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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 보자 2] 벽화로 본 고구려…(5)왕과 왕비
기사입력 2004-02-16 18:24:00 기사수정 2009-10-10 03:59:12
안악 3호분 서쪽 곁방 남벽에 그려진 부인상. 풍만하면서도 남편상 못지않게 당당한 모습이다. 화려한 머리장식과 통통한 얼굴을 가리는 화장법이 눈에 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4세기 중엽의 안악 3호분(황해도 안악군 용순면)에서는 앞 칸의 서쪽 곁방에 들어서면 묘주인 부부의 초상화를 만나게 된다. 연꽃이 장식된 장방 안에 모셔진 정면상이다. 평상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가 마치 부처상을 연상케 한다. 특히 두 팔을 기대고 복부를 감싼 반원형의 옻칠 팔 받침은 중국의 옛 기록이나 그림에 나타나는 ‘은궤(隱궤)’라는 기물이어서 흥미롭다. 전설의 신농(神農)씨가 소지했던 것이라고 전하며, 도사나 승려가 사용해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물건이다. 이 은궤 팔 받침은 덕흥리 벽화고분(평남 대안시) 유주자사의 초상화에도 보인다. 귀면(鬼面) 장식의 검은색 손부채와 함께 묘주인의 권위를 신격화하려는 의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호방하고 풍만한 안악 3호분의 부부상
그런데 진한 눈썹, 가늘게 뜬 눈에 또랑또랑한 눈동자, 팔(八)자 수염과 소방한 구레나룻의 큼직하고 기다란 얼굴. 영락없이 고구려의 호남(好男)이다. 여러 차례 수정한 흔적은 정밀한 초상화법을 보여준다. 머리에는 당시 왕이 썼다는 백라관(白羅冠)을 하고 있다. 흰 허리띠를 두른 겉옷은 가슴에서 저민 풍성한 붉은 줄무늬의 적갈색 포(袍)다. 석면에 직접 채색한 화법은 구륵법(가는 이중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그 가운데를 채색하는 화법)과 몰골법(넓은 붓으로 먹을 찍어 한 번에 그리는 화법)을 혼용했다. 돌에 직접 그렸기 때문에 먹색이나 붉은색의 윤기가 선명하다.
정면상이면서 뒤쪽의 가리개는 왼쪽에서 본 대로 그렸다. 그 오른편에는 조선시대 왕의 행차 때 쓰는 정절(旌節·의전용 병장기나 깃발) 형태와 같은 장식물이 꽂혀 있다. 장방의 좌우에는 직급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는 인물들이 2열로 서 있다. 남자들은 모두 모자 뒤끝이 올라간 ‘책(책)’이란 관모를 쓰고 도포를 입은 관리들이다.
이 초상화의 왼편, 남쪽 벽의 풍만한 여인은 왕후인 셈이다. 왕을 향해 옆으로 틀어 앉은 자세이다. 왕의 초상화에 비해 섬세한 선묘의 인물화로, 한결 성공적인 회화성을 보여준다. 왕의 것과 흡사한 장방에 호사스러운 문양의 의상과 올린머리의 고리 모양 가발 장식이 왕비의 품위를 한껏 드러낸다. 이마의 당초무늬 화장과 머리에 꽂은 나뭇잎형 붉은색 장식이 눈길을 끈다. 살이 쪄 넓적한 양 볼을 가리는 화장법 같다. 장방의 좌우로는 찻잔과 깃발을 든 세 명의 시녀가 보인다. 머리 매무새나 겉옷이 궁중의 시녀다운 패션이다.
● 다정하게 나란히 그려진 쌍영총의 부부상
안악 3호분의 묘주인 부부가 따로 그려진 반면 5, 6세기의 쌍영총(남포시 용강읍)에는 부부가 안 칸 북벽에 다정스레 나란히 등장한다. 쌍영총은 앞 칸과 안 칸 사이에 황룡이 그려진 팔각형의 두 돌기둥을 세워 실내를 가장 화려하게 꾸민 고분이다.
불꽃무늬 장식의 기와집 저택 앞에 세운 거대한 장방은 안악 3호분과 비교할 수 없이 호화롭다. 좌우 기둥의 주홍 청록 황색의 ‘V’자형 삼색 단청이 그러하다. 기둥 위에는 큰 장식물이 얹혀지고, 기둥머리에는 귀면이 있다. 특히 장방의 호사스러움과 그 위로 양 날개를 펼친 긴 꼬리의 봉황은 궁궐에서 벌어진 회갑연이나 회혼례 같은 큰 잔치 장면을 연상케 한다. 평양 천도(427년) 이후 고구려의 막강한 위세를 보여준다.
붉은색 포(袍)를 걸친 부부는 평상에 정좌한 모습으로 초상화처럼 그려졌다. 이중관을 쓴 묘주인은 안악 3호분과 유사한 왕의 복장이다. 톱니장식의 까만 평상은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놓은 상태인데, 뒷다리가 보이도록 그리다 보니 원근법과 안 맞아 어색하다.
장방에는 집안을 드나드는 시종과 시녀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가마 앞의 한 시종은 기둥에 숨어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있다. 엄격한 화면에 파격을 주는 화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안악 3호분과 달리 부부를 생활 속의 인물로 설정한 것이다.
두 고분의 묘주인 부부는 모두 왕과 왕후로 보이며 왕비상은 왕 못지않게 당당하다. 안악 3호분의 왕비 초상은 독립된 벽면에 그리면서 시중드는 시녀의 모습을 곁들였다. 또 쌍영총은 생활풍속도로 해석했지만, 평상 위의 부부를 대등하게 앉혀 놓았다. 의도적으로 부인을 묘주인 남성보다 작게 그리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처럼 여왕이 배출되지는 않았지만, 고구려 여성도 정치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그에 못지않았음을 보여준다.
이태호 교수 명지대 미술사학과
● "여장부가 많았던 나라"
동북아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 남성의 기백이 여성의 강인함도 키웠을 것이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어머니 버들꽃 ‘유화(柳花)’는 미혼모였으나 지모신(地母神)으로 모셔졌다. 주몽의 왕후 ‘소서노’를 배출한 계루부는 고구려를 세우는 데 필요한 정치 경제적 기반이었다.
3대 대무신왕의 왕후는 만만치 않은 권력욕을 가졌다. 대무신왕이 후궁 소생으로 총명하고 잘 생긴 호동왕자를 총애하자 호동이 왕비인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고 모함했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결국 호동왕자는 왕 앞에서 자결했고 왕후의 아들 해후가 왕(모본왕)으로 등극했다.
평강공주가 어명을 거스르고 서민 출신의 온달을 남편으로 삼은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공주는 궁궐에서 패물을 갖고 뛰쳐나와 집과 살림살이, 말 등을 사들여 온달의 생활기반을 마련했고 온달이 대장군으로 성장하게끔 뒷바라지했다. 또 ‘아엄(兒奄)’이란 귀부인은 불상 제작에 시줏돈을 내고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광배(光背·불상의 후광)에 남겼다.
서민층 여성의 당당함도 만만치 않았다. 미천왕이 소금장수로 지내던 시절 그를 속였던 압록강 근처 수서촌의 여관집 노파가 좋은 사례다. 하룻밤에 소금 한 말을 지불하기로 계약하고 투숙했다가 여관비를 더 받아내려는 노파의 계략에 속은 을불(乙弗·미천왕의 이름)이 소금을 다 빼앗긴 일화가 전해진다. 수서촌 노파는 억척스럽고 강한 생활력을 지닌, 전형적인 고구려 여성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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