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ihoilbo.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71215 (고구려 문화의 근원 6-1)
http://www.kihoilbo.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72162 (고구려 문화의 근원 6-2)
* 내용상 비슷한 "고구려 문화의 근원 6-2"의 일부를 이쪽으로 가져왔고 검색 편의를 위해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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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문화의 근원 6-1
고구려 경제와 생활문화
고구려 경제와 생활문화
연천선사박물관 관장 2012년 07월 05일 (목)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고구려인들의 가축은 말(馬)·소(牛)·돼지·개·닭 등이다. 고구려의 원족(遠族)은 부여인(扶餘人)이다. 부여인들이 말(馬)을 기르는 뛰어난 재능으로부터 그 명칭이 주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도 말을 기르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말 종류는 2종이 있었다.
1종은 큰 말로서 준마(駿馬)라고 부르며, 당시 고구려가 차지한 곳은 부여지역의 남쪽이다. 기원 439년에 중국 진(晋)나라의 왕 문제(文帝)가 중국 북쪽 위나라[北魏]를 공격할 시기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말 800마리를 군사용으로 사용하도록 빌려 달라고 요구해 도와준 예가 있다. 다른 1종의 말은 소형 말이다. 소형 말의 명칭은 과하마(果下馬)로서 높이가 3척(三尺, 약 90cm 높이)이다. 과하마에 대한 전설이 있다. 고구려 북부에 높은 산이 있었다. 산 밑에는 석실(石室)이 있었는데 이 석실 안에 1천 명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석실 내에 깊은 동굴[심혈, 深穴]이 2곳 있었다. 사람들이 그 동굴깊이를 알 수 없었다. 고구려 시조가 부여에 도착했을 때 말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이 산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동굴 안에서 많은 작은 말들이 뛰어 나왔다. 그래서 이 산을 마다산(馬多山)이라고 불렀다. 마다산은 현재의 용강산(龍崗山)으로 장백산(長白山)의 한 산자락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른 시기부터 인삼(人蔘)을 재배해 사람들의 병을 예방하고 치료해 주었다. 고구려인들이 소위 ‘인삼노래[인삼가, 人蔘歌]’를 지었다. 인삼은 3가지 다섯 잎[지삼엽오, 枝三葉五]이며, 그늘을 좋아하고 태양 빛은 싫어한다[희음배양, 喜陰背陽], 사람들이 욕심을 내고 인삼을 찾는다[군욕심아, 群欲尋我], 피나무 아래에서 인삼을 찾는다[단하래방, 緞下來訪].
수공업(手工業)의 발전은 일상생활의 농업생산과 전쟁에 필요한 도구도 생산했다. 고구려의 고고학적 유적과 고구려의 벽화에 따르면 고구려 수공업의 생산품이 대단히 발전되었다. 고구려에는 적철광석(赤鐵石廣)이 대단히 풍부해 금속의 90%을 차지했다. 고구려의 야철(冶鐵) 기술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 철제도구로서 농업생산용의 보습[려, 犁], 가래[화 金+華], 낫[겸, 鎌], 가래[초, 金+秋] 등이다. 생활용으로서는 화로[로 金+盧], 동이[분 盆], 칼[도 刀], 못[정 釘]등이며, 목공용으로서 자귀[분 金+奔], 끌, 톱[거, 鋸], 도끼[부 斧]등이며, 사냥과 물고기 잡이용으로 화살촉, 물고기 잡이 작살 그리고 전쟁용으로서 창, 칼, 세모진 창[모 矛], 철갑, 철제모자, 마구(馬具)등이 있었다.
당시 북방의 글안족(契丹族)이 철제사용을 못해 모든 철제도구를 고구려에서 가져갔다.
고구려의 금(金), 은(銀)과 청동기 제품의 활용도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 귀족관리들의 모자는 금·은으로 장식되었다. 무덤 출토의 금관이 금·은기 사용의 대표적 예이다. 생활 중에도 청동기 사발[완, 石宛], 합(盒), 청동거울과 청동기 장식품이 널리 사용되었다.
고구려 토기와 기와 등은 옛고이족[古高夷族]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토기의 종류는 옹기[옹, 瓮], 항아리[항, 缸], 단지[土+云 子], 동이[분, 盆], 병[호, 壺] 등이다. 기와의 종류는 판와(板瓦), 간와[簡瓦, 통기와], 와당에는 많은 연화문꽃(蓮花)등이 있으며 때로 글자(명문 銘文)등이 기록되었는데 그 내용은 기와 제작 연월과 기와 장인의 이름 그리고 때로 길상어(吉祥語, 희망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중국 한문으로 기록되었다.
고구려의 겨울 의복은 기후관계로 특색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죽 모자를 쓰고, 가죽신발을 신었다(人皆皮冠, 著革履, 인개피관, 저혁리)."
중국 중원(中原)의 복식과 완전히 다르다. 고구려 지역은 겨울이 길고, 기후가 대단히 추워 얼음이 얼고, 여기저기에 언제나 눈이 덮여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가죽옷과 신발은 필수적이었다.
고구려 귀족들은 거의 모두 비단옷[錦 絲+秀]을 입었다. 방직(紡織)업과 가죽 다루는 기술은 대단히 높은 수준이었다. 통치자들은 화려한 비단옷과 색깔이 있는 가죽 구두를 신었다.
고구려는 농업생산과 수공업이 대단히 발전되어 이웃 중국인들과 상거래가 대단히 빈번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중국의 화폐가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예로 고구려 풍습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청혼을 할 때 필수적으로 ‘사위집[女+胥 屋, 서옥]’이 필요했으며 그 사위집에 돈줄[錢帛]이 걸쳐져 있다. 이러한 습관은 당시 사람들이 화폐를 중시한 표현이다.
고구려 유적과 무덤 내에 언제나 중국제 청동화폐, 칼모습 화폐, 헌집형태 화폐 또는 중국 서한(西漢)과 동한(東漢)의 오수전(五銖錢)이 들어 있다. 때로는 중국 당대(當代)의 개원통보(開元通寶)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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