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61311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
연오랑세오녀연구소 개최 제 1회 한·일국제세미나 열려
10.10.14 13:59 l 최종 업데이트 10.10.14 14:49 l 고진숙(hangval)

최근 포항에서는 매우 재밌는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경북일보 부설 연오랑세오녀연구소가 개최한 제 1회 한·일국제세미나가 그것입니다. 모든 설화가 그렇듯이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도 실제 역사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이 세미나의 취지일 것입니다. 

이 설화가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두나라의 고대사를 잇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세미나 한 번이 이 설화의 진실을 다 밝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포항에선 고대부터 매해 10월에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를 간직한 일월제가 열려왔고 최근들어 신화와 설화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이 더 커진만큼 앞으로 많은 연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국의 신화와 설화를 역사공간속으로 끌어오는 일을 해볼까 합니다.


▲ 연오랑과 세오녀상 경북 포항에 있는 해맞이 공원에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을 담은 입상을 만들었다. 2년에 한번씩 10월에 일월제도 열린다. ⓒ 포항시,정창윤

1.
연오랑과 세오녀는 일본에 도착해서 일본에서 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으로 보아 신라의 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망명이나 이주를 선택한 것이 신라에게도 타격이었는지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두고 연오랑이 천문학자여서 연오랑이 떠나자 일식을 예언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에서 해의 신과 달의 신 그리고 제철의 신과 베짜기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으로 보아 특별한 기술을 가진 기술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태양숭배 부족장의 망명으로 보기도 하고, 연오랑이 직업이 어부였다는 것을 토대로 치유능력을 가진 샤먼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설화를 담은 곳이 포항의 일월지라는 연못인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던 행사의 사제자로 보기도 합니다.

이런 분분한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이 설화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들이 신라를 떠난 때가 아달라왕때인 157년이라고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신라로서는 큰 사건이었기에 설화에 담아 남긴 것이지요. 설화는 문자가 없었을 때나 글로 기록을 남기기 어려운 상황일 때 사건을 후대에 남기는 하나의 방식이니까요.

2.


▲ 일월지 옛날 상고시대 신라시대로부터 [해달못]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부터 한자식으로 부르게 되어 일월지라 부르고, 또 해와 달의 빛이 다시 돌아왔다고 광복지라 불렀다고 한다 ⓒ 포항시

이 설화는 영일만의 해맞이 축제와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영일만은 경주를 가로지르는 형산강을 따라가면 동해와 만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아진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진포란 석탈해가 한 노파에 의해 발견되고 길러져서 이후 경주로 진출하여 왕이 되게 한 발판이었습니다.

신라의 동쪽 아진포(지금의 영일) 바닷가에 한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살았는데,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어미였다. 노파는 배를 바라보면서,"이 바다에 바위가 없었거늘 웬 까닭으로 까치가 모여 우는가"라고 하며, 날랜 배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까치는 한 배 위에 모여있었다. 배 안에 궤짝 하나가 실렸는데, 길이가 20자요 너비가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 수풀 한 귀퉁이에 두었지만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하늘을 향해 맹서를 하자 곧 열렸다. 그 안에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와 일곱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7일 동안 먹여주었더니 그제야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삼국유사

노파란 고대사회에서 '제사장'에 버금가는 역할을 가진 '신관'의 은유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파가 석탈해를 길렀다는 것은 영일만 일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신라에 속한 고기잡이 마을의 제사장이 아진의선이라는 노파였던 것이지요. 이곳의 제사장은 해와달이 뜨는 곳에 사는 사람들답게 해와달에 대한 숭배의식을 치렀을 것입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석탈해 혼자 망명해온 것이 아니라 철기기술자집단을 대동하고 온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이곳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 힘으로 석탈해는 경주까지 진출해서 결국 왕이 됩니다.

그런데 석탈해 신화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바위'입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모두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까치는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주는 다리인 '오작교'를 만들어주는 새인만큼 우리나라 신화와 전설에서는 감초같은 조연입니다. 까치는 '이름없는 민초'의 은유로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고, 역시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에서도 의미있는 조연으로서 이 민초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제철기술자인 석탈해집단이 타고 온 배에 동승하였던 까치가 연오와 세오라고 불리었던 것이지요. 석탈해 가문이 경주로 진출하였다고 해도 그 기반의 일부는 이렇게 포항에 남아 해와신을 숭배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오와 세오는 그 발음으로 보아 납과 쇠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일본에 도착해서 제철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여기에서 연유할 것입니다. 특히 이들이 타고 갔다는 바위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신빙성을 보태줍니다만 역시 이 바위도 삼국유사에서 표현한 바위와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 연오랑이 타고갔다는 바위 일본에서는 연오랑과 세오녀를 철기기술을 전해준 사람으로 숭배한다고 한다.지금도 철기기술을 비롯한 각종 문화를 전해준 것은 우주에 우주선을 쏘아올린것 만큼이나 위대했다고 비유한다. ⓒ 경북일보

그러면 이들이 왜 떠났고, 그로 인해 왜 신라는 해와달을 잃었다고 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달라왕이 지배하던 시기의 신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때 석탈해의 석씨가문은 박씨가문이 왕위를 잇던 신라에서 소외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박씨가문은 전통농경사회를 바탕으로 왕이 된 가문입니다. 이들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철기시대의 냉정한 법칙인 정복과 지배에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가문을 존경했습니다. 그 질서를 무너뜨릴 힘이 막 사로국 정계에 진출한 석씨가문에겐 없었습니다.

