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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구려 전쟁 증후군
“살아 돌아갈 수 없는 세상 끝” 수나라 `恐<두려울 공>고구려' 바이러스
2011. 01. 05   00:00 입력 | 2013. 01. 05   06:16 수정

본지는 새해를 맞아 한반도는 물론이고 중국 대륙과 일본까지 고대 동아시아 세계 전체를 격동으로 몰아넣었던 7세기의 전쟁사를 실감 나게 풀어나가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 대전' 연재를 신설합니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백제 부흥 전쟁과 일본 원군의 참전, 나당전쟁과 당-티벳 전쟁 등 7세기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들은 동아시아의 세계 질서를 바꾼 대전쟁이었습니다. 고대 전쟁사 전문가인 서영교(사학 박사) 중원대 박물관장이 집필하는 새 연재물을 통해 7세기 격동의 시대를 되짚어 봄으로써 급변하는 21세기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우리나라가 생존할 수 있는 역사의 혜안을 얻고자 합니다. 편집자

고구려가 612년 살수에서 수나라군을 대파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 필자 제공
 
1400여 년 전 중국 농민들은 “요동(遼東)에 가서 억울하게 죽지 말자”라는 노래를 불렀다. 

612년 가을 파죽지세로 진군해 왔던 수나라군 30만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 북쪽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오는 동안 고구려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그들에게 평양성이 바라다 보이는 그곳은 ‘희망봉’이었다. 고구려군들은 전국에 산재한 산성에 흩어져 있었다. 수나라 30만 대군은 조금만 진군하면 그들에 비해 소수 병력이 지키고 있는 평양성을 함락시킬 터였다. 

수나라 병사들은 300년간 분열됐던 중국을 하나로 통합시킨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들이었다. 전쟁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약탈이었다. 그들은 생각했다. 고구려왕의 화려한 궁정과 귀족들의 대저택이 우리의 사냥감이다. 맹수로 변해 그곳을 향해 달리면 된다. “원하는 대로 가져라!” 두 팔 가득 보물을 빼앗고, 가능하다면 후궁으로 달려가 미녀를 안고 싶다. 

하지만 급보가 도착하자 모든 꿈이 깨졌다. 그들에게 줄 식량과 군수품을 적재한 수나라 보급선단이 대동강 입구에서 고구려군에게 저지됐다는 소식이었다. 그 선단을 맡은 내호아는 평양성으로 접근하다가 고구려왕의 동생 건무의 작전에 걸려 수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해안으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수나라 병사들은 배가 고파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평양성의 방어도 철통같이 견고해 보였다. 상륙한 수군과 육군이 합류해 평양성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갑자기 꼬였다. 먹지 않고는 싸울 수가 없다. 

수나라 군 진영에 고구려 사신이 찾아왔다. 군대를 철수하면 고구려왕이 친히 요동에 있는 수양제에게 가서 항복을 하겠다는 전갈이었다. 후퇴의 명분을 주겠다는 의사였다. 물론 말처럼 고이 보내줄 고구려가 아니었다. 을지문덕은 청천강에서 수나라 군대를 섬멸하겠다는 작전을 이미 세워 놓은 상태였다.

고구려에서 철수를 하기 위해 청천강 남쪽에 30만 명의 수나라 군대가 모여 있었다. 그 넓은 강가의 모래사장이 좁아 보였다. 초췌해진 그들은 비까지 맞았다. 굶주림과 피로에 찌든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지긋지긋한 고구려 땅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들은 체력적으로 심각하게 고갈돼 있었고, 정신적으로 극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평양에서 청천강까지 오는 데 밤마다 습격을 당하고, 산등성이에 숨어 활을 쏘는 바람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었다. 굽어진 길을 돌고 고개를 넘으려고 할 때마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몰라 공포에 떨었다. 북경에서 평양까지 2000리를 행군하고 돌아선 그들은 거지 떼였다. 땀에 젖은 더러운 군복은 너덜너덜했다. 

수나라 군대가 청천강을 반쯤 건너갔을 때였다. 고구려군이 대규모로 급습해 왔다. 심리적으로 수나라 군대는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지휘관들과 자신의 동료 반 이상이 이미 강을 건넌 상황에서 어떻게든 강을 건너려는 생각뿐이었다. 

“고구려군이 왔다!” 하는 외침과 함께 15만의 군대가 강을 향해 모두 달렸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이 넘어졌고, 그 위를 수만의 병사가 밟고 지나갔다. 계급이란 것도 없어졌다. 위엄 있던 장군도 충성스러웠던 병사도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려는 일념밖에 없었다. 

