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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록 장군

옥포해전 선봉… 임진왜란 승리 주역
2005년 08월 02일 (화)

충장공(忠壯公) 한백록(韓百祿, 1555∼1592) 장군은 조선조 명종 10년(1555)에 춘천 서면 당산리(棠山里, 현재 방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 휘(諱)는 백록(百祿)이며, 자(字)는 수지(綬之).

어려서부터 영특해 경전과 병서 읽기에 익숙했는데 장성해서는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를 읽으며 무인의 길을 결심했다. 선조 임금 때인 26세에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했는데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북쪽 변경에서는 오랑캐들이 넘나들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 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던 시기였다. 더욱이 나라안에서는 붕당정치의 폐해로 국가의 기반자체가 흔들리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태어난 한백록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무인의 길을 택했고, 또한 알성무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종6품직인 진잠현감(鎭岑縣監)으로 배수 받고 임지에서 잠업과 병기를 수리보완하면서 군졸훈련을 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1590년(선조 23)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귀국한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의 내침과 관련해 엇갈린 보고를 올려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진잠현감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한백록은 조정으로부터 재간과 굳센 힘이 있다는 평판을 받아 남쪽 지방의 요충지인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를 제수받았다.

오랑캐·왜구 침략 잦은 시기 '武人의 길' 선택
불리한 戰勢서도 병사 사기 진작 일본군 대파
전쟁서 탄환 맞고도 전투 독려… 38세로 전사

지세포는 거제도 동남쪽에 있으며 경상우수사 관할인 제포진에 속한 만호다. 당시 경상우수사는 원균이었다. 한백록은 임지에 이르자마자 왜란에 대비해 병사들의 훈련과 무기제조 등 전쟁 준비에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선조 25년(1952) 임진년 4월 왜적은 대마도로부터 곧바로 부산과 동래 등 요충지역으로 침입, 박홍의 경상좌수사는 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궤멸되었고 또한 경상우수사도 대비책을 세우지 못한 채 무너졌다.

1592년 5월 4일 전라좌수군은 주전함인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여수 본영으로부터 거제 앞바다를 향하여 출동하였다. 이틀 후 한산도에서 경상우수군(판옥선 4척과 협선 2척)과 합류한 뒤, 7일 아침 마침내 옥포에서 일본수군과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날 30여척의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26척을 격파하고 이어 합포와 적진포 등지에서 다시 16척을 불사름으로써 모두 40여척의 적선을 대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처음 싸움은 형세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수군에게 불리했으나 선봉대 역할로 나선 충장공의 분발과 역투가 조선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려 대승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반면에 일본수군으로서는 초전 패퇴의 충격으로 인해 크게 전의가 손상되었음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심리적 부담 또한 차후의 작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원균은 한백록의 전과를 조정에 알려 공을 인정받아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후임으로 한백록 장군은 부산첨사에 특별 제수되었다.

이 후 전쟁이 더욱 치열하여 선조 25년(1592) 7월 17일 남해 동남쪽 끝에 위치한 미조항(彌助項) 싸움에서 공이 전사하였으니 충장공(忠壯公)의 나이 겨우 38세였다.

'선조실록' 25년 8월 신해조에서는 "만호 한백록의 전후의 공이 가장 많았는데, 장군이 적에 탄환을 맞고도 전진하여 싸우다가 전투가 끝난 후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 후에 장군의 노비인 득충(得忠)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인 춘천군 서면 금산3리 관음동으로 반장(返葬)하였다.

한백록 장군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강원도 춘천현 인물조'에 유일한 충신으로 정표(旌表)된다. 장군에게는 선조 38년(1605)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으로 책록(策錄)되었고, 영조 27년(1751)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순조 8년(1808)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증작(贈爵)되었다. 그리고 순조 11년(1811) 6월 19일에 '증 병조판서 한백록에게는 충장(忠壯)으로 증시(贈諡)하였다'는 '순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배위(配位) 창녕 성(成)씨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라는 가자(加資)가 내렸다. 아들은 우천(佑天)으로 선조 41년(1608)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 都事)를 지냈다. 이로 볼 때 한백록 장군은 임진년 이래 춘천에서 유림들에게 중요한 충신으로 추모받았음을 알 수 있다.

충장공 한백록의 묘역과 정려각(旌閭閣)은 춘천시 서면 금산리 산 64, 방동리 406의 2에 소재하고 있으며 도 문화재 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7년전쟁의 승기를 조선쪽으로 반전시킨 옥포해전. 그 현장에 춘천출신의 충신인 충장공 한백록 장군이 있었다.

기개 뛰어난 지휘관
미약한 자료 아쉬워


충장공(忠壯公) 한백록(韓百祿, 1555∼1592) 장군은 춘천출신의 충신으로 정려(旌閭)로 표한 유일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해전이었던 옥포해전에서 적의 예봉을 꺾어 전쟁의 향방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끈 선봉의 중심에 한 장군이 있었다.

이러한 빛나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충장공에 대한 자료는 미약하기만한데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사료 발굴 조사 등을 통해 심층적으로 연구 검토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충장공은 가정 34년인 명종 을묘년(1555년)에 춘주(春州, 춘천의 옛 명칭) 당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릇됨이 아주 컸고 경전과 자사를 한번 눈으로 보고 대의를 파악하는 등 영특했다고 한다.

선조 14년(1581) 26세 때 알성무과에 급제해 진잠현감과 남쪽의 군사적 요충지인 지세포만호를 제수받아 병무에 힘쓰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장차 왜란에 대비하는 등 선견지명을 지녔던 분이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장공은 5월 7일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각 진의 여러 장수와 함께 왜수군의 서진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출병, 맨 앞에서 정예군을 통솔하면서 영등만호 우치적 옥포만호 이운룡 등과 함께 판옥선을 몰고 거제도 송미포 앞 바다인 옥포에서 일본수군과 최초의 해전을 펼쳐 26척을 격파하고 이어 합포와 적진포 등지에서 다시 16척을 불사름으로써 모두 40여척의 적선을 대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걸출한 지휘관이 없으면 우수한 수군 편제와 전함 화포도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세계 해전사에서 알수 있듯이 한백록 장군은 뛰어난 전술과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 수군을 격멸했던 것이다. 이 후 잠시 부산첨사로 제수됐다가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선조 25년(1592) 7월 17일 남해군 미조항 전투에서 충장공은 적의 예봉이 꺾이고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안타깝게 적의 유탄을 맞고 숨졌다.

충장공은 사후 공의 노복이었던 득충에 의해 고향인 춘천 선영에 묻혔다.

그러나 충장공에 대한 국가의 포장은 상당한 시일에 걸쳐 이뤄져 후손들은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후 13년이 지난 1605년 충장공은 선무이등에 책록되었고, 이후 23년이 지난 인조 6년(1628)에 '가선대부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로 증직됐고, 영조(1751년) 때에 이르러서야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이후 후손인 한후유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순조 8년(1808)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올랐고, 4년 뒤인 1811년 6월 19일 임금으로부터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받았다.
 
충장공의 기개와 애국심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강원인이란 자긍심을 다시 한번 재확인시켜 준 표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유주현 joohyu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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