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한백록 韓百祿 (1555~1592)
본관은 청주. 자는 수지(綬之)이며 시호는 충장(忠莊). 춘천 서면 당산리(棠山里) 출생이다. 아버지는 선비 굉(宏)이며, 할아버지는 경인(敬仁)이다. 한백록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다했으며, 경전과 병서 읽기에 익숙했다. 특히 장성해서는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무인의 길에 뜻을 두었다.
임진왜란 초전에서 조선군이 육지에서 잇달아 패하고 있을 때 남쪽 바다에서는 조선수군이 잇달아 승리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의 승리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30여년 전인 명종때의 수군강화책을 들 수 있다. 특히 접경지방의 유민들과 교류하며 화포기술과 선진 조선술을 습득하여 해상 전투력의 증강이 있었다. 명종 10년(1555)에 발발한 을묘왜변에서 조선 조정은 변화된 왜침의 실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조선은 수군력 확보에 주력하게 된다. 그로 인해 판옥선의 개발과 화포의 개량 및 확보에 주력하는 등 무기체제를 충실히 하여 방위 태세를 확립하였다.
이 시기쯤 바로 한백록은 무예를 익혀 선조(宣祖) 13년(1580) 25세로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하였다. 당시 북쪽 변경에 오랑캐들이 넘나들며 우리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 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다. 이와 달리 나라안에서는 붕당정치의 폐해로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한백록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대접이 문신보다 덜한 무인의 길을 결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한백록은 25세 되던 해, 알성무과에 응시하였다. 바로 그는 진잠현감(鎭岑縣監)으로 배명(拜命)을 받고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며 병기를 수리보완하여 사졸훈련에 힘쓰던 중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에 제수(除授)된다.
한백록 장군이 활동했던 임진왜란의 상황은 대개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선조 25년(1592) 4월 왜군의 부산진 침략으로 시작되어 서울, 평양, 함경도로 왜군이 침공한 시기이고, 2단계는 선조 26년(1593) 1월 전세가 역전되어 왜군이 총퇴각하여 서울에 집결하고, 강화회담이 계속된 약 4년간 전쟁의 소강상태 시기이다. 3단계는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전라도로 침공하여 남원 등을 함락하였으나, 조선·명군의 반격을 받고 남해안으로 총퇴각하고 다시 농성하다가 선조 31년(1598) 8월 풍신수길이 죽자 철수하기 시작하여 11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시기이다. 이 1단계의 상황에서 임진왜란 첫 해전(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바로 한백록 장군이다.
세계 해전사에서 패자의 상황을 살펴보면, 걸출한 지휘관이 없으면 우수한 수군 편제와 전함·화포도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마도 한백록 장군은 뛰어난 전술과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휘하 장병과 함께 압도적인 화력으로서 일본 수군을 격멸하였으리라. 초기해전의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한백록 장군 등의 활약과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592년5월4일 전라좌수군은 주전함인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여수 본영으로부터 거제 앞바다를 향하여 출동하였다. 이틀 후 한산도에서 경상우수군(판옥선 4척과 협선 2척)과 합류한 뒤, 7일 아침 마침내 옥포에서 일본수군과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 날 30여척의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26척을 격파하고 이어 합포와 적진포 등지에서 다시 16척을 불사름으로써 모두 40여척의 적선을 대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임진왜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 전황을 김영기 논설고문은 `강원의 인맥-하'(전국문화원협의회 강원도지회刊)에서 생생하게 적고 있다. “옥포선창으로 5월7일 소리없이 조선수군은 다가갔다. 왜군은 분탕질에 정신이 없었다. 조선판옥선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구들은 갈팡질팡했다. 왜군의 대장은 등당고호(藤堂高虎) 굴내씨선(掘內氏善) 등이었다. 포를 맞은 왜선이 침몰하자 굴내씨선이 물에 뛰어 들었는데 신호가 칼을 휘둘러 목을 잘랐다. 왜장의 목을 칼 끝으로 꽂아 올렸다. 왜장 등당고호의 배도 황자포를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조선수군은 좌충우돌 왜군을 섬멸했다. 바다에 왜구의 시체가 자그마한 산을 이루었다. 이날 결투에 조선수군은 한사람도 상한자가 없었다. 왜적의 배 26척을 부쉈다. 이어서 합포(合浦) 앞바다에서 5척, 적진포(赤珍浦)에서 13척을 쳐부수었다. 첫 해전에 승리로 이끌었던 그 현장에 춘천출신의 한백록 장군이 있었다.”
이 옥포해전의 전승이야말로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적을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감을 갖게 해 준 중요한 일전이었다. 양측의 수군전력이 노출되는 초전에서 대승을 거둔 사실은 곧 조선수군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반면에 일본수군으로서는 초전 패퇴의 충격으로 인해 크게 전의가 손상되었음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심리적 부담 또한 차후의 작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 해(1592) 4월부터 6월까지 옥포·당포·부산 등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것을 참작하여,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후임으로 한백록 장군은 부산병마첨절제사에 특별 제수되었다. 이것은 남해의 보루를 더욱 확고히 하자는 조정의 뜻이기도 하지만 장군의 능력이 그만큼 특출했음을 보여준다.
이 후 전쟁이 더욱 치열하여 선조 25년(1592) 7월 17일 미조항(彌助項) 싸움에서 공이 전사하였으니 충장공(忠壯公)의 나이 겨우 38세였다. `선조실록'25년 8월 신해조에서는 “만호 한백록의 전후의 공이 가장 많았는데, 장군이 적에 탄환을 맞고도 전진하여 싸우다가 전투가 끝난 후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후에 장군의 군중(軍中) 노복(奴僕)인 충득(忠得)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인 춘천군 서면 금산3리 관음동으로 반장(返葬)하였다. 선조 38년(1605)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으로 책록(策錄)되었고, 영조 28년(1752)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순조 8년(1808)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증작(贈爵)되었다. 그리고 순조 11년(1811) 6월 19일에 `증 병조판서 한백록에게는 충장(忠壯)으로 증시(贈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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