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8809460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3>후고려기(後高麗記)(16) - 광인"에서 정혜공주 인물에 대한 얘기만 가져왔습니다.
정혜공주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은 같은 육정산고분군에 속해있는데, 여기서 서남쪽으로 한 10km쯤 가면 성산자산ㅡ옛날 발해의 국조였던 천통 황제,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웠던 동모산 영승유적이 나온다. 《당서》및 《발해고》에 나온 '구국(舊國)'이다. 정혜공주가 흠무왕의 차녀이고, 정효공주는 4녀로 정혜공주가 언니뻘인데, 둘이 배가 같았는지 달랐는지까지는 묘지명에서 수록을 안 해준다. 하긴 필요가 없으니까.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3>후고려기(後高麗記)(16) - 광인"에서 정혜공주 인물에 대한 얘기만 가져왔습니다.
정혜공주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은 같은 육정산고분군에 속해있는데, 여기서 서남쪽으로 한 10km쯤 가면 성산자산ㅡ옛날 발해의 국조였던 천통 황제,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웠던 동모산 영승유적이 나온다. 《당서》및 《발해고》에 나온 '구국(舊國)'이다. 정혜공주가 흠무왕의 차녀이고, 정효공주는 4녀로 정혜공주가 언니뻘인데, 둘이 배가 같았는지 달랐는지까지는 묘지명에서 수록을 안 해준다. 하긴 필요가 없으니까.
아무튼 묘지명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정혜공주는 일단 대흥 원년ㅡ그러니까 할아버지 무왕이 죽고 아버지 흠무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던 서기 737년에 태어났다. 발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가독부'의 차녀로서. 묘지명에는 그녀를 "동궁의 누나"라고 적었다. 동궁이란 태자, 즉 흠무왕의 아들로 일찍 요절한 대굉림을 말한다.
[公主稟靈氣於巫岳, 感神仙於洛川. 生於深宮, 幼聞婉嫕. 瓌姿稀遇, 曄似瓊樹之叢花, 瑞質絕倫溫如崑峯之片玉. 早受女師之敎, 克比思齊, 每慕曹家之風, 敦詩悅禮. 辨慧獨步, 雅性自然. ▨▨好仇嫁于君子. 標同車之義叶家人之永貞柔恭且都履愼謙謙簫樓之上韻調雙鳳之聲鏡臺之中舞狀兩鸞之影, 動響環珮, 留情組紃. 藻至言琢磨潔節繼敬武於勝里擬魯元於豪門琴瑟之和蓀蕙之馥]
공주는 무산(武山)에서 영기(靈氣)를 이어받고, 낙수(洛水)에서 신선에 감응받았다. 궁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순함으로 이름이 났다. 용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과 같은 나무에 핀 꽃들처럼 아름다왔고, 품성은 비할 데 없이 정결하여 곤륜산(崑崙山)에서 난 한 조각의 옥처럼 온화하였다. 일찍이 여사(女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능히 그와 같아지려 하였고, 매번 한(漢) 반소(班昭)를 사모하여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예악(禮樂)을 즐겼다. 총명한 지혜는 비할 바 없고, 우아한 품성은 저절로 타고나셨다. 공주는 훌륭한 배필로서 군자에게 시집갔다. 그리하여 한 수레에 탄 부부로서 친밀한 모습을 보였고, 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영원한 지조를 지켰다.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부르는 것 같았고, 경대(鏡臺) 가운데에서 한 쌍의 난조(鸞鳥)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면 몸에 건 패옥이 소리를 냈고, 머물 때면 의복띠를 여몄다. 문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한 원제(元帝)의 딸 경무(敬武) 공주처럼 아름다운 봉지(封地)에서 살았고, 한 고조(高祖)의 딸 노원(魯元) 공주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생활하였다. 부부 사이는 거문고와 큰 거문고처럼 잘 어울렸고,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왔다.
