다.
696년 5월에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고, 이들은 유주(幽州, 지금의 베이징)까지 공격하여 당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이듬해에 겨우 평정되었다. 영주에 함께 거주하던 대조영 집단도 이들에 동조했고, 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무렵에 무리를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 이 때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 집단도 동참했다.
두 집단은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遼東)으로 건너왔으니, 이들이 영주에서 말갈족의 거주지인 북방으로 손쉽게 탈출하지 않고 아직 당나라 세력이 남아 있는 동쪽의 고구려 옛 땅으로 돌아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고구려 유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을 암시하고, 발해 건국이 결국은 고구려의 부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는 처음에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에게는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함에 따라 당나라 군대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이 때 당나라 장수는 이해고(李楷固)로서 거란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당나라에 항복한 인물이다. 그는 먼저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그를 죽였고, 이 무렵에 걸걸중상도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대조영이 두 집단을 통합하였고, 당나라 군대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랴오둥을 벗어났다. 그렇지만 이해고는 랴오닝성〔遼寧省〕과 지린성〔吉林省〕경계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추격해오자, 대조영 집단은 부득이 당나라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다행히 이 전투에서 이해고가 대패하여 귀환했다.
대조영은 무리를 수습하여 영주로부터 2천리나 떨어진 동모산(東牟山)에 나라를 세웠다. 발해가 건국된 해는 일본측 기록인『루이쥬코쿠시(類聚國史)』에 전해진다. 건국지는 지린성 돈화(敦化)에 있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여겨진다. 이곳은 말갈족의 터전이기에 기록에는 ‘읍루의 옛 땅’에 도읍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조영이 처음부터 건국지로 지목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추격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곳이었다. 산 위에 성을 쌓아 건국한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당나라 군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것으로서, 건국 당시 방어에 급급했던 절박한 사정을 추측할 수 있다.
건국 집단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되었다. 영주를 탈출할 때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독립적으로 망명자를 통솔했으니,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지휘했고,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지휘했다. 이때의 규모는 1천 명 가량이었다. 발해를 건국하고 난 뒤에 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점차 흡수함에 따라 세력이 날로 불어나 마침내 10여만 호에 정예병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주도권은 고구려 유민이 쥐고 있었을 것이니, 현전하는 발해인의 성씨 가운데 고(高)씨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발해 왕실과 귀족이 묻힌 육정산고분군(六頂山古墳群)에서 제일 상층부에 속하는 무덤들에 고구려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실 등에서 증명된다.
처음에는 국호를 ‘진국(振國)’이라 했다. 진국(震國)이란 기록도 있는데, 이것은 걸걸중상에게 봉해진 진국공에서 유래해서 추후에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대조영이 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 받은 뒤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신당서(新唐書)』발해전에서 이때에 “말갈 칭호를 버리고 발해로만 불렀다”고 한 것은 당나라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당나라는 발해국을 공식 인정하기 전에는 말갈 집단으로 비하해 불렀기 때문이다.
대조영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다. 이는 발해국의 귀속과 직결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순수한 고구려인도 순수한 말갈인도 아니었으니, 역사 기록에 고구려 별종(別種)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대조영 집안은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으로서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구려 장수를 역임했으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반란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중국으로 강제 이주시킬 때에는 그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기에는 이미 고구려 유력가문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건국 시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아울러 통솔할 수 있었다.
건국을 선포한 뒤에 고왕(高王) 대조영(?~719)이 추진한 것은 주변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당나라 군대가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당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동돌궐(東突厥)에 사신을 파견했고, 역시 당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방패막이로 삼았다. 이 때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등 대아찬을 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당나라도 발해에 화해의 몸짓을 보내왔다. 707년경에 당 중종은 장행급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위무했고, 대조영은 그 보답으로 아들을 장안으로 보내 숙위(宿衛)하게 했다. 마침내 713년에 당 현종이 최흔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고, 아들 대무예(大武藝)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책봉함으로써, 비로소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로부터 발해는 거의 매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전]
대조영은 신라 및 돌궐과 가까이 하면서 당나라와는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711년 묵철이 당과 화친을 맺고 그 뒤에 점차 세력이 와해되어 나가자, 당나라와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발해 > 건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의 명칭 - 고구려연구회 (0) | 2013.07.12 |
---|---|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발해의 건국 - 고구려연구회 (0) | 2013.07.10 |
발해의 건국 : 구당서,신당서 - 이경찬 (0) | 2013.06.19 |
<29> 발해 건국과정과 천문령 전투 - 국방일보 (0) | 2013.03.23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1>후고려기(後高麗記)(4) - 광인 (0) | 2013.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