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78100
편파적인 김부식, 백제사가 이게 뭐야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1 드라마 <근초고왕>, 세 번째 이야기
10.11.15 12:02 l 최종 업데이트 10.11.16 10:27 l 김종성(qqqkim2000)
▲ KBS1 드라마 <근초고왕>. ⓒ KBS
KBS1 드라마 <근초고왕>의 주인공인 백제 근초고왕(감우성 분)은 '고대왕국 백제의 기틀을 확립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특히 영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북쪽으로는 고구려 영토 일부를 점령하고 남쪽으로는 마한 지역을 복속시킴으로써 백제의 영역을 남과 북으로 팽창시켜놓은 것이다.
영토 팽창과 관련한 근초고왕의 업적은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실제 업적이 한 눈에 얼른 들어오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렇다고 <삼국사기>가 그의 업적을 일부러 감추었다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독자들이 그의 실제 성적표를 쉽게 인식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초고왕은 황해도 재령에 수도를 두었다
<삼국사기>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업적 중 하나는, 근초고왕이 북진정책의 결과로 황해도에 도읍을 둔 사실이다. 흔히들 역대 백제의 수도 가운데에 한성(서울)이 최북단에 있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북쪽인 황해도에도 백제의 도읍이 존재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에 단서가 되는 사건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까지 백제의 수도는 한성, 즉 지금의 서울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때는 근초고왕 26년 10월(371.10.25~11.23)이다.
<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 "(재위) 26년 겨울, 근초고왕이 태자와 더불어 정병 3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써 싸우며 막았으나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근초고왕이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고,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 편: "제13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도읍을 한성(漢城)으로 삼았다."
이 기록을 검토하기에 앞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위의 '지리지'에 나오는 '남평양'이란 지명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위의 '지리지'를 읽다 보면 '남평양이 한성 즉 서울이 아니었나?'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한성을 최초로 점령한 때는 장수왕 63년 9월(475.10.16~11.13)이었다. 근초고왕이 남평양을 함락한 때로부터 100여 년 뒤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근초고왕이 점령한 '고구려 남평양'은 한성, 즉 지금의 서울일 수가 없는 것이다.
실학자 박지원은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 '도강록' 편에서, 평안도뿐만 아니라 요동(만주)에도 고구려의 평양이 있었다고 했다.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똑같이 말했다. 고구려의 북평양은 만주에 있었고 남평양은 지금의 평안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서울이 남평양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근초고왕 본기'에서는 서기 371년 10월 혹은 11월에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을 함락한 뒤에 '한산'으로 천도했다고 했고, '지리지' 백제 편에서는 이 '한산'이 '한성'을 가리킨다고 확인해 주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백제의 수도는 한성이었다. 한성에 도읍을 둔 백제가 평양을 함락한 뒤에 한성에 도읍을 두었다니,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새로 천도한 한성이 경기도 광주 지방 같은 곳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놓고 바로 옆으로 천도했다는 것은 어딘가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평양성을 함락했으면 한성에서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가?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 이게 가능한 이유
▲ A는 평양, B는 재령을 가리킨다. ⓒ 김종성
이 문제는, <삼국사기> 안에서 '한성'이란 지명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자연스레 풀리게 된다. <삼국사기> 속의 '한성'은 지금의 서울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황해도 재령(옛 중반군)을 가리키는 지명으로도 사용되었다. <삼국사기> '경덕왕 본기'나 '지리지' 고구려 편에 나오는 한성은 황해도 재령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점을 본다면, 근초고왕이 평양을 함락한 뒤에 새로 천도한 곳은 황해도 재령이었다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근초고왕이 재령으로 천도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이곳이 한성으로도 불리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와 관련하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중반군(재령)의 다른 이름은 한성인데, 백제가 평양을 쳐서 깨뜨리고 북쪽으로 나아가 지금의 재령에 도읍을 두었다는 것이 사리에 부합"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한성에서 재령으로 도읍을 옮겼으면 '한성에서 재령으로 천도했다'는 식으로 기록해야지, 왜 하필이면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는 식으로 기록했을까?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지명(地名) 관념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붕괴시킨 한나라는 그곳에 한사군(漢四郡)이라고 통칭되는 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을 설치했다. 여기서 현도군(현토군)은 애초에 함경도 북부와 두만강 유역에 설치되었지만, 나중에는 북쪽인 송화강 유역으로 옮겨졌다.
오늘날의 이라크인들이 미군의 점령에 격렬히 저항하듯이 고조선 유민들도 그렇게 저항했기 때문에, 한나라가 현도군을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현도군과 나중의 현도군은 전혀 다른 곳이었지만, 한나라 사람들은 처음 것이나 나중 것이나 똑같이 현도군이라 불렀다.
서기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감내하기 힘들어지자, 676년에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처음의 안동도호부와 나중의 안동도호부는 전혀 다른 곳이었지만, 당나라 사람들은 양쪽 다 안동도호부라고 불렀다.
이런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고대 동아시아인들은 A라는 행정단위를 전혀 다른 새로운 지역으로 옮기는 경우에도, A의 설치목적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있거나 혹은 A와 관련된 정책의 연속성을 계속 이어나갈 필요가 있거나 또는 A를 폐지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체면 손상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그 '전혀 다른 새로운 지역'에 대해서도 A라는 지명을 부여하곤 했다.
▲ 훗날 근초고왕에게 평양을 빼앗기게 될 고구려 고국원왕(이종원 분). ⓒ KBS
이런 점들을 볼 때, 근초고왕 역시 황해도 재령으로 도읍을 옮길 때에 '한성'이란 도읍 명칭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대개 고대에는 도성을 옮기면 그 부근의 지명도 따라 옮겼다"라고 했다. A라는 도성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 A라는 도시 명칭만 옮긴 게 아니라 A에 있던 산이나 강의 이름도 함께 옮긴 예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 옮긴 재령에도 한성이니 한산이니 한강이니 하는 지명들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재령으로 천도할 때에 한성 이외의 명칭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성시대'의 정치적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명칭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에 <삼국사기> 안에서 재령이 한성이라고도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은둔의 나라가 아니었다
김부식이 백제에 대해 성의가 있는 인물 같았으면, 새로 천도한 한성이 종전의 한성이 아니라 황해도 재령이었다는 점을 <삼국사기> 안에 어떤 식으로든 표기해두었을 것이다. 그런 성의가 없으니,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는 기록만 달랑 남겨놓은 것이다. 김부식이 딱히 거짓말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아주 편파적으로 역사를 기록했다는 비판만큼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서기 371년에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인 뒤에 평양 가까이에 있는 황해도 재령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사실. 이것은 고대왕국 백제가 한반도 한쪽 귀퉁이에 처박혀 있었던 '은둔의 나라'가 아니라, 온 사방을 향해 적극적인 팽창을 시도한 활력적인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근초고왕이란 인물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대단한 업적을 이룩한 군주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 <근초고왕>이 신라 중심의 편향적 역사인식을 극복하고 근초고왕의 업적과 백제의 위상을 올바로 재조명해주기를 기대해본다. 이것은 단지 백제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의 이미지를 올바로 되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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