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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우다14 – 연개소문,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와장창!”

 문짝이 부서졌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임금의 처소 입구인 호화로운 조각문이 사정없이 부서져 
나갔습니다.

 “이… 이게 무슨 짓들이냐? 게 아무도, 아무도 없느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고구려 제27대 왕, 영류왕의 얼굴이 부서진 문짝 너머로 나타났습니다.

 “……”

 철갑옷을 떨쳐입은 십여 명의 군인들이 말없이 발을 쿵쿵 울리며 방으로 난입했습니다. 그들이 잡은 장검이 오색찬란한
등불의 빛을 받아 번쩍 빛났습니다.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꼼짝 못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영류왕의 눈앞에 마침내 이 거사의
주인공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연개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어찌 이럴 수가 있소? 성왕께서 세우신 나라를 망칠 참이오?”

 절규하는 영류왕을 쏘는 듯한 눈빛으로 흘기며, 연개소문은 턱수염을 슬며시 어루만졌습니다.

 “역성혁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니 염려 마시오. 그러나 당신이야말로 이 나라를 망치고 있소. 지하에서 광개토태왕께서
 울고 계십니다! 당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소?” 

 턱을 부들부들 떨며 뭐라고 대답을 못하는 왕에게서 연개소문은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손짓, 그것을 신호로 왕을 둘러 겨누고 있던 장검들이 빛을 뿌리며 춤추었습니다.

 
전략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연개소문(?~665)은 고구려의 대표적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대대로를 쭉 세습해온 ‘대대로’ 가문의 후계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뭐가 문제였던 건지, 연개소문의 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견제를 받아 부친의 자리를 이어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리장성을 손보는 임무를 맡고 서쪽에 파견된 도중에는 영류왕이 측근들과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연개소문이 아니었습니다. 열병식에 왕의 측근들을 초대하고는, 그 자리에서 모조리 학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김에 궁궐까지 쳐들어가서, 영류왕을 토막 내 죽였습니다.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자신의 측근세력을 모아갔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과 영류왕의 대립은 단지 권력투쟁으로만 볼 게 아니었습니다. 고구려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이며, 앞으로 어떤 전략을 가지고 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달려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태생부터 무(武)에 살고 무에 죽는 나라였습니다.

고구려에는 오직 무예를 닦고 전쟁에서 활약할 뿐 평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좌식자’들이 수두룩했고, 일반인들도 걷고 서고 하는 폼이 현역 군인처럼 ‘군기가 바싹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인 고구려로서는 싸움만 잘한다고 살아남을 보장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역대 왕들이 채택한 전략은 ‘세력균형’이었습니다.

북방민족과 한족, 중국 북조와 남조,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어느 한 쪽이 특별히 강성해져서 패권국가로 떠오르지 않도록 조정합니다. 또한, 그들이 서로 으르렁대도록 유도함으로써 주변국들이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해 오는 것을 방지합니다. 고구려는 상무정신과 세력균형 전략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오랜 분열을 그치고 통일되자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인구와 자원을 가진 중국이 고구려를 노린다면 긴장해야 마땅했습니다. 일단 수나라의 침공에 맞서 물리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국력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수나라가 무너지고 새로 등 장한 당나라는 더욱 강력했고, 신중했습니다.


670년도의 당나라 제국의 영역 

이렇게 된 바에는 이제껏 써온 세력균형 전략을 포기하고, 일단 당나라에 몸을 굽히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힘을 회복하는 편이 상책이 아닐까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영웅이기도 했던 영류왕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았던 수나라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고, 태자를 보내 조공을 바쳤습니다. 더욱이 수나라를 물리친 기념으로 세웠던 ‘경관’이라는 기념비마저 허물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굴욕외교’로 비쳐졌고, 고구려를 자랑스러워하던 많은 좌식자들은 불만을 키웠습니다. 이런 불만을 이용한 사람이 바로 연개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고구려는 나약해 빠진 왕이 다스릴 나라가 아니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보장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는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고구려를 이끕니다. ‘당연히’ 그의 정책은 대중국 강경책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다시 남방 진출책을 세워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습니다. 특히 약체였던 신라는 존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당동맹”이라는 승부수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중국 편승 전략을 깨트렸을 뿐 아니라, 신라와 당나라가 손을 잡게 함으로써 전통적인 세력균형 전략도 깨트린 것입니다.

또한,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독재는 심한 후유증을 낳았습니다. 고구려 전체가 친연개소문파와 반연개소문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 것입니다. 당나라가 마침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수나라 때와는 달리 거침없이 고구려 영토 깊숙이 진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자중지란의 결과였습니다. 사실 당태종이 안시성부터 무너뜨리려 하지 않고 곧장 평양으로 진격했다면 고구려는 멸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연개소문을 보는 김부식과, 신채호의 다른 시각

연개소문을 보는 역사가들의 시각은 엇갈립니다. 유교적 사고에 젖어있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그를 임금을 시해하고 대국에 반항한 악당으로 그렸지만, 민족주의를 목놓아 외친 신채호는 그를 당나라의 침입을 당당히 물리친 불세출의 영웅이라 여겼습니다.

한 개인을 보는 시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행복을 좌우한다면, 거기에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지혜로운 대응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과거처럼 “밀어붙여” 가 통할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여기저기 많아 보이는 요즘 특별히 드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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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개인적으로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견해에 대해 동감하지만 김부식의 내용에는 공감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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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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