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28562
* "임진왜란 해전사 - 6. 거북선과 수군 장수들"에서 "3. 수군의 영웅들"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문과 출신으로(-_-;) 임란 당시 순천 부사였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책사 스타일로 나오듯 뭔가 다른 면모가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사천 해전에서 활로 적장을 쏘기도 하는 등의 활약을 보입니다. 당시 전라좌수영의 중심은 순천부였고 권준의 역할은 그만큼 컸을 것입니다. 전투에서야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 보급을 담당하는 건 순천부의 영향이 컸으니까요.
임진왜란 당시 흥양 현감으로 있었으며 역시 이순신이 아끼던 무장입니다. 임란 당시 전부장으로 큰 공을 세웠고, 이전 글에 썼듯 한산도 대첩에서 16급의 수급을 베며 맹활약합니다. 96년 장흥부사가 되었다가 정유재란 당시 조방장으로 참전했다고 하는데... 이 때 칠천량에서 원균이 도망가고 이억기, 최호가 전사하자 홀로 적의 진격을 저지시켰다고 하는데 이건 가문 기록인 듯 합니다. 칠천량 당시에는 감기로 인해 참전을 못 했다고 하는군요.
4) 어영담
임란 당시 광양 현감으로 경상도 출신에 여도 만호 때의 경험을 통해 물길에 밝았다고 합니다. 한산도 대첩 당시 유인을 맡은 함대를 어영담이 이끈 것으로 보이며, 비리에 휘말려 광양 현감직에서 잘렸을 때 이순신이 그가 유임해 주기를 바라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이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순신이 "죄도 아닌 일에 걸리어" "백성들이 마치 부모를 잃어 버린 것 같은데"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정말 잘못 해서 파직된 건 아닌 듯 하며 이 장계에서 어영담에 대한 칭찬이 자자합니다. 후에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2차 당항포 해전을 지휘했습니다만... 94년 전염병이 돌 때 안타깝게도 병사합니다.
방답 첨사로 이순신과는 동명이인입니다. 이름도 비슷한만큼 상당히 꼿꼿하고 강직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목 베는 것 대신에 적선 깨는 것을 1등 공신으로 삼겠다"는 방침을 제대로 따른 유일한 인물로 장계에서 특히 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산도 대첩 때 다른 장수의 경우 10급이 넘는 목을 베면서도 적 한 척을 잡는 정도였는데 이순신은 목은 4개밖에 못 베었지만 3척을 깨뜨렸다고 하죠.
이순신이 "나의 후계"라고 말했다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죠. 출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순신이 북방에 있을 때 그를 보좌한 군관이었다고 하며, 임란 당시 옥포 만호였습니다. 원균이 도망가려고 하자 도움을 청하자고 하며 이를 말렸다고 합니다. 배가 한 척밖에 없었다 하지만 많은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이며 96년에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오릅니다. 이후 선무공신 3등에 오르기도 하며 1605년 통제사의 자리에 오르기도 합니다.
너무 많으니 우치적까지만 하기로 하죠. - -; 우치적이 특이한 것이, 임란 당시 20대 정도로 만호직에 오를 인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가문 기록에는 그가 의병장 출신이라고 하는 것 등으로 보아 경상우수영이 붕괴될 때 의병을 일으켜 도왔거나 그냥 군관 수준이던 것을 영등포의 가장으로 앉혀서 만호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한 거죠.
10) 그 밖에 장수들
11) 가문 기록의 신빙성
* "임진왜란 해전사 - 6. 거북선과 수군 장수들"에서 "3. 수군의 영웅들"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조선 수군의 영웅들
1) 정운
임란 당시 녹도만호에 임명돼 있었습니다. 임란 발발 직후 장수들이 모였을 때 신호가 머뭇거리자 "영남이고 호남이고 다 우리 땅인데 당연히 도와야 된다"면서 강경론을 주장하죠. 출동 당시 후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순신이 많이 의지했던 장수로 보입니다만... 부산포 해전에서 안타깝게 전사하죠. 이순신은 이를 슬퍼하며 이전에 전사한 전 녹도만호 이대원의 사당에 배향해 주기를 청 합니다.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죠. 다음은 그 중 일부입니다.