<정혜공주묘지>
발해의 상류 문화는 신라가 그러했듯 당조의 문화에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당조에서 하는 것처럼 시서와 예악을 즐기고, 이국의 노래와 무용을 즐기며 여인네들은 당조의 옷을 본떠입고 그네들의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사내들은 모이면 서로 한문으로 된 문장을 읽고 한문으로 한시를 지으며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수준을 가지고 서로의 교양을 평가한다. 그 외의 활쏘기와 격구, 매사냥을 즐기고 하는 모습은 고려 때의 그것을 완연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복장은 그렇지 않다. 상류층 거의 모두가 당조에서 입는 것과 같은 단령-복두로 대표되는 호복(胡服)을 입고 국가제도 역시 당조의 것을 모방해 설치하여 따르고 있다. 유교에서 말한 '군자'의 모습에 가까워지려는 사내들과, '현숙한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여인들은 발해 상류층의 가장 일상적인 모습이자 그들이 지향하는 생활양식,
나아가 나라에서 강조하는 유교규범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라고 쓰긴 했지만 여자들에 대한 설명이 좀....)
[誰謂, 夫聟先化. 無終助政之謨. 稚子又夭, 未經請郎之日. 公主出織室, 而灑涙望空閨. 而結愁六行, 孔備三從. 是亮學恭姜之信, 矢銜杞婦之哀悽, 惠于聖人聿懷閫德.]
누가 일렀던가, 남편이 먼저 갈 것이란 사실을. 지모(智謀)를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어린 아들도 역시 일찍 죽어 미처 소년으로서의 나이[請郎之日]도 지나지 못하였다. 공주는 직실(織室)을 나와 눈물을 뿌렸고, 빈 방을 바라보며 수심을 머금었다. 육행(六行)을 크게 갖추고 삼종(三從)을 지켰다. 위공백(衛共伯)의 처 공강(共姜)의 맹세를 배웠고, 제기량(齊杞梁)의 처와 같은 애처러움을 품었다. 부왕께 받은 은혜로서 스스로 부덕(婦德)을 품고 살았다.
<정혜공주묘지>
정혜공주의 개인적인 삶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묘지명에 따르면 공주는 남편을 일찍 잃고, 아들이 한 명 있었지만 관례도 채 행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중국 제도에서는 친영이라고 해서 아내가 남편을 따라가서 남편 집에서 시집살이를 했지만 고려의 제도는 그렇지 않아서, 부마인 정혜공주의 남편이 황궁으로 들어와서 사는 처가살이를 했다. 이 점은 《구당서》나 《신당서》모두가 발해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그 제도는 고려나 거란과 같으니라."
라고 말했으니 쉬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而長途未半, 隙駒疾馳, 逝水成川, 藏舟易動. 粵以寶曆四年夏四月十四日乙未, 終於外第, 春秋四十. 諡曰貞惠公主, 寶曆七年冬十一月廿四日甲申, 陪葬於珍陵之西原, 礼也.]
인생길이 절반도 되지 않았건만 세월은 달음질치고, 흐르는 물은 내를 이루어 계곡에 꼭꼭 감춰둔 배를 쉽게 움직이나니. 아아, 보력(寶曆) 4년(777) 여름 4월 14일 을미(乙未)에 외제(外第)에서 사망하시니 나이 40세라. 이에 시호를 정혜공주(貞惠公主)라 하고 보력 7년(780) 겨울 11월 24일 갑신(甲申)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으니, 이는 예의에 맞는 것이다.
<정혜공주묘지>
외제(外第), 그러니까 상경의 황궁 바깥에 흠무왕이 마련해준 저택에서 정혜공주는 숨을 거두었고, 3년상을 치른 뒤인 보력 7년 겨울 11월 갑신일(24일)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묻혔다고 했는데, (묘비의 기록대로라면 정혜공주묘 동쪽에 있는 것이 진릉이다.) 보통 고려나 조선조의 경우에서도 보이듯 피치못할 사정이 없는 한 왕실 종친의 묘는 수도 아니면 그 근교의 기내(機內)에 쓰는 것이 상례인데, 발해에서는 정혜공주의 시신을 흠무왕의 당시 도읍이었던 상경 근교에 묻지 않고 구국(舊國), 천도 이전의 옛 도읍지(그것도 왕조의 발상지)에 묻었다. 오늘날에는 정혜공주의 무덤 동쪽에 있었다는 '진릉(珍陵)'이 발해의 왕릉, 그것도 2대 무왕(인안제)의 무덤일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진릉'이 흠무왕 이전의 발해 가독부의 무덤이라면 무왕이 아니어도 고왕의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조상의 무덤 가까이 묻히고 싶었던 건가.
