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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출생1542년 경상북도 의성
사망1607년
국적조선
별명호는 서애, 자는 이현
학력1566년 별시 문과 급제
직업문인, 정치가
배우자전주 이씨
부모유중영 / 안동 김씨
웹사이트http://hahoe2.andong.com/

유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 음력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자 유학자이며, 동인의 일원이다. 본관은 풍산(豊山)[1],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의성[1] 출신이며, 군수 유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이다.

이황의 제자로 조목(趙穆)·김성일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의 대가였다. 탁월한 군사 지식으로 무관 이순신을 후원하여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뼈저린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생애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평가 받으며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564년 명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게 된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유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후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1582년~1583년),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으며 별탈 없이 승진해 나갔다. 상주(尙州) 목사로 나가 예절로 다스렸으며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함경 감사·대사성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예조 판서 재직 중 위주 목사 서익(徐益)이 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 탄핵하니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형조 판서로 부름을 받고 대제학을 겸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강경파인 북인의 일원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또한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하였으므로 뒷날에 명나라에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1591년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성룡은 권율·이순신 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의 간성이 되게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당쟁과 전란 속에서 조선의 조정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때 왕을 모시고 송도(松都)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으나 신잡의 말에 따라 그 날로 사퇴하고,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조정에서 북행(정확하게는 북행하여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자는 의견)을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홀로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

또한 일본의 군사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여러 신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권율 등의 명장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듬해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직문하고 군량을 준비하다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파주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한편 일본의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적의 연락을 끊었다.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 음력 5월 6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당을 병산서원 뒤에 세우고 여산(廬山)의 퇴계묘(退溪廟)에 함께 모셨다.

사후관작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위패가 모셔져 제향하게 되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문충공(文忠公)이 되었다.

유성룡을 연기한 배우들

일화

  • 유성룡은 바둑의 고수로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 유성룡은 의학과 침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허준에게 의학과 침술에 대한 많은 조언을 하였다고 한다.
  • 살아 생전 유성룡은 너무나 청렴했던 삶을 살았던 탓으로 장례비가 없었는데 이를 듣고 많은 백성들이 제수용품을 싸들고 문상을 왔다고 한다.
  • 그가 죽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유성룡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평가

예악교화(禮樂敎化)·치병이재(治兵理財)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선조실록
《선조실록》에서는 편찬자의 평으로, 재상으로서의 그릇이 작고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지 못하여 대신다운 풍절이 없었다고 하는 등, 그의 성품에 대한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2][3]

저서

  • 징비록(懲毖錄)》
  • 《서애집(西厓集)》
  • 《난후잡록(亂後雜錄)》
  • 《진사록(辰巳錄)》
  • 《근폭집(芹曝集)》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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