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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보자 2] 벽화로 본 고구려…(8)고구려 사내들
기사입력 2004-03-08 17:39:00 기사수정 2009-10-10 02:48:19
중국 지린성 지안의 무용총 안칸 왼쪽벽에 그려진 사냥도의 당당한 고구려 남아.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하면 떠오르는 첫 이미지는 말을 타고 산야를 누비던 용맹스러운 사내들이다. 그 기백 넘치는 말타기와 활쏘기 솜씨로 천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후한서(後漢書)’나 ‘삼국지(三國志)’ 등에 고구려 사람들을 “성질이 포악하고 성급하며 싸움 잘하고 노략질을 일삼는다”라고 기술해 놓았다. 오죽했으면 고구려를 그렇게 표현했을까. 중국인에게 고구려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 사서들에서 막상 고구려의 선조 격인 부여나 예맥, 옥저 사람에 대해서는 ‘체격이 크고 굳세고 용감하며, 우직하고 건실하며 근엄하고 후덕하다’면서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고 묘사했던 점과 사뭇 다르다. 》
● 고구려 사내는 어떻게 길러졌나
고구려는 청소년 교육부터 문무(文武)의 조화를 꾀했다. 마을마다 경당(경堂)이 설치되어 “가난하고 천한 집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이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구당서·舊唐書)고 전한다. 독서를 즐기며 활쏘기 외에 축국이라는 공차기와 석전(石戰)놀이, 씨름 등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공동체 정신을 배양하며 자란 것이다.
고위층 자제들은 지금의 대학 격인 태학(太學)에서 더 높은 단계의 학문과 무예를 통해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쌓았다. 상하 모두 문무예(文武藝)를 갖춘 전인적 인간으로 성장토록 한 것이다. 특히 전쟁을 치러야 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전투를 직접 지휘했던 왕족과 고위 관료들은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한 대장군으로, 백성은 용감한 병사로 길러졌다.
5∼6세기 평안남도 남포시 수산리 벽화고분에서 그 고구려를 만든 소년들을 만날 수 있다. 안 칸 북벽의 왼쪽 상단에 두 소년이 양손을 소매에 넣고 나란히 서 있다. 넓적한 얼굴의 미소년으로 개구쟁이의 생글거리는 익살이 역력하다. 오른쪽 소년은 누런 베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왼편 소년은 검은 바지에 누런 저고리를 입은 ‘콤비’ 패션이다. 머리에 검은 수건(黑巾)을 두르고, 저고리는 깃과 도련에 검은 띠의 선(선)을 두른 활동적이면서도 멋스러운 옷이다. 이런 개구쟁이들이 경당과 태학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고구려의 전사로, 그리고 관료로 성장했을 것이다.
● 전시엔 호랑이처럼, 평시엔 학처럼
같은 수산리 벽화고분 안 칸 동벽 왼쪽 구석에 관료층 부자(父子)의 예(禮)가 표현돼 있다. 두 인물 모두 검은 선의 황색포(黃色袍)를 입고 뒤꼬리가 솟은 관모인 검은색 책(책)을 쓰고 있다. 모두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은 상태로 아버지는 서 있고 아들은 무릎을 꿇고 있다. 이제 막 벼슬길에 오른 청년이 아버지에게 배례하는 그림으로 보인다.
이 인물화들에는 “풍속이 깨끗함을 스스로 좋아하고 몸가짐을 소중히 한다. 서 있을 때는 대부분 두 손을 진중하게 맞잡고, 걸을 때는 꼭 소매 안에 두 손을 넣는다”는 ‘북사(北史)’의 묘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두 손을 맞잡는 공수(拱手)의 예는 장천 1호분 앞 칸 북벽 왼편의 정중하면서 당찬 표정의 문관(文官)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네모난 흰색 관모를 쓰고 누런 바지에 검은색 선과 무늬의 흰색 저고리를 세련되게 받쳐 입었는데, 단연 ‘미스터 고구려’라 할 만하다.
이처럼 예절을 갖춘 고구려 남성들은 4∼6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듯이, 칼과 활로 무장하고 말을 타고 다녔다. 평안남도 남포시 쌍영총 기마인물상이 그 전형의 호남아(好男兒)상이다. 검은 선의 흰 바지저고리를 입고 모자에 두 개의 검은 깃털 모양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이 관료임을 알려준다. 이 그림에는 정중한 생활태도가 밴 근엄한 중진 관료상과 가슴에 야성미를 품은 장수상이 함께 담겨 있다. 중국인들이 거론한 ‘포악하고 노략질하는’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다.
● 문무(文武) 겸비의 멋쟁이
한편 고구려는 단순히 무인(武人)들만의 사회가 아니었다. 학문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조화롭게 발전시킨 나라였다. 고분벽화의 경우만 보더라도, 당대 어느 민족 어느 국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예술을 사랑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예서체 글씨는 비록 한(漢)나라 시절의 예서(隸書)를 배운 것이겠지만, 중국의 그것보다 한결 아름답고 독창적이다. 무용총 천장화 가운데 평상에 앉아 시를 읊고 그것을 붓으로 받아쓰는 장면은 고구려 남성의 문예생활을 잘 보여준다.
학문적으로도 소수림왕(재위 371∼384년) 때 율령을 반포해 법치국가의 기틀을 쌓고,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을 개설해 유학과 음양오행의 도교철학을 가르쳤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일찍이 ‘유기(留記)’라는 방대한 역사책 100권을 편찬하고, ‘신집(新集)’ 5권으로 압축해 발간한 것은 커다란 학문적 성과로 꼽을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 전하는 천체 관측에 대한 기록은 천문학의 발전을 알려준다. 이는 6세기의 덕화리 2호분이나 진파리 4호분 등 고분벽화의 별자리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 ‘미스터 고구려’ 바보온달
고구려 사내의 표본 중 하나인 온달은 평원왕(재위 559∼590) 때 눈먼 노모(老母)를 봉양하며 살던, 못생기고 마음씨 착한 걸인이었다. 평강공주를 만나 대장군이 된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다. 온달이 신분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평강공주의 독려 아래 말타기와 활쏘기의 명수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말 고르는 법을 가르쳤고, 스스로 정성껏 남편이 탈 준마를 길렀다.
온달이 그 사냥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해마다 3월 3일 낙랑언덕에서 열리던 사냥대회에서였다. 왕이 직접 나서 사냥한 돼지나 사슴 등으로 산신제(山神祭)를 올리는 날이었다. 또 평원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참여한 후주(後周)와의 요동전투에서 크게 용맹을 떨쳤다. 왕은 드디어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면서, 대형(大兄)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총애하게 되었다.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 죽령 서쪽까지 영토를 확장하겠다’며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가 아단성(阿旦城)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그때 온달의 영구(靈柩)가 땅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도착해 주검을 어루만지며 달래자 관이 움직여 장사지냈다고 한다. 지금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이 아단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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