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86802

근초고왕이 소금장수 출신? 그건 미천왕이지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1 드라마 <근초고왕>, 일곱 번째 이야기
10.12.02 14:41 l 최종 업데이트 10.12.02 14:41 l 김종성(qqqkim2000)

▲  KBS1 드라마 <근초고왕>. ⓒ KBS

'백제판 광개토대왕'이라 불릴 만한 백제사의 영웅, 근초고왕. 그의 일대기를 다루는 KBS1 <근초고왕>에서는 왕자 시절의 근초고왕(감우성 분)을 소금장수로 설정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하층민 복장을 한 모습이 영화 <왕의 남자>의 장생을 꼭 빼닮다. 이때의 근초고왕은 훗날 왕이 될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젊은 나날을 보냈다.

드라마 속에서 비류왕(윤승원 분)의 넷째아들인 근초고왕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견제를 받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금장수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똑똑한 제4왕자가 태자(이종수 분)의 앞날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궐 밖으로 내몰린 근초고왕은 소금을 짊어지고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게 됐다. 그러다가도 나라가 위급할 때면 소금 대신 칼을 '짊어지고' 현장에 뛰어들어 '한 건씩' 해내곤 했다. 그런 '마일리지'가 쌓이고 쌓여 가면서 근초고왕이 왕권에 다가섰다는 것이 드라마 <근초고왕>의 이야기다. 

물론 근초고왕이 실제로 소금장수를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는 그런 설정에 개연성을 부여하고자 나름대로 논리구조를 제시했다. 일반 왕자가 태자를 제치고 왕이 되었다면 태자보다 능력이 훨씬 더 좋았을 것이고, 태자보다 능력이 좋았다면 주변 사람들의 견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견제를 받았다면 어려서부터 갖은 고생을 했을 것이라는 논리가 드라마 저변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 태자 중심의 후계구도를 위협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으므로 소금장수 생활에 비견되는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근초고왕은 소금장수 출신'이라는 설정을 뒷받침하는 논리구조는, 왕자 시절의 근초고왕이 태자 중심의 후계구도에 장애가 될 정도로 출중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드라마 <근초고왕>의 논리구조는 과연 그럴싸한 것인가? 비류왕(재위 304~344년) 시대의 후계구도가 어떠했는지, 왕자 시절의 근초고왕이 정말로 아버지의 후계구도에 장애가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그러면 드라마 <근초고왕>의 논리구조가 타당한지 여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백제 비류왕 때에 축조된 저수지 둑인 전북 김제의 벽골제. <삼국사기>에서는 서기 330년에 신라 흘해왕이 벽골제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김제는 백제에 의해 점유되었으므로 벽골제를 만든 실제 임금은 비류왕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 문화재지리정보서비스

'임금이 있으면 후계자도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관념은 주로 조선 시대 사극 때문에 생긴 것이다. 최근 종영된 MBC <동이>에서 숙종(지진희 분)이 세 살짜리 왕자 이윤(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것처럼, 조선 시대의 임금들은 가급적 빨리 자신의 후계구도를 매듭지으려 했다. 

그렇지만, 백제는 달랐다. 백제의 왕들은 후계구도를 조기에 정착시키지 않았다. 물론 조기에 태자를 책봉한 왕들도 있었다. 등극 2년 내에 후계자를 지명한 침류왕·아신왕·문주왕이 그 예에 속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비교적 소수에 속했다. 

그 외 대부분의 백제왕들은 집권 후반기에 후계자를 세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임자를 뽑지 않았다. 예컨대, 온조왕은 등극 27년 뒤에, 근초고왕은 등극 23년 뒤에, 무왕은 등극 32년 뒤에야 비로소 태자를 지명했다. 한편, 무려 53년간이나 재위한 고이왕은 재위기간 내내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에야 책계왕이 '태자'가 아닌 '일반 왕자'의 지위에서 왕위를 계승했을 뿐이다. 

근초고왕의 아버지인 비류왕도 마찬가지였다. 비류왕 역시 무려 40년간이나 장기 집권을 했지만, 그는 재위기간 내내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삼국사기> '비류왕 본기'에 따르면, 비류왕 집권기에는 중요한 정치변동이 총 4차례 있었다. 재위 9년에 해구(解仇)가 병관좌평(국방장관)에 오른 일, 재위 18년에 우복(優福)이 내신좌평(비서실장)에 오른 일, 재위 24년에 우복이 쿠데타를 일으킨 일, 재위 30년에 진의(眞義)가 내신좌평에 오른 일이 그것이다. 

