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8.htm
"발해유민의 재건운동 : 후발해와 대발해 (渤海遺民의 再建運動 : 後渤海와 大渤海)"글에서 "Ⅲ. 발해유민의 초기재건운동 - 2. 정안국(定安國)" 부분을 가져오고 한글로 좀 바꿨습니다.

정안국(定安國)

요 태종대(遼 太宗代)에는 여진, 철려(鐵驪), 말갈(靺鞨), 달로고(達盧古) 등이 순순히 공납을 하더니 목종(穆宗), 경종(景宗)시에 와서는 다만 여진과 철려만이 부정기적으로 공납하여 왔다. 이때 발해유민국인 정안국과 올야국(兀惹國)은 송과 통교하면서 거란에게는 완전히 적대시하고 있었다. 경종년간에 들어오면서 여진이 거란의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하자 발해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보령(保寧)7년(975) 발해인 황룡부위장 연파(黃龍府衛將 燕頗)가 거란에 반기를 들고 도독 장거(都監 張琚)를 죽였다. 이때 경종은 야율갈리필(耶律葛里必)을 보내어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도망하는 부중(部衆)을 추포치 못하고 회군하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거란은 점차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참인데 마침 중원을 통일한 송 태종이 여세를 몰아서 979年(太平興國 4년) 정월 친히 북한정벌을 나서서 곧 역주(易州, 현 河北徐水/하북서수) 및 탁주(涿州, 현 河北 涿縣/하북 탁현)을 점령하고 곧바로 유주(幽州)에 이르러 유주성을 포위공격하기 순일(旬日,10일)이 지났으나 발성(拔城)하지 못하고 진퇴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요의 대장 야율휴가(耶律休哥)가 북한을 도우려 진군해 왔었다. 이에 송요양군이 접전 끝에 송군이 고량하(高梁河, 현 年平西直門外)에서 대패하고 태종도 홀로 여거(驢車)를 타고 도돈중류시(逃遁中 流矢)에 맞아 겨우 목숨만 유지하는 곤경을 겪었다. 태종은 이 전역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시 한번 설욕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 뒤 송요의 변경에는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 하나 크게 진전은 없었다. 이때 요 경종이 붕어하고 경종 장자 성종(聖宗)이 12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송은 이것을 기회로 여겨서 요를 다시 정벌하려고 준비하였다. 이번에는 지난번의 쓰라린 경험을 되살려 철저한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 일환으로 대외교정책을 펴 나갔다. 먼저 요와 관계가 나쁜 고려와 정안국과 올야국과 결구(結構)하려고 노력하였다. 태종은 이들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북배(腹背)에서 공격을 하면 거란군의 세력분산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안국은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 거란의 국내사정으로 인하여 거란의 영향이 미치지 않고 있던 성역에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정변을 거듭하느라고 세력이 대단하지 못하였다. 송사에 의하면 본래 마한(馬韓)의 종족으로 거란에 공파(攻破)되어 그 추수(酋帥)가 남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서비(西鄙)에서 건국하고 개원(開元)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스스로 정안국(定安國)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강역(彊域)도 꽤 넓었던 것 같다. 이용범박사는 추정하기를,

그 강역은 옛 발해의 서경 압록부 아래쪽의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豊州), 정주(正州)의 압록강 유역의 3주와 북으로는 장령부(長嶺府) 즉 현재의 휘발하(輝發河) 상류의 산성자(山城子)까지를 포함하고 동으로는 당시까지 아직 거란군의 유린을 겪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던 함경도의 옛 발해의 남경과 동경을 포함한 간도 전역은 물론이거니와 그 북의 송화(松花), 목단(牧丹) 양강의 상류지역까지 포함된 후발해의 그것을 계승해 왔던 것으로 믿어진다.

