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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노 선비족을 굴복시킨 고구려의 명장   


군사강국 고구려에는 부분노, 명림답부,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 뛰어난 지략을 가진 명장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 부분노(扶芬奴, ?~?)는 선비(鮮卑)를 지혜로서 굴복시킨 고구려 초기를 대표하는 명장이었다.

고구려 건국의 공신 부분노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기원전 37〜19)은 부여에서 오이, 마리, 협부 세 사람과 함께 탈출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에 모둔곡 출신 재사, 무골, 묵거 세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졸본 땅에 와서 소서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 건국 공신으로 기록된 인물 가운데 부분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동명왕편]에는 그가 고구려 건국초기부터 추모왕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건국한 다음해(기원전 36년)에 추모왕은 이웃한 비류국을 정벌하게 되었다. 역사가 오랜 비류국이 고구려를 얕보자, 추모왕은 고구려가 새로 건국되었기에 고각(鼓角-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는 북)의 위의(威儀- 위엄과 예법에 맞는 모습)가 없는 탓이라고 여기고 이를 걱정했다. 그러자 부분노는 자신이 비류국이 감추어둔 고각을 가져오겠다는 계책을 세워, 그를 비롯한 세 사람이 직접 비류국에 가서 고각을 가져왔다. 이 일을 통해 볼 때 부분노는 지략과 용기가 뛰어나고, 첩보활동에 능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추모왕 6년(기원전 32년)에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는 기록에 부분노가 처음 등장한다.

그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으며,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 초기부터 장군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아울러 추모왕 10년 북옥저를 쳐서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부위염(扶尉厭. ?~?)과는 이름의 유사성으로 볼 때 일정한 친인척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더 이상의 관련성은 확인할 수가 없다.

선비족을 정벌할 계책을 세우다
 
기원전 9년의 어느 날, 고구려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은 왕위에 오른 지 11년이 되었지만,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명왕이 왕위에 오른 후 고구려는 매우 혼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은 다음 왕위를 장남인 유리명왕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제2왕후 소서노는 자신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크게 실망했다. 마침내 소서노 세력은 고구려를 떠나고 말았다. 그 결과 고구려의 힘은 크게 약해졌다.

추모왕 시기 비류국을 통합하고, 행인국, 북옥저 등을 점령하며 팽창하던 고구려의 발전에 급제동이 걸린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 시기의 고구려는 이웃 나라들에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유리명왕은 신하들에게 고구려가 당면한 문제를 이야기 했다. 
“선비(鮮卑)는 자신들이 험한 곳에 산다고 믿고서 우리와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서 우리의 변방 지역을 수시로 노략질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면 숨어서 나오지 않는 바람에 제대로 그들을 물리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큰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그들을 누가 물리칠 수 있겠느냐. 그들을 물리치는 자에게 내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

선비는 흉노(匈奴)에게 패하여 흩어진 동호(東胡)의 후예다. 이때 고구려와 만난 선비가 전체 선비족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구려에게 큰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이때 부분노가 나섰다. 
“대왕이시여. 선비의 군사들은 용맹하여 힘으로 싸워 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리석으니 우리가 꾀로 싸운다면 항복 받기 쉬울 것입니다.”

유리명왕이 부분노의 말을 듣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꾀로 이길 수가 있겠느냐?”

부분노의 전략
 
부분노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사람을 시켜서 반간(反間)의 계책으로 저들 속에 들어가게 합니다. 거짓으로 고구려는 땅이 작고 군사가 약하여 선비를 겁내어 움직이기를 싫어한다고 말하게 합니다. 그러면 선비는 반드시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방비를 소홀히 할 것입니다. 이런 후에 제가 정예 병사를 이끌고 샛길로 가서 산 속에 숨어 선비의 성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때에 대왕께서 약한 병사들을 이끌고 그 성 앞에 나타나 적을 공격하게 되면, 선비는 우리를 얕잡아 보고 반드시 성을 비워놓고 쫓아 나올 것입니다. 그럴 때 제가 이끄는 정예 병사로 비어 있는 성을 차지하겠사오니, 왕께서는 친히 용감한 기병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하십시오. 이렇게 되면 적은 앞과 뒤에서 공격당하게 되니, 분명히 우리가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첩보술에 능한 부분노
 
유리명왕은 부분노의 작전을 따라 실행에 옮기로 결정했다.

먼저 거짓 간첩(반간)을 선비에 가서 살게 하면서, 고구려가 선비를 겁내고 있다는 소문부터 냈다. 그 결과 선비는 고구려를 차츰 무시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선비가 고구려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음이 확인되자, 유리명왕은 선비를 공격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군사를 출동시켰다.

부분노의 반간계(反間計)가 성공한 것이다. 반간이란 적의 첩자를 이용하여 거짓 정보를 적에게 흘리게 함으로써 우리 측의 뜻에 따르도록 적을 유도하는 첩자의 한 유형이자 첩보 행위이다. 이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첩자 전문이론인 <용간(用間)> 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른 첩자 활용술이기도 하다.

