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url.jsp?ID=tc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07391http://ko.wikipedia.org/wiki/%EA%B7%BC%EA%B5%AC%EC%88%98%EC%99%95

근구수왕[近仇首王]

백제 제14대 왕. 근초고왕의 맏아들. 
생몰 : ?∼384(근구수왕 10). 
재위 : 375∼384
이름 : 귀수(貴首), 근귀수(近貴首), 귀류(貴流), 구소(久素)
가계
    부왕 : 근초고왕
    모후 : 왕후 진씨(王后 眞氏)
        왕후 : 아이부인(阿爾夫人)
            장남 : 침류왕
                손자 : 아신왕
                손자 : 훈해
                손자 : 설례
        후궁 : 미상
            차남 : 진사왕


375년 [근초고왕 30년 : 근구수왕 1년] 근초고왕 때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 
376년 [근구수왕 2년]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음. 
377년 음11월 [근구수왕 3년 11월] 고구려가 침략해 옴. 
379년 음3월 [근구수왕 5년 3월] 사신을 동진(東晉)에 보내어 조공 
379년 음4월 [근구수왕 5년 4월] 흙비가 내림. 
380년 음5월 [근구수왕 6년 5월] 지진 발생함.  
382년 음6월 [근구수왕 8년 6월] 계속된 가뭄 
384년 음4월 [근구수왕 10년 4월 : 침류왕 1년] 근구수왕, 침류왕 즉위함. 


재위 375∼384. 근초고왕의 맏아들이다. 비(妃)는 아이부인(阿尒夫人)으로 침류왕을 낳았다. ≪일본서기 日本書紀≫에는 ‘귀수(貴須)’ 또는 ‘귀수(貴首)’로, ≪신찬성씨록≫에는 ‘근귀수(近貴首)’로 표기되어 있다.

태자 때부터 부왕을 도와 정복 사업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369년 치양성(雉壤城 : 지금의 황해도 배천) 전투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해 5,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특히 371년 평양성전투에서는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순해 온 사기(斯紀)의 군사기밀 제보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즉, 사기의 제보에 따라 고구려군의 허실을 파악한 뒤, 고구려군 제일의 정예 부대인 적기부대(赤旗部隊)를 공격해 크게 격파하였다. 승세를 잡은 근구수는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해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황해도 신계)까지 진군하였다.

이 때 더 북진하려 하자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는 노자의 ≪도덕경 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자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 나서 회군하였다.

근구수왕이라는 명칭은 ‘구수왕’에 앞에 ‘근’자를 붙인 것으로, 근초고왕 대에 확립된 초고왕계의 왕위 계승권을 확고히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위 후 왕은 장인인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위임하고, 남하해 내려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해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日本書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한국사』-고대편-(이병도,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59)
『백제정치사연구』(노중국, 일조각,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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