이렇게 4차례의 정치적 고비를 거치는 동안, 비류왕은 후계구도를 띄우지 않았다. 드라마 속의 비류왕은 장남 중심의 후계구도를 조기에 정착시키는 한편 장남에게 걸림돌이 되는 왕자 시절의 근초고왕을 궐 밖으로 내쳤지만, 실제의 비류왕은 후계구도가 미정인 상태에서 40년간의 집권을 마치고 죽었다.   

태자를 세우지 않고도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한 왕들이 많은 점을 보면, 이 시대의 정치 메커니즘이 조선시대의 그것과 상당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후계구도의 조기 정착이 필수적이었지만, 백제 때만 해도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왕자 시절의 근초고왕이 태자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왕궁에서 쫓겨나 소금장수 생활에 비견되는 고난을 겪었을 개연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소금장수 아니라 다른 어떤 직업을 설정한다 해도, 왕자 시절의 근초고왕이 그처럼 험난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할 만한 '건더기'가 별로 없는 것이다. 


▲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의 백제시대 고분. 지하철 5호선 방이역 인근에 있다. ⓒ 김종성

그렇다고 해서 근초고왕의 인생에 시련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대권가도에는 크게 2가지의 장애물이 있었다. 

하나는, 큰형과의 경쟁이었다. 드라마에서는 그가 비류왕의 넷째아들이라고 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그가 둘째아들이라고 했다. 제4왕자건 제2왕자건 간에 큰형을 제치고 왕이 되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큰형과의 경쟁을 겪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비류왕이 죽은 뒤에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는 계왕(재위 344~346년)과의 경쟁이다. 비류왕이 죽은 뒤에 그 뒤를 이은 것은 그 아들들이 아니라 왕실 일원인 계왕이었다. 이렇게 빼앗긴 왕권을 되찾아온 것이 바로 근초고왕이었다. 빼앗긴 왕권을 불과 2년 만에 되찾은 점을 볼 때, 이 과정에서 근초고왕이 대단한 고난과 투쟁을 겪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왕자 시절의 근초고왕이 겪은 시련은 큰형과의 경쟁과 계왕과의 투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삶에서, 백제와 중국을 오가며 소금을 짊어지고 다니는 시련 같은 것은 존재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한국 고대사에서, 임금이 되기 전에 실제로 소금장수 생활을 해본 인물이 있었다. 고구려 미천왕(재위 300~331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근초고왕보다 약간 빨리 등극한 임금이다. 고구려 서천왕(재위 270~292년)의 손자인 미천왕은 삼촌인 봉상왕(292~300년)의 박해를 피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한 적이 있다. 

그렇게 '미천'한 생활을 하다가 왕이 됐기 때문에 미천왕이라 불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예전에 어느 잡지의 칼럼에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다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미천왕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가벼운 에세이 형식의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였던 모양이다. 

미천왕이 그렇게 불린 것은 그가 한때 미천해서가 아니라 죽은 뒤에 미천(美川)이라는 벌판에 묻혔기 때문이다. 미천한 출신이라 미천왕이라 했나 싶을 정도의 착각이 들 정도로, 미천왕이야말로 하층민의 삶을 거쳐 고생 끝에 왕위에 오른 전형적인 인물이다. 

만약 근초고왕도 그런 하층민의 삶을 거쳐 왕이 되었다면, 역사가들은 그 사실을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사실관계는 숨기거나 왜곡해도, 그런 사실만큼은 가급적 드러내려 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총선거나 지방의원선거가 끝나면 학력이 매우 낮은 당선자들이 입지전적 성공의 사례로 주목을 받는 것처럼, 역사가들도 역사 속 인물의 입지전적 성공에 호기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박정희·김대중·노무현·이명박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두고두고 관심거리가 될 만한 인물들이다. 빈농·소작농·서민 출신 혹은 회사원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먼 훗날의 역사책이나 이야기책에서도 계속해서 화제가 될 만한 소재다. 

먼 훗날의 역사가들은 '대한민국 시대에는 왜 그처럼 서민 출신 대통령이 많았을까?' 하고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들은 "그런데도 그 시대의 서민 대통령들 중에 반(反)서민적 경제정책을 시행한 인물들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 미천왕이나 대한민국 대통령들처럼 서민의 삶을 겪었을 개연성이 매우 희박하다. 후계구도가 정착되지 않은 비류왕 시대의 정치상황 속에서, 그가 후계자인 장남의 지위를 위협한다 하여 궐 밖으로 쫓겨났다고 상상할 만한 개연성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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