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210.110.162.98/palhae/sang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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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160여년 서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黑龍江省 寧安市 渤海鎭)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黑龍江省 寧安市 渤海鎭)
160년 가량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길림성/吉林省, 훈춘/琿春)와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 길림성 임강시/臨江市),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北靑),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길림성/吉林省 화룡시/和龍市 서고성자/西古城子) 등과 함께 발해 5경 중의 수도(首都)였던 곳으로 오늘날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본명은 동경성진/東京城鎭)에 위치한다. 주위 수백리되는 평탄한 분지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도성은 북동 남벽 약 1-3키로 밖으로 경박호에서 흘러내리는 목단강이 감돌아 흐르고 있으며, 당나라 장안성을 본떠서 고구려식으로 축성하였다. 그리고 주위에는 삼령둔(三靈屯)과 같이 왕릉급 고분군들과 대목단둔성(大牧丹屯城)과 같은 성터들도 많다.
발해수도는 제3대 문왕 재위 중반의 755년 경(천보말/天寶末)에 중경(길림성 화룡시 서고성터)에서 이곳으로 옮겨 785년 9년간 잠시 동경으로 옮겼다가 돌아와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자리했었다. 이후에도 이곳은 발해멸망 후의 괴뢰정권이었던 동란국(東丹國; 926-982?)이 927년 요양(遼陽)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서울이기도 하였는가 하면, 발해국 부흥왕조였던 이른바 후발해(後渤海; 927-1003?)의 중심지였다는 주장도 있다. 사료에서 상경의 위치에 대해서 동모산(東牟山; 돈화敦化 성산자산城山子山) 아래의 구국(舊國)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키로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수도를 옮긴 것은 이곳이 중경지역보다 군사적 입지가 좋은 곳으로 경제적인 면에서도 중경이나 구국에 못하지 않은 곳이었기 아니었겠는가 한다. 따라서 이곳에서 살 수 있는 인구도 내외성의 크기와 지역 등을 고려하여 80만에서 120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이곳이 상경용천부였다는 사실은 일본의 백조고길(白鳥庫吉; 1909), 조산희일(鳥山喜一; 1926), 조거용장(鳥居龍藏; 1927) 등의 답사보고에 이어,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중심이 되어 1933년과 1934년에 본격적인 발굴을 하고부터였다. 이후 鳥山喜一이 1940년과 1942년에 다시 이곳의 절터를 조사하여 그 전모가 더욱 확실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당국에 의해서도 이곳은 1961년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선정되었는가 하면, 발해진에 이곳의 전문관리기구인 영안현문물관리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한편, 1963년부터 1964년까지는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朝中共同考古學發掘隊)가 결성되어 북한 학자들도 이곳의 발굴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어 1979년에는 영안현문물관리소(寧安縣文物管理所)가 중심이 되어 또 다른 문터 등을 그리고 1981년 이후에는 흑룡강성문물고고공작대(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가 중심이 되서 회랑 등을 발굴하였고 최근에는 주변의 왕릉급 묘도 발굴하고 있다.
성은 크게 외성과 내성으로 나누어 있으며, 내성은 궁성(宮城; 북쪽)과 황성(皇城; 남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도시의 중심부에 있는데, 남북길이가 약 1.4키로, 폭은 1.1키로이다. 이 도시의 기본 간선도로는 황성(皇城) 남문으로 이르는 대도로이며, 남북길이가 무려 2,195미터 폭은 110미터나 되어 당나라 장안성 도로명을 따서 "주작대로"(朱雀大路)라 부르기도 한다. 궁성안의 주요 건물은 이 장대한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다.
네 구역으로 나뉘어지는 궁성은 자금성(紫禁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안에서 북쪽 가운데에 있고, 가운데 중심 구역에서는 7개의 궁전터가 있다. 제1궁전과 제2궁전은 공식행사가 치러졌던 건물이며, 제3-제4궁전은 왕족의 거주지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도 5개의 궁전터와 계단-초석들이 완연하고, 도기, 청동기, 철기 및 기와와 글자(발해글자?)가 새겨진 문자기와도 다수 나왔다. 특히, 왕실 사람들이 잠을 잤던 침전터에서는 <<신당서(舊唐書)>>에서 고구려문화의 특징으로 꼽았던 구들이 7군데나 발견되어 발해지배층도 일반 서민들과 문화적으로 동질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 구역으로 나뉘어지는 황성은 궁성 남쪽에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도로의 폭은 92미터이다. 황성은 중앙 정부 기관이 위치하던 곳으로 이들은 모두 관청터로 추정되었고, 이곳에서는 동문, 남문, 서문의 3개 문터가 발견되었다. 또한 발해의 사상과 종교를 엿볼 수 있는 절터도 9군데나 발견되었는데, 7개는 성안에서 나머지 2개는 성밖에서 발견되었다.
발해석등
상경용천부 안내문
상경용천부 상경성 복원도
상경용천부 상경성 평면도
상경용천부의 삼령분 발해무덤
상경용천부의 삼령분 발해무덤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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