석씨와 박씨가문의 왕위다툼 싸움이 그 유명한 이빨자국 싸움입니다. 떡을 깨물어서 이빨자국이 큰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때부터 사로국의 수장은 이사금이라고 했고, 이것이 이후 음가가 변환되어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얘기일 것입니다.

여기서 왜 석씨가문이 그 우수한 철기기술을 가지고도 김수로처럼 신라(라기 보다는 사로국)을 장악하지 못했는지 보입니다. 이빨자국은 단지 은유였을 것입니다.

이빨자국이 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긴 합니다. 다른 문명들 속에서 수장을 뽑는 절차에 이런 것이 있다면 매우 수월하겠지만 그런 연구논문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나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일본의 종교학자가 인디언들의 추장선거방식을 소개한 글에 힌트가 엿보였습니다. 박혁거세의 등극과 연관해보면 이 힌트는 매우 의미심장하였습니다.

인디언들은 추장이 되길 꺼려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너무 고달파서였다고 해요. 이사금시대가 계속될 동안 왕이 되길 고사하는 일이 정말 많이 벌어지는데 아마 동일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토록 왕이 되길 꺼려하는 조건은 '가진 것을 남에게 줘라'라는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달라면 무조건 주는 것이지요. 옷도 벗어주고 먹을 것도 줘야 했습니다. 이런 것을 박혁거세 신화에서는 '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박혁거세에 대해 살아서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권력자요 죽은 뒤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가 아니라 '성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디언들이 추장이 되기 위한 다른 조건은 바로 '말빨이 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설득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요 바로 이것이 '이빨의 크기'가 아닐까요?

사로국의 6촌 사람들은 수장을 뽑을 때 한자리에 모여서 추대합니다. 사로국판 아크로폴리스라고 할 만한 장소에서 석탈해와 유리왕은 '정견발표'를 했고, 사람들은 유리왕을 선택했습니다. '이빨이 쎄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우리가 말빨이 쎈 사람을 이빨이 쎄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석탈해는 호공이라는 강력한 귀족의 권력을 탈취하면서 평화로운 사로국을 정복과 지배의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가진 힘인 제철기술은 당시 왕인 남해차차웅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던 터라 사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삼국이 쟁투를 벌이던 시대와는 동떨어진 채 고구려도 백제도 각각 작은 소국시대였기에 강력한 석탈해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매제인 유리왕에게 '덕'과 '이빨'에서 밀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유리왕때 '한가위'의 전통이 시작되었는지도 이해하게 해줍니다. 철기문명에 맞선 농경문명의 단결력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은 박씨 가문을 정점으로 하는 사로국 사람들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마당이니 석탈해가 유리왕을 누르기란 쉽지 않았지요.

유리왕이 죽은 뒤 석탈해는 왕이 되었지만 석씨가문은 사로국사람들에게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권력욕을 버릴 생각이 없는 석탈해는 초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 신라사회를 송두리째 바꿔버렸습니다. 그의 권력욕은 새로운 권력자를 불러들였고, 그 권력자가 앞으로 세상을 지배할 것이었으니까요. 

4.

궁지에 몰린 석탈해의 선택은 연합전술이었습니다. 김알지가 왜 이시대에 석탈해에 의해 길러졌다고 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것이지요. 엘리아데는 '인간의 문화적 창조물에는 틀림없이 어떤 감추어진 비밀이 있다'고 했는데 김알지의 탄생설화 속에 감추어진 비밀은 그것이었던 것이지요. 

김알지 가문은 석탈해와 같은 제철가문이지만 오래전에 내려와 이미 계림이라는 숲을 장악한 강력한 가문이었습니다. 고대 제철가문은 대부분 이렇게 철광석을 얻기 쉽고, 땔감을 구하기 쉬운 숲속에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제철유적지가 있는 곳은 이런 곳이고, 서양에는 숲속에사는 도끼든 거인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것에서 영감을 받아 고대 제철유적지인 '타타라 유적'을 바탕으로 '원령공주'를 만들기도 합니다. 숲은 그래서 제철가문의 성지와 같은 곳이었지요. 김씨가문이 계림에 살았고, 계림을 숭배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 원령공주속 타타라제철소 미야자키 하야오는 타타라 제철소를 상상력의 보고로 여겨서 여러 곳에서 이미지들을 차용하였다. 원령공주는 가장 완성된 형태로 이런 상상력들을 모아냈다. 제철소의 입지, 제철과정,그리고 그들이 숲을 숭배하는 것들이 모두 고대 제철마을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지브리

하지만 사로국 사람들은 이런 강력한 왕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덕과 이빨싸움에서 석씨가문은 거듭 패배했지요. 석탈해이후 왕은 다시 박씨가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석씨가문은 한발 물러나 사태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무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일부 세력이 신라를 버리고 망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좋은 철'이 나는 곳을 찾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아진포를 근거지로 하던 최초의 정착세력 중 일부가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연오랑이라고 표현된 '연오집단'입니다.

