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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가잠성 공방전
백제 무왕, 對신라전 연패의 사슬 끊다
2011. 06. 22   00:00 입력 | 2013. 01. 05   06:55 수정

신라와 백제의 국경에 자리 잡고 있는 나제통문. 백제군이 이곳을 통해 덕유산을 넘어서면 성주에서 대구를 거쳐 왕경인 경주에 곧바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백제는 612년 나제통문 부근 국경 요지인 가잠성을 점령했다. 필자제공#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4만의 병력을 잃은 무왕은 이후 9년 동안 침묵했다. 현실 파악을 위해 그는 적국 신라의 진평왕을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 집요하게 생각했다. 작전을 감행했을 때 진평왕은 어떻게 대응할까? 무왕은 전투에서 진평왕이 직면했던 위기의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떠한 결정을 내렸고, 어떠한 요인이 그러한 결정을 하게 했는가를 고민했다. 

전쟁에는 끝없는 피로·공포·결핍과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부상의 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다. 병사들이 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 전쟁을 치르게 하려면 왕의 휘하에서 최선의 이익이 보장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줘야 한다. 승리를 위해 왕이 인명손실을 최소화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는 것을 병사들이 알게 해야 한다. 그것은 군사들이 왕에게 보내는 신뢰로 이어질 것이다. 신뢰는 병사들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투혼을 불러내는 열쇠다. 왕은 병사들 마음속의 정서를 정확히 파악해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무왕은 충분한 준비가 될 때까지 대응을 하는 일이 없도록 장군들에게 주지시켰다. 605년 8월 신라가 동쪽 변경을 도발했고, 607년 5월 고구려가 송산성을 공격해 성과가 없자 석두성을 습격해 남녀 3000명을 잡아갔다. 하지만 군대를 일으키지 않았다. 

무왕은 끊임없이 군대를 독려해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소백산맥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소모할 수 있는 보급품을 충분히 축적해 놓아야 했다. 장기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한 곳에 전력을 집중시켜 돌파하기 위해 모두 소모할 것들이었다. 

611년 수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 수의 동맹국인 신라가 북쪽 국경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무왕은 신라의 서쪽인 무주로 군대를 진군시켰다. 목표는 나제통문을 지키고 있는 가잠성이었다. 행군의 뒤에는 병력만큼 많은 군수물자가 따라왔다. 백제군이 다가오자 신라의 백성들이 가잠성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무왕은 그들을 굳이 막지 않았다. 백성들은 성 안의 식량을 축낼 것이다. 

가잠성 부근에 도착한 백제군은 싸우지 않았다. 먼저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성을 둘러싸는 호를 2중으로 파기 시작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켰다. 성 안에서 문을 열고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뒀을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신라 구원군이 접근해 오는 것도 미리 고려했다. 

성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백제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그냥 성을 고립시켜 굶겨 죽일 작정이었다. 100일이 지나자 성 안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 비가 오지 않아 물도 고갈됐다. 

성 밖의 백제군이 밥을 지을 때 나는 연기는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성 안에서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장면들이 벌어졌다. 굶어 죽은 말과 소는 뼈만 남겨졌고, 전사하거나 아사한 사람이 나와도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굶주린 사람들은 죽은 자의 살을 발라 먹었다. 그것도 모자랐다. 물이 없어 오줌을 받아먹었고 나중에는 그것도 귀했다. 

어느 날 신라의 원군 3개 사단이 도착했다. 신라에는 6정(六停)이라는 군단이 있었다. 6정 중 한산정은 지금의 서울, 우수정은 춘천, 하서정은 강릉, 상주정은 상주, 하주정은 합천, 대당은 왕경인 경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6개 사단에 비유할 수 있는 부대였다. 그 가운데 상주정·하주정·한산정 등 3개 사단이 함락되기 직전에 있는 가잠성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 

성 안에 있던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갔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미 아사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영양실조로 약해져 있었다. 원군에 호응해 성문을 열고 나가 백제군과 싸울 전투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도착한 신라 구원군은 당황했다. 백제군이 신라 구원군이 올 것을 알고, 이미 요새를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구원군은 가잠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굶주린 전우들을 당장 도울 수도 없었고, 성 밖에서 이미 준비된 백제군과 싸워야 했다. 전투가 시작됐다. 하지만 신라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신라인들은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고서야 백제군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알았다. 무왕은 가잠성 주변에서 신라의 주력 군단 6정의 절반을 전멸시킬 준비가 된 상태였다. 

