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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수상교통과 신라의 길 : 일찍부터 바다로 나간 고구려인들"에서 "삼국을 통일시킨 신라의 교통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 "고구려의 수상교통과 신라의 길 : 일찍부터 바다로 나간 고구려인들"에서 "삼국을 통일시킨 신라의 교통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삼국을 통일시킨 신라의 교통로
2002-10-10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신라의 건국과정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뤄 강대국이 된 이유 중 하나는 일찍부터 전국에 걸쳐 교통로를 개척하고 이를 통해 군사, 경제, 문화교류, 중앙집권에 의한 지방통치 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정식으로 건국되기 전인 기원전 2세기경 지방 소국(小國)시대부터 중국·일본 등과 활발하게 해상교역을 하고 교통로를 통해 영토를 늘려갔으며 백제·고구려와 교류를 함으로써 번창할 수 있었다.
특히 9세기 초에는 해상왕 장보고를 배출해 동양의 해상교통을 장악하는 한편 선박의 제조기술이 발전해 일본이 배워갈 정도였다. 또한 비교적 평지가 많아 도로를 잘 닦을 수 있었기 때문에 수레를 많이 써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토를 확장했다. 특히 국민에게 수레사용법을 가르칠 만큼 수레가 널리 쓰였고 한국 교통변천 3천년사 중에서 조선조 이전의 교통에 관련된 유물·기록·유적들이 가장 많이 발굴된 고대국가다.
신라는 한반도 남쪽에 있던 삼한의 12개 재후국 중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이 발전해 영남의 경주를 중심으로 독립한 국가다. 처음에는 척라(尺羅), 사라(斯羅), 서라벌(徐羅伐) 등으로 불리다가 주변 재후국들과 가야국을 정복해 고구려, 백제와 대등할 만큼 세력이 강해진 503년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주지역으로 이주해 와 살고있던 고조선 유민의 6부락 촌장들이 양산촌 출신인 박혁거세를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추대해 세운 나라다. 사로국은 주변에 있던 한의 소국들과 가야를 차례로 정복해 2세기 중엽 낙동강 동쪽지역을 다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사로국은 백제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대 강국인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450년까지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해 3국을 통일하기 위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676년 3국을 통일, 당나라의 세력까지 물리친 후 1천 년의 역사를 이으며 번창하다가 정치적 내분, 관리들의 부패로 935년 고려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신라의 경제상황
신라는 농업국가로서 일찍부터 철기문화가 농업이 발달했고 아울러 목축업도 성했다. 특히 소와 말을 많이 사육해 농경과 수레 견인용으로 썼다. ‘삼국유사’에 신라 제3대 왕인 유리니사금(283)은 쟁기인 보습과 얼음창고, 수레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같은 기구를 사용하기 위해 말을 많이 길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직조와 철제도구를 만드는 수공업도 발달했는데, 경주의 조양동 38호 무덤에서 출토된 철검과 쇠도끼 그리고 이 같은 철제도구의 소재인 철정(쇠덩이)이 4∼6세기의 신라무덤에서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철정은 초기에서 중기까지 보호를 받고 있던 고구려에서 교역을 통해 수입했거나 소백산맥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철을 일찍부터 발달한 주조기술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동해를 끼고 있어 농업 못지 않게 수산업도 발달했다. 삼국사기 중 실성니사금 15년(416) 편에는 ‘동해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크기가 수레에 가득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래, 상어 등의 큰 물고기를 낚는 것은 고기잡이 기술이 발달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삼국사기’는 또 ‘신문왕(683)이 왕비를 맞기 위해 혼인예물로 쌀·술·기름·간장·꿀·된장·말린 물고기·젓갈 등을 135수레나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린 고기와 젓갈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수산업의 발전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기의 교통로
신라 초기의 교통로는 사람의 왕래·사냥·물물교환을 위해 고대인들이 개척한 길이었다. 고대인들은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길을 만들었는데, 형상강 상류에 있는 경주를 출발해 강변 낮은 지대를 따라 포항방면에 이르는 동쪽 진출의 길이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이 첫 교통로가 개척된 때를 탈해왕시대(57∼79)로 보고 있는데, 형산강 지대는 큰 호수·높은 산·산맥 등 장애물이 적어 길을 뚫기가 쉬웠다. 이 형상강 교통로를 통해 포항에서 북으로는 영덕·삼척 방면, 남으로는 울산·동래·낙동강하구까지 비교적 쉽게 길을 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개척된 교통로는 서쪽 진출로였다. 파사왕 때는 서쪽 금호강 유역의 압록하(금호강지류=경산)·골벌국(연천)·다벌국(대구)·초팔국(협천)이 정복되었고, 파사왕은 가야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계획적인 교통로를 개척했다. 이것 역시 토목공사로 만든 게 아니라 자연지형을 이용해 만든 길이었다.
