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5207

"왕의 목을 베어라!" 한성백제 최후의 날
<역사기행 3> 아차산 여행
03.07.24 06:21 l 최종 업데이트 03.07.24 11:56 l 노시경(prolsk)


▲ 한강의 가장 좋은 조망. 한 호텔의 빌라가 들어서 있다. ⓒ 노시경

한강의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광장동의 전망 좋은 호텔을 뒤로하고 아차산에 올랐다. 아차산 남쪽은 호텔과 빌라에 가로막히고 입산도 금지되어 있다. 1962년에 호텔 주인에게 산성 일대가 매매되어 이제는 호텔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산성 남단에는 오를 수도 없다. 

아차산 생태공원을 거쳐 아차산성(阿且山城) 외곽을 오른다. 이 곳에 자리한 아차산성은 아주 친숙한 성곽 유적이자 역사 산책로로 사랑 받고 있다. 소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능선들은 참으로 공기가 맑다.


▲ 아차산성 북장대 터. 산성의 정상으로서 주변 산과 한강이 보인다. ⓒ 노시경

아차산성의 삼국시대 때 이름은 아단성(阿旦城). '아(阿)'는 한강의 옛 이름인 아리수(阿利水)를 뜻하며, '단(旦)'은 성곡(城谷:성을 쌓은 골짜기)이라는 뜻이다. 이 아단성(阿旦城)은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이름 '단(旦)'과 일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차성(阿且城)으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된다.

1997년에 이 아차산성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고, 오랜 세월 덮여 있던 흙들을 걷어내자 그 속에서 완벽한 형태의 석축부가 드러났다. 1998년에는 돌로 심을 박고 흙을 쌓아 완성한 백제의 성으로 일부 구간을 복원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처음 이 곳에 성을 쌓은 것은 확실하지만, 일부 지점에 국한된 시굴조사를 하였기에 이 성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들이 아직 많다.


▲ 아차산성 우물. 많은 병사들이 거주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었다. ⓒ 노시경

육각형 모습의 아차산성은 외벽의 높이 10m 가량에 성의 전체 둘레는 1125m이며, 내부면적은 약 2만5000평 정도이다. 성벽으로 만들 땅을 먼저 깎은 다음, 그 위쪽에 낮은 토성을 쌓고, 그 외벽에 석재를 쌓았다. 

성은 해발 205.5m 정상 지점의 장대(將臺) 터를 빙 둘러싸고 있는데, 아차산 능선 남쪽의 계곡을 포함하고, 성내 우물과 작은 개울을 안고 있다. 산은 낮지만 내부에 평지가 있고 물이 있기에 고대의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 아차산성 남문터에서 본 한강. 삼각형 극동아파트 뒤가 풍납토성. ⓒ 노시경

한성백제는 하남 위례성·한산과 같이 평지의 성들만으로 도읍이 구성되어 있었지만, 한성백제의 가상적인 낙랑(樂浪), 말갈(靺鞨), 그리고 고구려 등은 모두 한강 이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백제는 한강 방어선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한강 이북에 효율적인 방어성인 아차산성을 축조한 것이다. 아차산성은 한강 남쪽의 도성으로 통하는 도강지점의 길목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 아차산. 한강 이북을 지키던 한성백제의 요새였다. ⓒ 노시경

아차산 정상에 올랐다. 서쪽의 용마산·북쪽의 봉화산이 지척에 보이고, 중랑천·왕숙천,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한 아차산은 이 일대의 풍납토성·몽촌토성·남한산성·북한산성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눈을 들어 바라보니 한강과 풍납토성은 먼지 안개로 인하여 희뿌옇게 보인다. 현재 서울은 눈으로 30km 이상을 볼 수 있는 날이 1년 중 9일 밖에 안 된다고 한다. 백제 당시에는 푸른 하늘 아래의 위례성이 이 곳에서 손에 잡힐 듯이 보였을 것이다.

이 아차산성은 백제의 9대 책계왕(責稽王: 재위 286∼298년)이 친대방 정책으로 사이가 나빠진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았다고 한다. 이에 낙랑군에서도 백제가 자기네 영토를 엿본다고 하여 백제를 공격하였고, 책계왕은 298년(책계왕 13년) 한군(漢軍: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말갈로 추정됨)의 침입에 맞서 직접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국왕의 전사는 내우외환이 많았던 백제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는데, 책계왕은 우리나라 기록에서 전사한 첫 번째 국왕이다.

