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557/3/all/20040322/8042184/1
[고구려를 다시 보자 2] 벽화로 본 고구려…(10)철기군
기사입력 2004-03-22 17:58:00 기사수정 2009-10-10 01:59:39
삼실총 세 번째 방 서벽의 철갑으로 무장한 무사.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육군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칼 창 활 도끼 방패 등의 무기를 소지한 보병과 기병은 각각 베옷 전투복 부대와 철제 갑옷을 입은 부대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 가장 막강한 전투력은 철기군(鐵騎軍)에서 나왔다. 철기군은 말의 안면에 철판으로 마주(馬胄)를 씌우고 전신에 철제 갑옷(馬甲)을 입힌 뒤, 그 위에 긴 창을 들고 올라탄 쇠 갑옷 차림의 병사로 그려져 있다. 쇠 갑주로 무장한 철기군의 말을 ‘개마(鎧馬)’라고 불렀다. 중무장한 한 명의 철기군은 지금 탱크 한 대의 전력에 해당되지 않았을까. 철기군은 3세기에 벌써 등장한다. 동천왕(재위 227∼248년)이 위(魏)나라와 전쟁할 때 동원한 2만명 중에서 5000명이 철기군이었다. 대규모 기갑군단을 운영한 셈이다. 이를 보면 고구려의 군사전술은 빠름과 느림을 적절히 구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철기군단은 빠른 기동성이나 속도전과 함께 둔중하고 굳건한 위세도 보여 주었을 것이다. 》
○ 철기군 호위 행렬도 장중한 분위기 연출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황해도 안악 3호분과 평남 남포시 덕흥리 벽화고분의 철기군은 묘주인의 행렬도에 보인다. 안악 3호분 안 칸 동북벽 회랑의 대(大) 행렬도는 묘 주인이 탄 소 수레를 중심으로 보병과 기병이 호위하는 모습이다. 현재 동벽에만 250여명이 이동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쇠 갑옷의 보병을 앞세우고, 긴 창을 비스듬히 든 옆모습의 철기군은 위아래로 4명씩 배치되어 있다. 행렬은 느리면서도 정연하고 장중하게 연출돼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에는 안 칸 동벽을 가득 채운 행렬도가 있다. 묘 주인 유주자사가 13현의 관아를 순시하기 위해 이동하는 장면이다. 철기군은 위에 6명, 아래에 5명으로 행렬 전체를 호위한다. 철기군의 창에 장식된 물고기 모양의 깃발이 날린다. 안악 3호분보다 단출한 소규모 행렬이고 제법 빠른 움직임이다.
5∼6세기 중국 지린성 지안현 쌍영총 안 길에 그려진 단독 철기병의 모습은 더욱 빠르게 느껴진다. 쇠 갑옷 밑으로 말 다리의 벌어진 모습과 꾸불꾸불한 안장 장식물의 펄럭이는 깃발에 속도감이 실렸다. 또 말과 사람이 철제갑옷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당시 쇠를 얇고 단단하게 제련하는 단조(鍛造) 기술이 뛰어났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철기군의 전투 장면은 5세기 지안현 삼실총 제1실 북벽에 그려져 있다. 성곽의 오른편에 두 장수가 말을 달리며 창으로 대적하고 있다. 오른편 흰 얼굴 가리개 마주의 기병이 양손에 쥔 창으로 찌르자, 붉은색 마주의 기병이 턱하니 상대의 창끝을 왼손으로 맞잡았다. 실전보다는 훈련인 듯하다. 홍백(紅白)군의 대표선수가 나서 시범을 겸한 전투 경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 위에도 홍백 갑옷의 두 장수가 엎드려 맨손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 위엄에 찬 철갑무사 ‘묘실 수호신’으로
보병도 쇠 갑옷 부대를 운영했다. 삼실총 세 번째 방 서벽에 그려진 무사(武士)는 험상궂은 얼굴 표정으로 미루어 불교의 사천왕상 같은 수호신으로 배치한 것이다. 그런데 목을 보호하는 경갑(頸甲)을 댄 갑옷의 모습, 왼손에 쥔 고리가 둥근 칼 환두대도(環頭大刀)와 쇠못이 박힌 신발 등은 다른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갑옷 보병과 흡사하다. 특히 이 무사가 신은 것과 같은, 밑바닥에 쇠못을 박은 금동제 신발이 평양지역에서 출토되기도 했다.
이러한 벽화의 철제 무기나 갑옷, 신발 등의 실물은 고구려 지역보다 같은 시기 가야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어 흥미롭다. 그래서 가야를 철의 나라라고도 일컫는다.
그림으로 볼 때 고구려의 쇠 갑옷과 철모는 대부분 물고기비늘처럼 얇은 철판을 네모나고 잘게 잘라 가죽으로 이어 제작한 찰갑(札甲)형태이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 몽촌토성에서 백제 초기의 동물 뼈로 제작한 찰갑옷이 출토된 적이 있다. 이에 비해 4∼6세기 신라 지역인 경주와 가야의 땅이던 김해 부산 합천 고령 등의 고분에서 발굴된 쇠 갑옷은 대체로 너른 철판을 이용한 상체 보호용 판갑(板甲) 형태다. 윗부분이 둥글고 귀 가리개가 달린 벽화 철모는 기다란 철판을 이어서 만든 합천 출토품 투구와 가장 유사하다.
벽화에 표현된 말 얼굴 가리개인 마주는 똑같은 실물이 부산 복천동 10호분에서 발굴됐다. 또 말의 몸 전체를 보호하는 찰갑형 마갑이 경남 함안 도항리 마갑총에서 부위에 따라 크기가 다른 비늘 갑옷으로 겹겹이 쌓인 채 나와 주목을 끌었다. 가야도 고구려와 유사한 철기군을 운영했음을 보여 준다. 그 실상은 또한 김해 덕산 출토로 알려진 국보 제275호 개마인물형토기(鎧馬人物形土器)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 ‘철의 보고’ 요동 점령해 대제국 건설
질박한 느낌의 철은 요즘에도 여전히 친근하고 절실히 필요한 소재다. 최근 철 부족 현상으로 쇠붙이 절도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심지어 철로 만든 추상조각품을 고철로 오인해 훔쳐 가려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우리나라에서 철기의 사용은 기원전 300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동의 연(燕)나라 명도전(明刀錢·칼 모양의 청동 화폐)과 함께 출토되는 초기의 철기류는 중국에서 배운 기술들이 포함돼 있다. 그후 철 생산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식 농기구와 무기류가 본격적으로 생산됐다. 쇠는 농업경제력과 전투력을 크게 증진시켰고, 이를 토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국가체제를 단단히 다졌다. 고구려는 4, 5세기 소금과 철 생산지로 천혜의 땅인 요동을 점령함으로써 대제국의 건설이 가능했다.
한편 초기 철기시대 쇠는 삶의 소중한 물질이고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철을 돈처럼 사용했다는 기록도 보이고, 쇳덩어리(덩이쇠)를 무덤의 시신 옆에 두기도 했을 정도다. 6세기후반∼7세기 전반 벽화에는 대장장이를 신격화하기도 했다. 지안현 통구 5회분 천장화의 선인(仙人)들 가운데는 벌겋게 단 쇳덩이를 쇠망치로 담금질하는 철야신(鐵冶神)이 수레바퀴를 만드는 차륜신(車輪神)과 나란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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