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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좌초된 평양성 회담
나당연합의 힘, 고구려를 궁지로 몰았다
2011. 09. 28   00:00 입력 | 2013. 01. 05   07:13 수정

김춘추가 연금된 후 회담은 결렬됐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신라의 병력 지원 요청에 대한 연개소문의 거절이 고구려를 망국의 벼랑으로 밀어 넣었다고도 할 수 있다. 후에 신라왕이 된 김춘추의 노력으로 660년 나당연합이 성립됐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모든 것이 결판이 난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하지만 당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던 미래였다. 고구려의 `죽령 서북 영토 반환'요구는 김춘추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땅은 현 수도권과 강원도 지역 전체에 해당된다. 하지만 고구려가 조건 없이 신라를 도와 백제를 약화시킨다고 한들 신라의 배신은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이 연개소문의 판단이었다.

온달이 전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단양 온달산성의 모습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을 보면 시신을 넣은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자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됐으니, 아아 돌아갑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단양군청 문화체육과 제공                                                                                         
 
고구려가 보기에 신라는 국가 간의 신의칙을 지키지 않은 상습적인 신용불량자였다. 551년 고구려가 내분에 휩싸이자 신라는 백제와 함께 북진했다. 신라는 강원도 지역을 점령했고, 백제는 475년에 상실한 경기도 지역의 한강유역을 수복했다. 

553년 신라의 본색이 드러났다. 신라는 동맹국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지역을 급습해 점령했다. 이듬해 백제의 분노에 찬 반격이 있었지만 성왕이 전사하고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568년 내분을 청산한 고구려는 지금 함경남도 원산까지 들어온 신라군을 강원도 고성까지 밀어냈고, 임진강을 건너 한강까지 몰아붙였다. 

582년 중원에서 변화가 있었다. 수나라의 주인 수문제 양견은 돌궐에 평화를 조건으로 해마다 무상증여했던 엄청난 양의 비단을 끊었다. 비단을 페르시아와 동로마제국 등에 유통시켜 거래의 이익을 취했던 동서 돌궐이 군대를 일으켰다. 

동서 돌궐의 칸이 이끄는 40만 유목기병과 북제(北齊)의 잔당인 고보령(高寶)의 말갈, 거란의 기병이 만리장성을 넘었다. 전황은 수에게 불리했다. 수문제의 황태자 용(勇)이 함양(咸陽)에 군대를 주둔해 대비할 정도로 위험했다. 582년 12월 난주(州)가 함락돼 수나라의 수도권 지역까지 위협받았다. 

상황이 반전됐다. 서돌궐의 중국 원정을 틈 타 중앙아시아의 호탄, 이란의 사산조 페르시아, 남러시아의 에프탈 등이 그 본거지를 공격했다. 서돌궐의 타르두쉬 가한이 중국에서 철수했다. 동돌궐의 이쉬바라칸 역시 초원으로 귀환했다. 돌궐 북방의 키르키스와 만주 방면에서 고구려가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수서’에 고구려 평원왕이 말갈 기병을 동원해 동돌궐 이계찰(移稽察)의 군대를 격파한 기록이 보인다. 돌궐에게 잠식당한 거란과 말갈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불리한 상황에 놓인 돌궐 본거지 초원에 자연재앙까지 겹쳤다. 한발은 기근을 가져왔고, 내분으로 이어졌다. 585년 수문제는 돌궐 칸들의 내분에 개입했다. 이로서 초원에 대한 수나라의 우위가 확보됐다. 

고구려 평원왕은 돌궐의 약화가 수의 중국 통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인지했다. 돌궐과 왜국에 대한 고구려의 국제정치가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587∼588년 고구려의 사신이 왜국에 갔고 왜국의 사신 아배(阿倍比等古臣) 등이 고구려에 왔다. 고구려는 전부터 신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왜가 규슈(九州)에 대군을 집중시킬 것을 요청했다. 

당시 수는 이제 막 중국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남조 진(陳)은 약체였다. 호수 약 50만, 인구 200만 명에 불과했다. 화북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나타나면 강남(江南)의 할거 정권은 언제까지나 독립을 보전하기 어려운 형세였다. 수나라의 욱일승천을 본 진나라의 황제 진숙보(陳叔寶·재위 582∼589)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락에 열중했다. 

587∼588년 고구려에 왔던 왜국 사신이 귀국했을 즈음 진은 멸망했다. 수가 중국을 통일한 직후인 591년부터 595년까지 4년 동안 왜국은 규슈에 병력 2만을 집중시켰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전한다. “2만여 군사를 이끌고 쓰쿠시(筑紫)에 머물게 했다.”

