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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원광대  http://tadream.tistory.com/7738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엄윤희"에서 "3. 발해의 문화 - 1) 건축" 중 "(1) 성곽"과 "(2) 도성 및 궁성"을 가져오고 내용에 맞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발해의 성

(1) 성곽

발해는 5경 · 15부 · 62주의 행정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행정 구역에는 도시의 규모와 인구에 따라 크고 작은 여러 형태의 성곽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발해는 4차례에 걸친 천도로 도읍이 있었던 곳에서 당시의 도성 유적이 남아 있다.

발해의 성곽 유적은 약 25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사된 발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이나 보루들은 만주 지역에서 80여기, 북한 지역에서 20여기, 연해주에서 28기 등 120여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해의 성곽은 발해 시대의 것 외에도 이전에 축조되어 발해 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된 것, 발해 멸망 후 수리 또는 개축되어 재사용된 것도 있다. 성곽 유적의 편년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나 다른 유적에 비해 그 규모가 방대하여 전체적은 발굴 조사를 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어 아직까지는 초보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곽에 대한 편년의 기준은 성곽의 구조나 출토 유물들이 주로 이용되고 있는데, 성곽의 평면 구조와 성벽에 설치된 치(雉)나 옹성(甕城)의 구조, 성곽 안에서 출토되는 기와나 토기의 양식 등이 그것이다.36)

발해의 성곽은 입지에 따라 평지성과 산지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기능에 따라서는 중심성과 이를 호위하는 호위성으로 분류되고, 호위성은 다시 보루와 차단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성곽의 축성 재로에 따라 토성과 석성, 토 · 석혼축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평지성은 거의 대부분이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산성의 경우에는 석성과 토 · 석혼축성이 많은데, 이 중에서 석성도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성곽은 평면 형태에 따라서 장방형 · 정방형 · 부정형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대체로 평지성은 계획적으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여러 형태로 분류가 가능하지만, 산성은 지형에 따르기 때문에 대개가 부정형에 속한다.

발해의 성곽은 전국에 5경 · 15부 · 62주를 설치하고 각 소재지마다 성을 쌓아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행정 단위를 기준으로 발해 성들을 도성(都城) · 부성(府城) · 주성(州城) · 현성(縣城)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또한, 발해의 성곽들은 성자산성과 영승유적처럼 초기에는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집안(集安)의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짝을 이루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문왕이 8세기 중반에 상경으로 천도하고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평지성 중심의 방어 체계로 전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건국기에는 고구려의 방어 체계를 계승하다가 문왕 시기부터는 당의 방어 체계로 전환하였다고 볼 수 있다.37) 

(2) 도성 및 궁성

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된 후 제 15대 왕 대인선 20년(926년)에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네 번 옮기게 되는데, 첫 번째는 구국에서 중경 현덕부로 옮겼고, 두 번째는 755년에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겼고, 세 번째는 785년에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로 옮겼고, 네 번째는 794년 동경 용원부에서 다시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상경 용천부는 발해 역사 229년 중 150여 년 동안 수도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발해 도성 및 궁전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경성터에 대한 고찰이 우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고학적 발굴 결과도 다른 발해 도성에 비해 상경성이 규모도 가장 크고, 도읍으로서 면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경성은 당시 중원 지역 당의 장안성(長安城)에 이어 규모 면에서 두 번째로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동북아시아의 대표적 도성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38)

발해 도성 유적 가운데 발굴을 통해 건축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곳으로는 발해의 처음 도읍이었던 구국 오동성(傲東城)터를 비롯하여 중경 현덕부 서고성터, 동경 용원부 팔련성터, 서경 압록부 임강시가지성터, 남경 남해부 청해토성터, 상경 용천부 상경성터를 들 수 있다. 이들 도성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 특징은 네 가지이다. 첫째, 비옥한 농경지로 된 넓은 분지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고 한쪽에는 강이 흐르고 주변에는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둘째, 주로 내성과 외성은 이중성 이상으로 조영되어 있다. 상경성 경우는 외성, 황성, 궁성의 3중성이었다. 셋째, 도성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 혹은 정방형 형태를 취하고 있어 당시 동북아시아 도성 건축의 보편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넷째, 성벽은 대체로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되어 있다. 즉, 건축은 그 지역의 자연 환경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39)

발해의 궁전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상경성 궁전터를 들 수 있다. 궁전은 상경성에서 가장 북쪽 영역에 속하며, 중심 공간인 궁성 안에는 37개에 달하는 많은 궁전터가 남아 있다. 상경성 궁성 공간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곳은 궁성의 중심부분이다. 이 부분에는 궁성 남문과 북문을 잇는 일직선상에 5개의 궁전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남문을 시작으로 남에서 북으로 가며 제1궁전→제2궁전→제3궁전→제4궁전→제5궁전 순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건물들은 궁성 남쪽 벽에서 시작된 회랑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다만 제4궁전터와 제5궁전터 사이에만 회랑이 없다. 즉, 제5궁전은 일반 궁전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규모나 전통적인 도성 제계로 볼 때 제1궁전과 제2궁전은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는 정전(正殿) 공간이고, 제3궁전과 제4궁전은 편전(便殿) 및 침전(寢殿) 공간이었을 것이다. 또한 제5궁전은 다른 궁전 건물과 달리 바닥에서 떠있는 누각식(樓閣式)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제1·2 궁전터가 가장 크고 웅장하며, 제4궁전터에는 구들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40)

발해의 궁전 건물들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회랑으로 이루어지는 안뜰의 폭과 길이가 점차 좁아지는데 제1, 제2, 제3궁전 앞뜰의 폭이 2.5 : 1.5 : 1 비례로 줄어들고 있다. 또한 앞뜰의 길이도 이와 비슷하다. 즉, 제3궁전터 앞뜰의 길이를 1로 보았을 때 제2궁전을 1.5, 제1궁전은 2.5로 늘어나는 비례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각 궁전 회랑 영역으로 볼 때 뒤로 가며 폭과 길이가 줄어든다는 것은 뒤로 가며 점차 작아지는 감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심도를 더 깊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건물 규모는 뒤로 가며 커지는 것이 상례인 반면 상경성 경우는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건물 배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인 도성의 형태에 있어서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도성 제도를 채택하였다고 하지만 각 건물의 배치에서는 발해만의 특수성도 가졌다고 볼 수 있다.41)

상경성 황성은 궁성 앞쪽에 있으면서 중앙 행정 기관인 3성(省) 6부(部)가 있었고, 지금은 어화원(御花園)터라고 부르는 금원(禁苑)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10개의 관청터가 확인되었으며, 금원터에서는 큰 인공호수를 중심으로 2개의 가산(假山) 위에 각각 정자터가 남아 있다. 금원의 동쪽 구역은 남북 길이 720m, 동서 너비 213m로 구역 북쪽에는 벽에 둘러싸인 작은 뜰이 여러 개 있고, 그 남쪽에는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정자와 다락집을 지어서 경관을 수려하게 꾸몄다. 북쪽 한복판에는 다락지블 짓고 그 앞에는 큰 인공 연못을 팠다. 연못 안과 바깥 좌우에 대칭되게 있는 두 개의 섬 정상에는 8각 정자를 지었다. 연못 남쪽의 넓은 터에는 여러 채의 집을 지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정원터의 면모로 볼 때 상경성은 한 국가의 도성으로서 매우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었음을 알 수 있다.42)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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