가장 오래된 계립령 교통로
신라 제8대왕인 아달라는 파사왕이 개척한 서쪽방향 교통로를 이용해 대구에서 상주를 거쳐 계립령(鷄立嶺)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개척하고, 이어 문경과 충주로 연결하기 위해 고대부터 이용하던 소백산맥을 넘는 계립령길을 156년에, 제천과 원주로 가는 소백산맥의 죽령길을 158년에 넓게 닦았다. 바로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삼국사기 아달라왕 편의 ‘소백산 남쪽가지에 있는 죽령(竹嶺)은 신라 아달라왕이 처음으로 길을 개통했다’는 구절이다. 말하자면 신라의 아달라왕은 우리나라 도로역사상 처음으로 토목공사를 벌여 인공적인 도로를 만든 왕인 셈인데, 이 첫 도로의 너비는 수레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경주∼대구∼선산∼상주∼계립령∼문경∼충주로 이어지는 계립령 교통로는 신라 소지왕시대 이전에는 주로 물물교환과 왕래를 위한 길이었으나 소지왕 이후부터는 신라의 영토를 넓히기 위한 북진의 길이 되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중요한 길로 여겨 소지왕 9년(487)에 계립령 교통로를 관도(官道)로 지정했다. 이 계립령이 바로 충북의 연풍 동북쪽 40리 지점의 월악산맥을 넘는 이화령 고갯길이다.
계립령 길 다음으로 오래된 교통로로 알려져 있는 길이 바로 옆 문경새재다. 문경새재는 정확히 언제 개통되었을까.
문경지방의 구전기록을 보면 ‘문경새재는 예전 삼국시대에 남북을 분단시킨 고개로서 고구려와 신라 양국의 국경이었다. 그런데 아달라왕 때 계림재 길이 생겼다. 처음에는 한입재라 불렀는데, 여기에는 고사갈이 성(城)이 있었다. 고려 태조가 남쪽 정벌에 나서서 이 성에 도착하니 성주 홍달이가 귀순해 성을 개방했고, 새 길을 내 이로부터 새재(新嶺)라 불렀다’고 되어 있다.
즉 왕건이 신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계립령재를 넘을 때 고사갈이 성을 지키던 성주 홍달이가 항복하고 귀순했다. 이어 왕건은 고사갈이 성을 백성에게 개방하고 새 길을 뚫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생긴 길이 문경새재다. 그러니까 문경 새재는 아달라왕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훨씬 훗날인 고려 초에 왕건의 명령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온달장군의 한이 서린 계립령길
흔히들 문경새재를 새(鳥)가 많아 새재라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새로 만들었다 해서 신령(新嶺)으로 표기한 것을 백성들이 쉽게 풀어 새재라 불렀던 것. 후대로 오면서 유난히 이 고개에 새(鳥)가 많아 새(新)를 나는 새(鳥)로 오인, 문경새재(鳥嶺)가 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 고개를 넘어 조선을 침략하자 조선조 숙종 때는 적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조령에 세 겹 성을 쌓고 이 고개 양쪽 입구에 울타리를 친 관문을 만들어 행인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한편 계립령은 고구려 평원왕의 바보 사위인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패전해 전사한 고개로도 유명하다. 온달은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의 남편으로 영양왕 1년인 서기 590년 계립령 고갯길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장사를 지내기 위해 군인들이 관을 옮기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이미 생사가 정해졌으니 돌아갑시다”라고 호소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고 전한다.
온달에게는 계립령이 고개 너머의 신라를 정복하지 못해 원한이 사무친 길이고, 길을 낸지 400여 년 후까지 고구려와 신라가 영토를 서로 확장하는데 절대 필요했던 교통로였다. 또한 고대 한반도의 남부와 중,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제일의 국가대로였다. 온달장군 전쟁 후 신라는 계립령길을 문경∼중원∼충주∼음성∼장호원∼한강중류로 연결하는 중부행 교통로로 발전시켰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계립령 교통로
조령길의 제3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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