강물이 수나라의 군사로 가득 찼다. 수영을 하기도 힘들었다. 옷은 물이 스며들면서 무거워졌고, 힘이 빠져 익사자가 속출했다. 모두 살려는 욕망에 동료들의 다리를 잡았다. 강에 들어가지 못한 병사들은 고구려 기병의 공격에 희생됐다. 

앞서 강을 건너간 15만은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갈 길이 아직 멀다! 청천강보다 훨씬 넓은 압록강과 그 너머에 고구려의 산성들이 빽빽한 그물 망처럼 펼쳐져 있다. 그들은 급속히 와해됐다. 지휘관의 명령과 통제도 듣지 않았다. 장군도 병사도 뛰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그들을 사냥했다. 수나라 병사들은 들판에서 속절없이 죽어갔다. 

요하를 무사히 건너간 생존자들도 있었다. 30만5000명 가운데 2700명이 살아 돌아갔다. 지옥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그러지 못한 자의 가족들에게 고구려에서의 비극을 말했고, 공포의 씨앗을 수나라 전국에 뿌렸다. “우리 병사들의 시체가 청천강에서 요하(遼河)까지 깔려 있습니다.”

생존한 수나라 장군의 ‘고구려 탈출기’가 ‘수서(隋書)’ 설세웅전(薛世雄傳)에 남아 있다. “백석산이란 곳에서 고구려군에게 겹겹이 포위됐다. 고구려군은 활을 쏘아댔다. 포위돼 고정된 상황에서 수나라 군대는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죽어갔다. 전멸의 위기에 봉착한 설세웅은 기병 200명과 함께 겨우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수양제는 3차에 걸친 고구려 침공을 위해 많은 병사들을 징집했고, 병역 기피자도 수없이 발생했다. 굶주림과 조세 수탈에 지쳐버린 백성들 가운데 도적 떼로 변한 자들도 있었다. 산동 추평(鄒平)의 농민 왕박(王薄)의 봉기가 도화선이 돼 농민반란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왕박은 태산(泰山)의 지맥인 장백산(長白山)에 숨어 “요동에 가서 억울하게 죽지 말자”라는 노래를 퍼뜨려 군역에서 도망하는 사람들을 포섭했다. 

살수대첩 이후 중국인들에게 고구려는 세상의 끝이요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그러한 곳이 됐다. ‘수서’ 유원전을 보면 양현감(楊玄感)이란 인물은 “(수나라 황제인 양제는) 천하의 사대부를 … 절역(絶域)의 땅(고구려)으로 내몰았다”라고 비판하면서 반란을 선동했다고 한다.

허청웨이의 저서 ‘중국을 말한다’를 보면 당시 수나라 인구가 약 4600만 명으로 집계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젊은이 30만2300명이 단 몇 달 사이에 고구려에서 전사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전몰을 기록한 사건은 전근대 역사에 없었다. 세계 최대제국 수를 붕괴시킬 만한 충격이었다. 

모든 중국인들은 수양제의 연이은 고구려 침공계획에 대해 불안하다 못해 ‘노이로제 증세’를 보였다. 3차 고구려 침공이 실패로 끝난 다음해인 615년 북방지역을 순행하던 양제가 침입해 온 돌궐기병 수십만 명에게 산서성 대현(代縣) 소재 안문군성(雁門郡城)에서 포위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치통감’ 권182, 대업(大業) 11년 8월 조를 보면 민부상서(民部尙書) 번자개(樊子蓋) 이하 여러 신하들은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 중지를 강력하게 건의했다. “폐하께서 또다시 요동(고구려)을 정벌하지 않는다는 유시(諭示)를 내림과 동시에 (사졸들에게) 후히 상을 내린다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장사들의 마음은 폐하가 돌궐의 환난을 벗어나면 다시 고구려 정벌을 갈까 봐 두려워하고 있으니, 고구려 (정벌을)를 중지하고 오르지 돌궐(突闕) 토벌에 전념할 것을 약속한다면 군사들이 모두 마음이 안정돼 스스로 싸우고자 할 것입니다.” 

수양제도 사정이 절박해 그 말에 따랐다. 중국인들은 막강한 유목제국 돌궐보다 고구려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다. 전군에 만연해 있던 ‘고구려전쟁 증후군’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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