[皇上, 罷朝興慟, 避寢○懸. 喪事之儀, 命官備矣. 挽郎鳴咽, 遵阡陌而盤桓, 轅馬悲鳴, 顧郊野而低昂喻以鄂長榮越崇陵方之平陽恩加立厝. 荒山之曲, 松檟森以成行, 古河之隈泉, 堂邃而永翳. 惜千金於一別, 留尺石於萬齡, 乃勒銘曰]
황상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음악도 중지시켰다. 상사(喪事)의 의식은 관에 명하여 완비하게 하였다. 상여꾼[挽郎]의 호곡[鳴咽] 소리만 발길따라 머뭇거리고, 수레 끄는 말[轅馬]의 슬피 우는 소리는 들판따라 오르내리도나. 한의 악읍공주(鄂邑公主)처럼 영예는 숭산(崇山)을 뛰어넘고, 당의 평양공주(平陽公主)처럼 은총을 장례에 더하였다. 황산(荒山)의 골짜기에 솔과 개오동나무가 빽빽히 줄지어 섰는데, 고하(古河)가 굽이치는 곳에 무덤은 깊숙히 감춰져 있네. 천금과도 같던 그 분과 이별하기 아쉬워, 한 자[尺]의 돌이나마 영원히 남기고자 이 명문(銘文)을 새기니 다음과 같도다.
위대하고 빛나는 업적을 세운 조상들은 천하를 통일하였고, 상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벌내리는 것은 신중히 하여 그 인정(仁政)이 사방에 미쳤다. 부왕(父王)에 이르러서는 만수무강하여 삼황오제와 짝하였고 주의 성왕(成王), 강왕(康王)을 포괄하였다. 생각컨대 공주가 태어나매 어려서부터 진실로 아름다왔고, 비상하게 총명하고 슬기로와 널리 듣고 높이 보았다. 궁궐의 모범이 되었고 동궁(東宮)의 누나가 되셨으니, 옥같은 얼굴은 무궁화만이 비길 수 있었다. 한강(漢江) 신녀(神女)의 영기(靈氣)를 품고 고당(高唐) 신녀(神女)의 정기를 이었으며, 고운 자태를 지니고 부덕(婦德)의 가르침 속에 자랐다. 군자에게 시집가서 유순하기로 이름났으며, 원앙새가 짝을 이루듯 하였고 봉황새가 울음에 화답하듯 하였다. 남편이 일찍 죽어 유명(幽明)을 달리 하니, 한 쌍의 난조(鸞鳥)가 홀연히 등을 돌린 듯하였고 쌍검이 영원히 떨어져 있는 듯하였다. 순결과 정절에 돈독하여 역사책에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길 만하며, 부덕(婦德)을 행함에 정조가 있고 아름다왔다. 사랑 노래를 부끄러워하고 수절시를 즐기시며, 크게 어질고 근심으로 즐거워하지 않는 중에 세월이 어느듯 빨리 지나 공주도 세상을 하직하였다. 장례가 이미 끝나 상여가 돌아갈 때, 공주의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집으로 되돌아오니 뿔피리 소리 구슬프고 호드기 소리 처량하다. 강가의 깎아지른 산 옆에 자리잡으니, 묘광(墓壙)은 언제 광명을 볼 것이며 봉분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 고목이 무성하고 들판에 연기가 자욱한데, 무덤 문을 갑자기 닫으니 처량한 감정이 홀연히 쌓이는구나.
보력(寶曆) 7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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