그 이후 아차산성은 고구려의 끊임없는 공략의 대상이 되었고,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차지하려던 접경지대가 되었다. 결국 백제의 아단성은 고구려의 정복군주인 광개토대왕의 대대적인 남정으로 함락되게 된다. 이 곳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 의하면, 396년(영락 6년)에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58개의 성 중 하나인 아단성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약 1500년 전인 475년(백제 개로왕 21년), 처절한 전쟁이 이 아단성을 감싸게 된다. 책계왕은 전장에서 전투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지만, 삼국시대 왕들을 통틀어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이 있었다. 그 왕의 죽음은 <삼국사기>에 너무도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475년 9월, 백제를 전면 침공하는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은 아마도 개성에서 장단을 거쳐 임진강을 건넜고, 양주를 지나 한강일대에 도달하였다. 먼저 아차산 줄기를 따라 전초부대를 투입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장수왕은 한강 좌우로 대 병력을 이동시켜 한강을 건넜고, 백제의 수도인 하남위례성을 강타했을 것이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개로왕이 남긴 말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근개루(近蓋婁, 개로왕)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協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백제는 재정이 궁핍하고, 민심도 이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자체의 국력으로는 고구려의 남진을 막지 못할 지경이 되자 개로왕은 신라군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방국 신라에서 출발한 무려 1만명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한성백제는 역사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 풍납토성 북문터. 고구려군이 공격하던 4곳의 성문 중 하나 ⓒ 노시경

"고구려는 장수왕이 직접 군사 3만을 이끌고 와서 백제의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 대로(對盧: 벼슬이름)인 제우(齊于)와 재증 걸루(再曾 桀婁), 고이 만년(古爾 萬年)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남하해 왔다. 고구려군은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고 성을 탈출해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7일이 흘렀다. 백제의 수도 위례성은 폐허가 되었다."

고구려가 북성을 먼저 공격한 것은 그들의 공격루트가 한강 북쪽의 아차산에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백제군들은 개로왕이 한강변을 따라 축조한 제방의 목책을 경계로 하여 고구려 군대를 막으려 했으나 금세 무너지고, 거대한 북성도 7일간 버티다가 함락된 것이다.

현재에도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모든 건물들에서는 화재로 인해 사그러진 건물벽의 숯더미가 나온다고 한다. 이는 위례성 함락 당시에 고구려군이 위례성에 불을 질러 성 내부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위례성이 함락되던 밤. 궁궐과 민가를 태운 불길은 겨울의 한강을 밝혔고, 날이 밝은 후에도 한성백제 멸망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을 것이다. 위례성 내부는 저항하다가 죽어간 백제군의 시체와 함께 검붉은 유혈이 낭자했고, 많은 여인들은 겁탈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값이 나가는 재물들은 물론 고구려군이 다 약탈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수의 풍납토성 출토 유물 중에서도 귀금속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시대를 떠나 언제나 참혹한 것이었다.

이 대전쟁은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일본서기> 웅략(雄略) 20년 조에도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개로왕 을묘년(475년) 겨울에 박(개)의 대군이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해 들어오니 왕성(王城)이 무너졌다.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단어가 있다. 고구려 군을 일컫는 '박'. 이 '박'은 짐승 이름으로서 '개'를 말한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욕설 '개xx'는 그 당시의 역사책에도 남을 정도로 광범위한 욕이었다.


▲ 몽촌토성. 개로왕은 이 곳에서 위례성의 함락을 지켜본다. ⓒ 노시경

기사는 계속 이어진다. 

"북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남성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개로)왕이 성을 나와 도망치려 했다. …(중략)…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올린 뒤 왕의 얼굴에다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세어 책망하고는 포박하여 아단성 아래로 끌고 가 살해하였다."

또한 일본서기에 의하면, "국왕과 대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했다. 개로왕 뿐만 아니라 왕비, 왕자까지 고구려 군의 칼날에 목이 날아갔던 것이다. 많은 왕족이 몰살당한 것을 보면, 고구려의 공격이 아무래도 전광석화 같은 기습공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이 왕족들은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한성을 지킨 것이다.


