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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무왕의 첫 출전
백제, 지리산 돌파 경로로 신라 공격 시도
2011. 06. 08   00:00 입력 | 2013. 01. 05   06:52 수정

전북 남원시의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아막성(산성)의 현재 모습. 600년대 초반 아막성 주변 일대에서 백제와 신라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자료 사진


백제의 원조로 창건된 일본의 법흥사(비조사). 백제는 문화적·물질적 원조를 제공하는 대가로 왜의 군사력을 활용했다. 현재 사찰은 백제가 원조해서 창건한 당시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소규모로 복원한 상태다. 필자 제공
 
들판에 곡식이 누렇게 익어 가는 가을, 추수의 계절이었다. 넉넉하게 군량을 보충할 수 있고 농한기가 시작되는 이 시기에 삼국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전쟁을 시작했다. 28개월 전 즉위한 무왕은 602년 8월에 위덕왕·혜왕·법왕 등 전대 3명의 왕에 대한 3년 상(喪)을 마쳤다. 그리고 군대를 일으켰다. 죽은 왕들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성왕의 전사와 이어진 패전의 아픔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다. 

목표는 지리산 중턱에 있는 아막성(阿莫城)이었다. 성은 현재 경남 함양읍과 전북 남원시 동면 경계 부근인 팔량치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고도는 513m이고, 북쪽의 상산(霜山)과 남쪽의 삼봉산(三峰山·1186m) 사이의 안부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 계곡을 흐르는 하천은 남강의 지류로 흘러들고, 서쪽 계곡을 흐르는 하천 중 하나는 광천으로 흘러든다. 물길이 도로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현재 남원∼함양을 잇는 국도와 88올림픽 고속도로가 이 고개를 지나며, 국도는 남강을 따라 함양에서 산청을 거쳐 진주로 이어진다. 

6세기 중엽 한강유역을 신라에 송두리째 빼앗긴 백제는 줄곧 한반도의 서남부에 고립돼 있었다. 백제는 자신들을 ‘ㄱ’자 모양으로 포위하고 있는 신라와의 군사경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한강유역 상실 직후인 554년 성왕은 공주에서 대전을 지나 옥천∼보은으로 진격해 상주로 들어가는 길을 뚫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국왕과 3만에 달하는 전사자를 남기고 좌절됐다. 이후 위덕왕대에도 두 번에 걸친 소백산맥 돌파 시도는 실패했다. 

옛 가야 지역서 반란 백제·왜가 빈틈 노려

무왕대에 와서는 무주의 나제통문과 지리산 운봉의 팔량치 돌파에 주력했다. 이곳을 돌파하면 신라 왕경을 정면으로 노릴 수 있어 정치적 효과가 컸다. 물론 무왕이 그곳의 지형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도 선택의 이유가 됐다. 

하지만 더 큰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무왕이 운봉을 첫 점령 목표로 삼은 이유가 더욱 선명해진다. 589년 중국이 수나라에 의해 300년 만에 통일됐다. 수나라와 접경한 고구려가 긴장했다. 려제(麗濟)의 견제를 받던 신라가 수를 돕겠다고 자원했다. 

고구려는 난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바다 건너 왜국을 이용했다. 595년 고구려 영양왕은 승려 혜자를 왜국에 보냈다. 혜자는 실력자인 쇼토구(聖德) 태자의 스승이 돼 왜국의 대외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시에 고구려는 막대한 물질적·문화적 원조를 왜국에 베풀었다.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588년 위덕왕은 재정을 털어 왜국에 물자와 장인을 보내 법흥사(비조사) 건립을 원조했고, 595년 백제 승려 혜총(慧聰)이 그곳에 머물렀다. 일본에 대한 삼국의 문화 전파는 베푸는 인심이 아니었다. 삼국은 생존을 위해 왜국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597년에 위덕왕은 동생 아좌(阿左)를 보내 향후 전쟁에 대해 논의하게 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원조는 왜국을 움직이게 했다. 

600년 왜국은 병력 1만을 동원했다. 후쿠오카에 집결한 왜군은 현해탄을 건너 구 가야 지역에 있던 신라의 5개 성을 함락시켰다. 당시 가야인들이 신라에 대해 봉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신라의 거짓 항복으로 왜군은 곧 철수했고, 봉기한 가야인들을 신라가 다시 소탕하기 시작했다. 이후 왜국의 재침을 우려한 신라는 주력 군대를 낙동강 하류 지역에 지속적으로 주둔시켰다. 혜택을 본 것은 고구려였다. 고구려 남쪽 국경의 긴장은 완화됐다. 하지만 백제에도 기회가 왔다. 