부분노는 비류국을 정벌하는 과정에서도 적진에 침투해 적의 귀중한 물건을 빼내올 만큼 첩자의 유용성을 잘 알고 첩보술(諜報術)에 능한 인물이었다.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환경에 놓여있던 당시의 고구려로서는 외국의 정보를 빨리 얻고, 이를 제대로 이용할 줄 알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부분노 이후로 고구려는 첩보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선비의 성을 점령하다


선비는 기마병을 이용한 약탈에 익숙했다. 그들은 말 타는 솜씨, 활솜씨를 기반으로 적을 치고 빠지는 작전에 익숙해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리명왕은 친히 기병을 거느리고 선비의 성을 공격했다. 선비는 고구려 군대를 우습게 여기고 성문을 열고 군사를 내보내 쫓아왔다. 반간계의 성공이었다. 선비의 군사들이 성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던 고구려로서는 험준한 곳에 의지한 그들의 성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명왕의 군사들은 싸움에 지는 척하며 후퇴를 했고, 선비의 군사들은 성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다.

이때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부분노가 이끄는 군사들이 텅 빈 선비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버렸다. 유리명왕의 군대를 쫓던 선비의 군사들은 성이 함락된 것을 보자, 크게 놀라 되돌아서 성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성은 부분노가 이끄는 고구려 군사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데다, 부분노의 고구려군은 성에 의지하여 되돌아오는 선비의 군사들과 맞서 싸워 적들을 많이 물리쳤다. 또한 유리명왕의 기병대가 북을 울리며 뒤에서 선비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선비는 꼼짝없이 앞과 뒤에서 고구려군에게 공격을 받는 꼴이 되었다. 결국 힘이 다하고, 달리 계책을 낼 수도 없던 선비는 고구려에 항복하고 속민(屬民)이 되었다.

[후한서]〈제동(祭彤)-채융(祭肜)이라고도 함〉전(傳)에는 서기 49년 요동태수였던 제동이 고구려의 속민인 선비족 만리(滿離) 집단에게 재물로써 꾀어 고구려에서 이탈하게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보건대 고구려가 선비족을 약 58년간 지배했었음을 알 수 있다.

병법의 대가 부분노
 
부분노가 선비 공략에 사용한 전략을 요약하면 “산 속에 숨은 범을 반간계로 유인하여 높은 지붕으로 유인한 뒤 사다리를 치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널리 알려진 [삼십육계(三十六計)] 병법(兵法)의 15계인 조호리산(調虎離山)과 28계인 상옥추제(上屋抽梯), 33계인 반간계를 합친 계책이라고 할 수 있다.

조호리산이란 산 속에서 범을 끌어내는 작전이다. 선비는 기마병을 이용한 약탈에 익숙했던 무리였다. 적을 치고 빠지는 작전에 익숙한 선비는 산 속에 숨은 호랑이, 산적과도 같은 무리였다. 산 속에서는 범을 잡을 수 없다면, 산 속에서 범을 끌어내어야 한다. 끌어내기 위해서는 적을 속여 적을 유혹해 내는 일이 필요하다. 적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공격해오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험준한 지형과 성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능력이 뛰어난 선비족을 성에서 나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노는 그들이 고구려를 얕잡아 보도록 하는 작전이 필요함을 알고 반간계를 활용했던 것이다.

상옥추제란 적으로 하여금 사지(死地)에 빠지게 한 후, 구원의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작전이다. 즉 고의로 약점을 노출시켜 적을 우리 진영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적의 응원부대를 차단하여 적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적은 판단착오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 작전의 실행은 유리명왕이 맡았다. 의도적으로 약점을 노출시켜 선비로 하여금 고구려군을 쫓아 성을 빠져 나오게 했던 것이다. 성에서 나온 선비의 군사들은 곧 지붕 위에 올라간 셈이었다. 그리고 부분노가 저들의 성을 차지함으로써, 그들이 지붕에서 내려올 사다리를 치운 셈이 되었다.

이렇듯 부분노의 선비 정벌은 여러 계책이 혼합된 수준 높은 작전에 따라 이루어졌다. [삼십육계]는 빨라야 서기 5세기에 만들어진 중국의 병법서다. 하지만 부분노는 그보다 훨씬 앞서 이 책에 기록될 만한 병법들을 혼합하여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용맹한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지략가였던 것이다.

공을 세우고도 자신을 낮추다
 
부분노의 활약 덕분에 고구려는 외적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다시 성장할 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유리명왕은 그의 공을 생각해 식읍(食邑)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부분노는 “이것은 왕의 공덕입니다. 신하인 제가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하며 사양했다. 그러자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하사해주었다. 부분노는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미덕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동명왕편]; [삼십육계]; [손자병법]; 김영수, [역사를 움직인 첩자], 김영사, 2006년.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그림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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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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