고 하였다. 만약에 이와 같이 광대한 지역에 골고루 행정능력이 미치어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했더라면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구발해왕조의 부흥이란 생각이 변해져 갔다. 그리하여 후발해의 중심세력이었던 대씨가 쫓겨나고 열씨(烈氏)가 국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안국이란 나라를 세웠으나 열씨왕조(烈氏王朝)도 곧바로 권신인 오씨(烏氏)에 도전을 받았던지 얼마 안가서 오씨가 왕이 된다. 필자가 살펴 본 결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일로 보아 부흥운동이라기 보다는 이미 부흥된 후발해 위에서 왕권투쟁을 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첫째, 발해 멸망 후 꼭 일곱 해 뒤인 934년(후당 폐제 즉위년, 賜太宗 天顯,사태종 천현 9년)은 요 태종이 한창 후당의 정국변화에 관심을 쏟고 있던 때이므로 동북의 후발해 즈음은 염두에 없을 때인데 세자 대광현이 부중수만이나 인솔하고 고려에 투부했다는 것은 후발해내의 세력다툼에서 대씨일파의 실세로 보아지며,

둘째, 대광현이 고려에 투부한지 36년이 되는 970년(개보 3년)에 정안국왕 열만화(烈萬華)가 송에 표문을 보냈던 것으로 보아 지난번(934년) 대씨를 몰아 낸 세력이 열씨가 아니었나 생각되며, 또 973년(開寶 6年)에 송에 보낸 표문에는 국왕이 오현명(烏玄明)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열씨에서 오씨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후발해가 오대(五代)와의 교섭에서 발해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투부(投附)한 이듬해(935년)까지는 발해(발해는 이미 927년에 멸망되었음)라 칭해 왔는데 그 다음부터는 발해란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대송 교섭시는 아예 정안국으로 국호를 썼다. 그리고 남송열전에서도 열씨와 오씨의 정안국과 발해국을 별도로 다루었다.

장기적인 정권 싸움으로 국기(國基)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비록 영역은 넓다고 하나 정령(政令)이 고루 미치지 못하고 또 협심협력하지 못했던 관계로 그리 세력을 떨치지 못하고 말았다.

거란이 원래 의도한 최종목표는 중원진출에 있었다. 앞서 기술한 서정(西征), 동벌(東伐)은 그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태종이 하북진출에 성공한 나머지 발해여중공토(渤海餘衆攻討)는 중지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발해 옛 영역은 부흥세력이 자만할 수 있었다. 태종도 발해여중에 일격을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숙지하고 있었겠지만 이(利)가 큰 중원진출로 여가가 없었고, 또 귀로에 급사하고 말았으며, 그 뒤를 이은 세종, 목종, 경종은 재위기간이 짧고 또 위인이 정략이 없어 거란국세는 일시 ?削(산낙)된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자니 국가의 장원한 계책을 세워 추진해 나갈 수 없었다.

경종의 뒤를 이어 성종(聖宗)이 제위에 오르자 모후의 지극한 보살핌과 몇몇 보신들의 보좌로 즉위초부터 군국중사를 완급을 따라 하나씩 하나씩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중원땅에 53년간이나 혼국이 계속된 까닭으로 그 시기를 이용하여 한북(漠北)을 통일할 수 있었고, 또 석진(石晉)을 공멸하고 하북지방(河北地方) 깊숙히 진입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거란이 수대동안 정정이 불가한 틈에 송이 중원을 통일하고 그 여세가 한북까지 밀려와 석진때 요가 취득한 연운(燕雲) 16주 탈환을 시도하는 전쟁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 첫 번째인 979년 전(戰)에서는 고량하(高梁河)에서 가볍게 물리쳤지만 송태종이 재도(再圖)를 위해 거란의 배후에서 반요복흥국(叛遼復興國)을 이루고 있던 정안국과 올야국을 선동하고 출사시기를 정하는 등 자못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인후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거란으로서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는 상황에 왔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더 방관 못할 일은 고려의 태도였다. 발해멸망후 발해유중을 영입 하고 거란을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하여 이적시하고 교빙(交聘)하지 않았으며 석진 때 고려 태조가 서역승 말라(西域僧 襪囉)를 맞아 진고조(晋高祖)와 연합하여 거란정벌을 논의한 바 있었고 그 후 晋 출제때 진측에서 연합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으니 거란이 이런 움직임을 모를리 없었고 또 고려가 주, 송과 통교하여 빈번한 왕래가 이루어지자 고려정토가 급선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와는 조종이후상금(祖宗以後尙今)까지 직접충돌은 없었지만 충돌의 요소는 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송태종(宋太宗)이 고량하 대패이후 연려제료책(聯麗制遼策)을 강화하고 또 사신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출정을 재촉하는 등의 자세는 契거란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요는 먼저 송의 좌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려를 경략하여 송세력을 전제하고 그리고 송과 겨룰 작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통화원년(統和元年) 곧바로 행동에 옮겼던 것이다. 그 첫 시도가 고려정벌에 있어서의 길목을 여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983년(統和元年) 10월 병마를 정돈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선희사겸시중 소포령(宣徽使兼侍中 蕭蒲領)과 임아 소긍덕(林牙 蕭肯德)이 동정군(東征軍)에 임명되어 기고(旗鼓)와 은(銀符)를 받고 동정길에 올랐다.