신라가 점령한 낙동강 서안과 그 지류인 남강유역의 가야 지역에 왜국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601년 3월 왜국의 왕은 백제와 고구려에 사자를 보내 낙동강 하류의 가야인들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긴장한 신라는 왜국에 간첩들을 파견해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대마도에서 체포됐다고 ‘일본서기’는 전하고 있다. 602년 2월 왜국은 신라를 치기 위해 쯔쿠시(筑紫·후쿠오카)에 2만5000명의 병력과 군수 물자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지리산의 서쪽 사면은 완만했다. 왜국의 요청에 의해 그해 8월 남원에 집결한 백제의 군대가 운봉으로 향했다. 신라의 주력은 왜군의 대규모 상륙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경남 함안에 묶여 있었다. ‘삼국사기’ 귀산전을 보면 그해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신하들을 도열시켜 놓고 통곡하는 진평왕의 모습이 보인다. ‘신라남산신성비’ 제1비에 보이는 ‘아량(阿良)’은 ‘아나’와 같은 표기이며 함안 지역이 확실하다. 

운봉의 아막성에는 소수의 병력만 지키고 있었다. 성은 금세 백제군에 의해 포위됐다. 고립된 성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농성이란 원군이 온다는 전제하에 의미가 있다. 지리산 중턱의 소식을 접한 진평왕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 

진평왕은 진군 속도가 빠른 수천의 기병을 함안에서 빼내 지리산으로 급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군을 방어해야 할 귀중한 전력의 증발이었다. 하지만 무왕이 지리산을 돌파하면 함양∼산청∼진주를 거쳐 함안으로 진공해 올 것이 분명했고, 최악의 경우 상륙한 왜군과 지리산을 넘어온 백제군의 협격을 받아 신라군 주력이 전멸할 수도 있다. 

왜군 출병 연기되자 신라군 아막성 집결

신라 기병은 운봉을 향했다. 지리산의 동쪽 사면은 급경사여서 행군이 쉽지 않았다. 신라군은 말에서 내려 걸었다. 일단 지리산 중턱에 이르자 말들을 휴식시켰다. 말이 최상의 컨디션 상태에 있어야 기병은 승산이 높아진다. ‘병장설’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날이 저물고 갈 길이 멀면 반드시 자주 말에서 내려야 한다. 차라리 사람이 피로할지언정 절대로 말을 피로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운봉은 기병이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분지였다. 신라의 기병이 백제군이 포위하고 있는 아막성으로 다가서자 성안에서 환호 소리가 흘러나왔고 백제군은 당황했다. 신라가 기병을 지리산 중턱까지 급파할 줄은 몰랐다. 백제군은 응전했지만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막성 안에서 신라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면 양면 공격을 받아 전멸할 수도 있었다. 백제군은 병력을 남원으로 돌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아막성을 포위했다. 신라왕 진평이 정예기병 수천 명을 보내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백제군에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또 이어졌다. 신라의 후발대가 운봉에 속속 도착했다. 파진찬 건품·무리굴·이리벌·무은·비리야 등이 이끄는 부대들이었다. ‘소감(少監)’급 장교들 가운데 귀산·추앙도 있었다. 공병부대인 대장척당(大丈尺幢)도 있었다. 아막성 주위에 소타성·외석성·천산성·옹잠성 등 4개의 요새가 건설됐다. 

무왕의 운봉 공격은 신라군에 그곳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 꼴이 됐다. 4개의 요새가 완성된 후에도 신라군은 증강되고 있었다. 당시 신라는 큐슈에서 신라를 향해 출발하려던 왜군의 출동이 연기됐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일본서기’를 보면 “(602년) 6월 래목황자가 병들어 누워 결국 (신라) 토벌을 하지 못했다”라고 하고 있다. 운봉전투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국제 역학적인 사안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왜국의 출병 취소가 백제에 당장 부담으로 돌아왔다. 무왕은 백제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좌평 해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보기(步騎) 4만의 대병력이 남원에 집결했다. 

신라의 5개 요새들은 바둑판의 알처럼 운봉의 분지에 집을 짓고 있었다. 절반이 무너진다고 해도 고개를 막고 있는 신라군의 방어력이 급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백제의 4만 대군이 운봉에 다가서자 신라군들이 아막성과 나머지 4개의 요새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싸움은 요새 앞 벌판에서 벌어질 참이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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