[녹도 만호 정 운은 맡은 직책에 정성을 다하였고, 겸하여 담략이 있어서 서로 의논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변이 일어난 이래 의기를 일으켜 나라를 위해서 제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을 지키는 일에 힘쓰기를 오히려 전보다 배나 더하므로 신이 믿는 사람은 오직 정 운 등 2ㆍ3명이었습니다. 세 번 승첩시에는 언제나 앞장서서 나갔으며, 이번 부산 싸움에서도, 몸을 던져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입하였습니다. 하루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자주 힘을 다하여 할을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를 못하였는 바, 이는 정 운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돌아나올 무렵에 그는 철환을 맞아 전사하였는바, 그 늠름한 기운과 순결한 정신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뒤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못한다면 참으로 뼈아픈 일입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야 "이순신은 소극적이었고 정운은 적극적이어서 원균이랑 더 친했다"고 합니다만 그럴 리가요. 난중일기에도 정운을 불러서 얘기하는 부분이 있고 당시 있던 다른 장수들과 함께 "다 같이 분통해 하는 것을 보아 다들 의사라 할 만하다"고 평가했었습니다.
2) 권준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문과 출신으로(-_-;) 임란 당시 순천 부사였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책사 스타일로 나오듯 뭔가 다른 면모가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사천 해전에서 활로 적장을 쏘기도 하는 등의 활약을 보입니다. 당시 전라좌수영의 중심은 순천부였고 권준의 역할은 그만큼 컸을 것입니다. 전투에서야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 보급을 담당하는 건 순천부의 영향이 컸으니까요.
원균에 이어 경상우수사가 될 정도로 공을 인정받았고, 이순신이 파직되자 역시 사직합니다. 97년 2월 나주목사가 되었다가 칠천량해전 후 충청수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선무공신 3등으로 올랐습니다.
3) 배흥립
임진왜란 당시 흥양 현감으로 있었으며 역시 이순신이 아끼던 무장입니다. 임란 당시 전부장으로 큰 공을 세웠고, 이전 글에 썼듯 한산도 대첩에서 16급의 수급을 베며 맹활약합니다. 96년 장흥부사가 되었다가 정유재란 당시 조방장으로 참전했다고 하는데... 이 때 칠천량에서 원균이 도망가고 이억기, 최호가 전사하자 홀로 적의 진격을 저지시켰다고 하는데 이건 가문 기록인 듯 합니다. 칠천량 당시에는 감기로 인해 참전을 못 했다고 하는군요.
이후 반전이 있는데... 명량 해전에 참전했지만 초반에 다른 배들과 같이 뒤로 물러납니다. -_-; 그래도 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순신이 버티자 다른 배들과 함께 다시 와서 지원한 걸로 보이며 후에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등의 자리에 오릅니다.
김완과 묶이는 경우가 많은데 둘 다 임란 당시의 맹장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정유재란 때도 몇 안 남은 수군 고참 장수로서 활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4) 어영담
임란 당시 광양 현감으로 경상도 출신에 여도 만호 때의 경험을 통해 물길에 밝았다고 합니다. 한산도 대첩 당시 유인을 맡은 함대를 어영담이 이끈 것으로 보이며, 비리에 휘말려 광양 현감직에서 잘렸을 때 이순신이 그가 유임해 주기를 바라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이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순신이 "죄도 아닌 일에 걸리어" "백성들이 마치 부모를 잃어 버린 것 같은데"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정말 잘못 해서 파직된 건 아닌 듯 하며 이 장계에서 어영담에 대한 칭찬이 자자합니다. 후에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2차 당항포 해전을 지휘했습니다만... 94년 전염병이 돌 때 안타깝게도 병사합니다.
그런데 한국역대 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서는 정유재란 때도 활약한 것으로 나오네요. 뭐죠 이거 ( ..) 아무튼 그가 선무공신에 오르지 못 한 것을 백성들이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5) 이순신
방답 첨사로 이순신과는 동명이인입니다. 이름도 비슷한만큼 상당히 꼿꼿하고 강직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목 베는 것 대신에 적선 깨는 것을 1등 공신으로 삼겠다"는 방침을 제대로 따른 유일한 인물로 장계에서 특히 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산도 대첩 때 다른 장수의 경우 10급이 넘는 목을 베면서도 적 한 척을 잡는 정도였는데 이순신은 목은 4개밖에 못 베었지만 3척을 깨뜨렸다고 하죠.
하지만 조정에서는 수급으로 공을 따졌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당상관에 올랐는데도 그에 대해서는 상이 제대로 내려지지 않았고, 이순신이 직접 장계로 다시 건의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통했는지 임진년 이후 충청수사에 오르는 등 상당한 승진을 하며 이 때 군율을 지나치게 적용한다며 탄핵 당해서 고령진첨사로 강등되기도 합니다. -_-; 정유재란 이후 이순신의 추천으로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고 명량해전 이후 흥양에서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오르기도 합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 수군을 수습했다고 알려진 인물 중 하나로 이후 이순신의 뒤를 이어 통제사에 천거됩니다.
... 이순신이 이순신을 이순신이 이순신을... 후에 선무공신 3등에 오르고 무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습니다. 충무공 이순신과 구분하기 위해 무의공 이순신, 입부(호) 이순신, 방답첨사 이순신으로 부르죠.