연오랑은 일본에 도착한 뒤 사람을 보냈습니다.
'여기, 좋은 철도 많고 사람들이 우리를 반겨준다네. 얼른 넘어 오게나.'
이런 소식이 아진포에 도착했고, 망설이던 사람들이 또다시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뒤따라간 세오녀라고 말해지는 '세오집단'입니다. 연오와 세오는 석씨가문과 함께 이주해와 정착한 뒤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 중 한갈래로 보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하고 생각한 것이지요.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탈은 신라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석씨가문의 힘은 강했고, 그 힘의 배경은 제철기술이었습니다. 피부로 느낄 만큼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한반도에서 제철기술자의 이탈은 사로국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러다 전쟁이 나면 누가 무기를 만들지?' 소문은 빠르게 경주를 훑고 지나갔고, 사태는 겉잡을 수 없었습니다.

붙는 불에 기름을 붓듯이 때마침 일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두가 해와 달이 뜨는 곳에 사는 제철집단 연오랑과 세오녀의 망명으로 인한 저주로 여겼습니다. 

박씨가문은 영광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시대는 철기시대, 즉 정복전쟁의 시대였으니까요. 고대국가로 가는 유일한 승차권은 우수한 철기와 강력한 군대를 가진 나라에게만 주어졌습니다. 농경적 전통을 가진 박씨가문에게 이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석씨가문에게 손을 내밀리는 없는 법. 누가 호랑이를 불러들이려하겠습니까? 그래서 선택한 가문이 김씨가문. 철기와 군대를 가진 김씨가문은 마침내 정계의 핵심부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파진찬에 오르며 때때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의 군사를 기꺼이 이끌고 나온 사람이 김알지의 후손인 구도입니다. 이것이 아달라 이사금 19년의 일이었습니다.

5.

김알지 가문은 외부인이었습니다. 사로국 중심부 사람들에게 이 가문은 용병과 이웃이었다가 차츰 친구가 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니라 자신과 이미 혼인을 통해 연합한 석씨가문을 선택하는 편이 훨씬 더 권력의 심장부로 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의 어머니의 가문으로서 말이지요.

석탈해는 자신의 아들인 구추를 김씨가문과 혼인시킴으로써 이 연합전술을 완성시키려 했지만 이때에 두 가문은 세간의 인심을 얻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구추의 아들인 벌휴는 양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 할 수 있었습니다. 국경이 맞닿을 만큼 강력해져가는 백제의 힘은 신라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으니 두 제철가문의 연합하에 낳은 이 아들의 미래가 '왕좌'라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이데올로기와 실력과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전통사회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는 법이었지요. 바로 이때 사건이 터졌습니다. 연오와 세오의 이탈소식과 일식이 경주를 뒤숭숭하게 한 것입니다. 석씨-김씨 연합가문은 이것이야 말로 하늘의 준 기회라고 여겼고,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연오와 세오가 돌아오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력한 청원이 빗발쳤습니다. 아달라 이사금으로서는 난감했지만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연오과 세오 집단은 귀국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온화한 날씨와 지천으로 널린 철광석이 반기는 곳이었으니 누가 돌아가 다시 힘든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지려 할까요.

이 사건이 있은 후 경주의 민심은 박씨가문에게서 돌아섰습니다. 다시 벌어진 박씨가문과 석씨가문의 대권선거에서 이빨이 큰 사람은 석씨가문을 아버지로 하고 김씨가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벌휴였습니다. 아달라 이사금을 끝으로 박씨가문의 왕위계승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농경집단의 패배와 철기집단의 승리의 의미를 넘어 한국사를 뒤바꾼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석씨가문도 결국은 김씨가문에 의해 막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죽엽군 설화와 박제상 설화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두 이야기의 배경이 구도의 아들인 미추왕과 손자인 내물왕의 이야기이니까요.

결국 일본으로 망명한 연오랑과 세오녀가 보내왔다는 '비단'은 날실과 씨실이 정교하게 짜여져 고급스러운 까닭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직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날실로 상징되는 석씨가문과 씨실로 상징되는 김씨가문이 만들어낸 새로운 질서를 상징했던 것입니다.


▲ 세오녀 사당 일본에 있는 세오녀를 모신 사당으로 비단짜는 신으로 받들어 지지만 아픈사람을 치유하는 영험도 있다고 한다. ⓒ 경북일보

**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

제 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에 동해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를 채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혹은 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함) 있어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는 예사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며 왕으로 삼았다.

세오녀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고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또한 그 바위에 오르니, 바위가 또 전과 같이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이 놀라고 의아하게 여겨서 왕에게 바치자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 때 신라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와 같은 괴변이 있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니, 연오랑이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짐의 비가 짜놓은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라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와서 아뢰고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되었다.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았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 )라고 하였으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의 이름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제 1권 <기이(紀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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