다음 해인 984년(통화 2년) 4월까지 약 6개월간 압록강하류를 정벌하고 일단 개선하였다. 그로 인하여 정안국과 고려에 직접 압력을 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직 고려경내로 막바로 내닫기에는 정안국이 마음에 걸렸던지 주저하기 1개년여 세월이 흘렀다. 그간 준비를 하였다가 985년(통화 3年) 7月 다시 갑병정돈령(甲兵整頓令)을 내리고, 또 동정군(東征軍)의 병기와 도로를 점검하는 등 자못 서두르더니 그 해 8月 출정을 시도하였으나 소택(沼澤)에 물이 많아서 군마의 이동이 불편하므로 일단 중지하였다. 그 해 윤 9월 얼음이 얼고 물이 자자지기 시작하자 그 틈을 타서 동정재개령(東征再開令)을 내리었다. 그 후 약 5개월만에 정안국을 평정하고 그 이듬해인 986년(통화 4年) 임아(林牙) 야율모로고(耶律謀魯姑)와 창덕군 절도사 소달람(彰德軍 節度使 蕭撻覽)이 먼저 돌아오고 뒤이어 추밀원사 야율사진(樞密院使 耶律斜軫) 임아(林牙) 소근덕(蕭勤德) 등이 개선한다. 그때 정안국은 완전히 망하게 된다. 요사에 의하면 임아 야율모로고(耶律謀魯姑)와 창덕군 절도사 소달람이 바친 동정부획물외에도 추밀원사 야율사진과 임아 소근덕이 올린 부획물은 生口(인구)가 10여만이요, 말이 20여만필이나 되었고 그 밖의 물건들도 많았다.

그 뒤에도 몇차례 대소공격이 계속되는데 이것은 아마 발해여중(渤海餘衆)이 도입해간 곳을 찾아 행해진 공략이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991년(통화 9년)에는 압록강하에 위구(威寇), 진화(振化), 래원(來遠) 등 삼성을 축조하고 둔술병(屯戌兵)을 배치하여 홀한수반(忽汗水畔)의 올야국과 여진 등의 대송통로를 막았다.

요가 정안국을 정벌한 데는 고려정벌에 후환이 될 점도 있거니와 정안국이 직접 송과 통교하면서 송 태종의 북벌계획에 동조하여 국서의 왕래가 잦은 등의 행위에 원인하였다고 보겠다. 그 당시 상황으로 송은 거란의 배후에 자리잡은 정안국의 원병이 필요하였고 정안국 역시 자국의 부지 내지 대거란전쟁을 감안할 때 련송제요지책(聯宋制遼之策)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안국이 송과의 관계를 더욱 본격적으로 교섭하려고 나섰던 것은 981년(태종 太平興國 6년) 이후이다. 즉 태평흥국중 송태종이 원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을 듣고 981년 겨울 정안국왕 오현명이 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거란의 재화가 곧 미칠 것을 염려하고 송의 밀획을 받아 승병을 거느리고 조토에 나서겠으며 명을 어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송태종도 동심협력하여 같이 거병하여 보자는 요지의 하조가 있었다. 그 이후 순화 2년(991년 요성종통화 9년)까지도 그 명맥은 유지하며 표문을 보내고 있었다.(정안국은 이미 985년에 멸망되었음) 한마디로 정안국의 성격은 요에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킨 발해유중으로 자보(自保)를 위한 소국가(小國家)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발해왕조를 부흥시키려는 집단이 아니라 후발해의 지도적 지위였던 대씨를 몰아내고 열씨가 왕이 되었다가 다시 오씨가 왕이 되는 등 왕권의 교체도 잦았을 뿐 아니라 부흥이라는 것과는 이미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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