권준, 어영담, 정운, 이순신, 배흥립은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는 바"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이순신이 믿었던 이들이었습니다.
6) 김완
사도 첨사로서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지만 평가는 좀 박했죠. 임란 전에 각 관포를 검사했을 때 김완만 성적이 안 좋았거든요. 거기다 제대로 조사 안 하고 허위 보고 한 듯 하네요. -_-; 그 때문인지 수사 바로 밑인 첨사였는데도 척후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래도 용맹만은 확실해서 한산도 대첩에서 왜장과 일기토를 벌여서 이겼다고 하죠.
칠천량 해전 때 조방장으로 유군을 통솔하면서 선봉에 있었는데 적에게 배를 뺏기고 물에 빠져서 포로가 됩니다. 이 때 김완이 진술한 "해소실기"가 칠천량 해전의 전말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죠. 일본으로 압송됐다가 탈출해 귀국하는 엄청난 일을 벌였으며 함안군수가 되었지만 해소실기에서 원균을 신나게 까면서 중용되지 못 한 듯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칠천량 해전 때 적과 맞서 싸운 정말 몇 안 되는 조선 장수인 거죠.
7) 나대용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공식 기록에서 그건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하네요. 임란 당시 훈련원 봉사로 별다른 직책이 없었고, 이순신의 심복 중 하나였는데도 딱히 승진을 못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후 판옥선의 최소 인원이 125명이라는 걸 밝힌 사람이고 거북선을 작게 만든, 배에 창을 꽂았다는 창선을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용으로밖에 못 쓴 듯 하네요. 후에는 해추선이라는 쾌속선을 발명했습니다. 아마 이런 것 때문에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게 아닐까 싶네요.
8) 이운룡
이순신이 "나의 후계"라고 말했다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죠. 출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순신이 북방에 있을 때 그를 보좌한 군관이었다고 하며, 임란 당시 옥포 만호였습니다. 원균이 도망가려고 하자 도움을 청하자고 하며 이를 말렸다고 합니다. 배가 한 척밖에 없었다 하지만 많은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이며 96년에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오릅니다. 이후 선무공신 3등에 오르기도 하며 1605년 통제사의 자리에 오르기도 합니다.
9) 우치적
너무 많으니 우치적까지만 하기로 하죠. - -; 우치적이 특이한 것이, 임란 당시 20대 정도로 만호직에 오를 인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가문 기록에는 그가 의병장 출신이라고 하는 것 등으로 보아 경상우수영이 붕괴될 때 의병을 일으켜 도왔거나 그냥 군관 수준이던 것을 영등포의 가장으로 앉혀서 만호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한 거죠.
이운룡과 함께 경상우수군 중에서 큰 활약을 했고, 96년 순천부사직에 오릅니다. 칠천량 해전 당시 도망갔다가 이순신에게 갔는데, 이 때 무슨 대화를 했을지 모르겠네요. 원균의 지원을 크게 받은 장수로 순천부사에 오른 것 역시 이순신 견제용이었을텐데요.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영남을 강조했지만 이순신-원균 사이에서 치인 장수로 치면 우치적만한 장수가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영남을 강조했지만 이순신-원균 사이에서 치인 장수로 치면 우치적만한 장수가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10) 그 밖에 장수들
사실 장수로만 따지면 끝이 없습니다. 돌격장으로 거북선에 탄 걸로 유명한 이언량이 있으며(그만큼 힘이 없었다는 얘기지만 - -;)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원균에게 맨날 당하면서 이순신에게 의지했던 이영남이 있습니다. 원균과 함께 목 베기를 잘 해서 선무공신 3등에 오른 기효근도 있죠. -_-;
그 외에도 정유재란 수군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경상우수사 배설, 거제현령 안위 등이 있습니다만... 이에 대한 설명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그저 이순신은 혼자 싸운 게 아니라는 것, 그와 함께 싸운 장수들의 열전을 조금씩 다뤄 보았다고 생각해 주시면 될 거 같구요.
11) 가문 기록의 신빙성
여기서 중요한 게 가문 기록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운룡이 한산도 대첩 때 유인책을 처음 주장했고 실행했다고 하는 거나 나대용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것, 기타 여러 가지 전공에서 허구가 많이 드러나죠. 김경진님의 말을 빌리면 한산도 대첩에서 열 명이 넘는 장수들이 각기 유인작전을 벌였고 각기 백 척씩 깨뜨렸다 (...) 는 결론이 나온다는군요. 당장 위에 적은 내용에서도 모순점들이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어영담이 노량해전에서 나왔다는 건 대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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