신라의 장군들은 이 점을 왕경의 왕에게 알렸다. 진평왕은 신라의 주력 사단이 타격을 받으면 신라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고 판단했는지 철수명령을 내렸다. 가잠성은 너무나 중요하지만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삼국사기’ 해론전은 철수하는 신라 원군을 보고 절규하는 가잠성주 찬덕(讚德)의 말을 전하고 있다. “3주(상주정·하주정·한산정)의 군대와 장수가 적(백제군)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않고, 성이 위태로운데도 구하지 않으니 이는 의리가 없는 행동이다.” 원군이 물러났는 데도 성주 찬덕은 항복하지 않고 싸웠다. 

612년 음력 정월 봄이 찾아왔다. 질긴 사투로 겨울을 보낸 사람들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고갈됐다. 더 이상 성을 사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삼국사기’ 해론전은 절망한 성주 찬덕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 왕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는데 이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돼 백제인을 다 물어 죽여 이 성을 되찾겠다! 그리고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 느티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찬덕의 자살은 전 신라에 퍼졌고 진평왕도 알게 됐다. 백제 무왕은 553년 관산성 전투 이후 연전연승했던 신라에 첫 패배를 안겼다. 그는 9년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4년 후인 616년 백제 무왕은 지리산 중턱의 운봉에 있는 아막성(모산성)까지 함락시켰다. 신라 조야는 크게 술렁거렸다. 

무주 덕유산 방면의 가잠성과 지리산 중턱의 아막성이 모두 백제 수중에 떨어졌다. 백제는 신라의 심장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2개의 고지를 선점했다. 진평왕은 2개 가운데 신라 왕경에 더 위협적인 가잠성을 탈환해야 했다. 지리산 중턱을 넘어서면 다시 가야산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백제군이 덕유산을 넘어서면 성주에서 대구를 거쳐 왕경인 경주에 곧바로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왕은 찬덕의 아들 해론에게 나마(麻)의 관등을 수여했고, 가잠성에 주둔한 백제군을 방어하는 최일선 부대인 금산당주(金山幢主)에 그를 임명했다. 찬덕의 아들에게 관등과 부대장의 관직을 수여한 것은 포상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잃은 가잠성을 아들이 탈환하라는 무언의 책임 부여이기도 했다.

618년 서울에 위치한 신라의 한산정 사단에 임무가 떨어졌다. 사단장인 변품은 진평왕에게 가잠성을 수복할 것을 명령받고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행군하던 변품이 추풍령을 넘어 현 김천에 도착했을 때였다. 전 가잠성주의 아들 해론이 그를 맞이했다. 

가잠성 부근에 도착한 그들은 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지루한 공성전에 들어갔다. 소식을 접한 무왕이 구원군을 파견했다. 성 밖에서도 성벽에서도 싸움이 벌어졌다. 전투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해론의 장렬한 전사에 관한 기록은 있다. 해론은 자신이 통솔하는 부대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삼국사기’ 전한다. “전일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셨는데 내 지금 이곳에서 백제군과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앞장서던 해론은 장렬히 전사했다. 신라군이 가잠성을 힘겹게 탈환했다. 

국가를 위해 순국한 부자(父子)의 이야기는 전 신라인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을 위해 사람들은 긴 장송곡을 불렀다. 소식을 들은 진평왕도 눈물을 흘렸다. 성을 지키지 못해 자살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이 죽었다. 왕은 살아 있는 해론의 가족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그 자식들의 미래를 보장했다. 왕의 입장에서 전쟁의 승리를 끌어내기 위해 순국지상주의적인 국가관을 조성하고 확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순국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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