▲ 아차산성 내부 평지. 이 곳에 고구려군의 지휘본부가 있었을까? ⓒ 노시경

개로왕을 아차성 밑으로 끌고 가 죽였다는 것은 위례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단성에 고구려 3만 대군의 지휘본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지휘본부는 어디였을까?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아차산성 북장대의 아래쪽에 위치한 산성 내부평지였을 것이다. 

이 곳을 발굴할 때에 중앙부에서 대형 초석을 이용한 건물지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는 전나무와 아카시아 나무, 그리고 잡초덤불만이 우거져 있을 뿐이다. 이 지휘본부의 임시 막사에는 그 때 나이 82세의 백전노장, 장수왕이 흰 수염을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장수왕이 개로왕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개로왕의 목을 치라고 명하였을까? 장수왕은 개로왕에 대한 감정이 지극히 나빴었다. '네가 위(魏)나라를 부추겨 고구려를 함께 치자고 하였느냐? 그리고 그 국서에서 나를 더벅머리 아이(小竪)라고 하였느냐? 고얀 것! 쳐라!' 장수왕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 고구려의 약수리 고분벽화. 근육질의 무사가 칼을 휘두르고 있다. ⓒ 노시경 

개로왕은 장수왕의 면전에 끌려와서 많은 병사들 앞에서 치욕을 당한 다음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왕비, 왕자들의 목도 차례로 베어졌다. 

개로왕의 목을 벤 고구려의 무사와 칼은 어떻게 생겼을까? 평안남도 강서군 약수리에 있는 5세기 초의 고구려 벽화고분에 고구려 무사가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약수리(藥水里) 고분의 남벽 벽화에는 건장한 무사가 칼의 뒤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환두대도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그의 자세는 금세라도 칼을 내려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1m 내외 길이의 외날 베기용 칼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 벽화에 나온 칼 정도면 개로왕의 목이 한 번에 날아가지 않았을까? 베어진 개로왕의 머리는 땅에 떨어져 구르고, 검붉은 피가 몸체에서 뿜어졌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군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을 것이고….


▲ 고구려 안악 3호분 행렬도. 고구려 무사들이 보이십니까? ⓒ 노시경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자. 

"475년(장수왕 63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 경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백제본기에는 나오지 않는 백제 포로 8천명에 대한 기록이 고구려 측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포로를 잡은 것은 고구려이므로 고구려의 기록에 포로 숫자가 정확히 남은 것이다. 아마 백제의 도읍인 한성에서 죽은 자와 도망간 자를 제외한 모든 백성의 숫자가 8천명이었을 것이다. 

잿더미로 변한 위례성을 뒤로하고 백제 포로 8천명을 끌고 가는 고구려 군사 3만명의 행렬이 평양까지 기다란 꼬리를 이었을 것이다. 장수왕과 고구려군은 백제에서 약탈한 전리품과 젊은 장정, 처녀들을 보고 마냥 행복했을 것이다.

고구려 군대의 행렬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이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가 있다. 이 대회전(大會戰)이 있기 백년 전인 4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안악(安岳) 제3호분에 장엄한 대행렬도가 남아 있다. 

이 행차에 따르는 250여명의 악대, 의장대, 무사와 고관들의 모습에서 평양으로 철수하는 고구려군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고구려 군사 3만 명과 백제 포로 8천 명의 행렬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였는지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이어진다. 

"그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창하(倉下)에 모여 있었다. 군량은 이미 다하여 근심하며 울기를 많이 하였다."

잿더미가 된 한성에 모인 백제의 젊은이들이 슬피 우는 모습이 눈앞에 잡히는 것 같다. 이 기록은 역사가가 연대순으로 사실을 적어 내려간 것이 아니다. 기록을 남긴 이가 직접 눈으로 군량창고 아래에 남아 있는 패잔병들을 목격하여 <백제기>에 기록한 것으로, <일본서기>에까지 남게 되었다.

인적이 끊긴 아차산성의 울창한 수풀에서는 이름 모를 산새만이 울고 있다. 그 거대한 함성과 울음, 불과 연기, 핏물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아단성, 위례성, 한산을 둘러싸고 모여 든 백제, 고구려, 신라 병사들의 유전자는 아직도 우리의 몸 속에서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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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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