위기를 느낀 신라 진평왕은 수도의 요새화 작업에 들어갔다. 591년 남산성을 축성하고, 593년 명활산성과 서형산성을 쌓았다. 거대한 인력동원이었다. 둘레 3000보에 달하는 남산신성과 명활산성 축성에는 각각 1만2000명, 2000보에 달하는 서형산성 수축에 약 1만 미만이 동원된 것으로 단순 추정된다. 

신라의 주력도 동남해안에 집중 배치돼 왜군의 상륙에 대비했다. 왜국이 신라의 병력이 남쪽에 묶이자 고구려군이 남하했다. 삼국사기는 그 선봉 온달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계립현과 죽령 이서의 땅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나아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고구려 군대가 단양까지 깊숙이 들어와 전투가 벌어졌다. 

온달의 출정 시기는 왜가 규슈에 병력을 집중시킨 591년 11월 직후의 일로 보인다. 온달은 철원∼춘천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원주 부근의 영서지역까지 점령하고,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단양 영춘면(乙阿旦縣)의 아단성을 공격한 듯하다. 철원∼춘천∼홍천∼원주∼제천∼단양으로 이어지는 현재 중앙고속도로와 일치되는 루트다. 왜의 견제로 강원도 영서지역에 신라가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던 상황을 여실히 반영한다. 

남쪽에서 신라의 역량을 소진시킨 고구려는 598년에 말갈 기병 1만을 동원해 수나라의 요서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이전부터 수나라가 말갈과 거란 여러 부족의 이탈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말갈과 거란은 고구려의 주요 기병자원이었다. 

그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수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원(영양왕)이 말갈의 무리 1만여 명을 이끌고 요서를 침입했다. (중략) 고조(수양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 한왕 경(璟)을 원수(元帥)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해 고려를 치게 했다. (중략) 이때 군량수송이 중단돼 먹을 것이 떨어지고 또 군사가 임유관을 나와서는 전염병을 얻어 기세를 떨치지 못했다.” 

수나라의 군대가 기세를 떨치지 못한 것은 군량수송 차질과 전염병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때 동서돌궐이 수의 북방영역을 침공했다. 고구려 침공에 나섰던 한왕 양ㆍ고경 등 수나라 장군들은 요동에서 군대를 이끌고 초원으로 향해야 했다. 수나라 장군 두언(杜彦)이 돌궐의 남하를 막는 북방최전선 삭주의 총관으로 양소(楊素)는 영주(靈州) 행군총관으로 임명됐다. 서돌궐 달두칸과 동돌궐 도람칸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였다. 

598년부터 615년까지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요동전선에 군대를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신라가 이 틈을 타고 북진해 와 온달장군에게 잃었던 땅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에게 신라는 등만 돌리면 구멍에서 나오는 ‘쥐새끼’로 보였을 것이다. ‘수서’ 고려전은 전한다. “신라와는 늘 서로 침공하고 약탈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629년에도 돌궐은 내분에 휩싸였고, 수가 망하고 등장한 당나라가 패권을 잡았다. 그러자 신라는 다시 고구려의 영토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이 이끄는 신라 군대가 현 포천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신라는 현 춘천 지역까지 점령한 듯하다. 

637년 신라는 춘천에 우수정(牛首停) 사단을 배치했다. 김춘추가 평양에 오기 5년 전의 일이었다. 연개소문은 너무나 현실지향적인 신라를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김춘추는 세계 제국 당과의 전쟁을 앞둔 고구려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평양에 온 것이 아닌가. 

김춘추가 돌아간 이듬해 연개소문은 신라를 공격했다. 직후 연개소문을 만난 당의 사신 상리현장은 신라에 대한 공격 중지를 요구했다. 거절은 당과의 전쟁을 의미했다. ‘자치통감’은 연개소문의 답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옛날에 수(隋)가 쳐들어 오자 신라가 틈을 타고서 우리의 땅 500리를 침략했는데, 스스로 우리에게 침략했던 땅을 되돌려 주지 않으니 전쟁을 중지할 수 없을 것이오.” 

연개소문의 신라에 대한 영토반환 요구와 당의 요구 거절은 그가 강경파라기보다 고구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에서 이뤄진 결정이었다. 육식 동물 같은 당제국은 요구를 들어 주어도 고구려를 침공할 것이고, 신라는 그 틈에 고구려를 공격해 올 것이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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