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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의자왕자 태자가 되다
외척 후원 덕에 왕위 계승한 `해동의 효자'
2011. 04. 20   00:00 입력 | 2013. 01. 05   06:43 수정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탑 바닥에서 발굴된 사리봉안기 7~8행에 백제왕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이 발굴로 의자왕의 어머니가 신라 출신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 사택왕후였음이 밝혀졌다. 자료사진

신라에서 덕만(德曼)이 선덕여왕으로 즉위한 그해 그달이었다. 632년 1월 백제에서는 무왕(武王)의 아들 의자(義慈)가 태자로 책봉됐다. 아버지 무왕이 즉위한 지 3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부여륭 묘지명’을 보면 의자의 아들 부여륭은 682년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륭은 615년에 출생했다. 의자가 아들보다 20세가 많다고 가정한다면 의자는 595년에 태어났고 태자가 될 당시에는 37세 정도로 추정된다. 평균 수명이 40세 이하였던 당시로서는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의자가 왕자로서 태자에 임명되는 것은 수많은 시험과 난관을 극복한 이후에 가능했다. 의자는 그의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 무왕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적어도 그가 왕위에 즉위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해야 했다. 그는 누구보다 옹골찼고 용감했으며,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는 우애가 있어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 불리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와 ‘당회요’에는 그를 해동증민(海東曾閔)이라 하여 증자와 민자(閔子)에 견줬다. 민자의 효행은 생모에게 효도한 증자보다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민자는 자신을 구박한 계모가 세상을 뜰 때까지 효도했다. 의자는 중국에서 바다 동쪽에 있는 한국 땅에서 최고의 효행을 한 해동의 효자 표상으로 이름이 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무왕은 여러 명의 처(妻)와 수없이 많은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백제는 전형적인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왕의 아들이라면 누구도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무왕 자신도 아버지 법왕의 첩들 가운데 하나의 소생이었다. 

의자에게는 이복형제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수많은 아들 가운데 하나를 태자로 책봉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누가 태자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무왕에게 딸을 준 각 귀족가문 가장들에게 초유의 관심사였다. 가장들은 자신의 딸이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무왕이 왕위에 즉위하고 33년간 태자 책봉을 미뤄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신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철저한 일부일처제를 고수했던 신라왕들도 첩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첩 소생의 아들은 왕위계승 후보자가 되지 못했다. 단 한 명의 정비가 낳은 자식들만이 왕위계승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신라에는 왕실의 조상신을 모신 시조묘나 신궁(神宮)이 있었다. 그곳에서 제사의식이 거행됐다.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근친 왕족들이었다. 

왕실 구성원의 종손인 왕이나 태자의 결혼의식(結婚儀式)도 왕실의 시조신 내지 조상신을 모신 장소에서 행해졌다. 왕가에 들어온 여자는 이러한 결혼의식을 통해 정비(正妃)가 됐고 그녀가 출산한 아들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아들은 종교적인 결혼의식의 결실이어야 했다. 그 아들만이 제사의식을 주관하는 왕이 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였던 진평왕은 54년을 왕위에 있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그에게도 적지 않은 첩이 있었을 것이고 그 소생의 아들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평왕에게 자식이 아니었고 애초에 자격이 없었다. 그들은 조상의 제사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고, 대를 이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진평왕이 아들이 없어 덕만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진평왕의 정비인 마야부인의 소생 가운데 아들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비인 마야부인 소생의 딸은 왕위계승권이 있었다. 

신라에서 여왕이 탄생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이 같은 사실상의 일부일처제 때문이었다. 신라 국왕은 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이혼을 해야 했다. 그것은 권리이자 의무였다. 불임인 정비가 그 자리를 비워 줘야 후처로 들어올 정비가 왕실 조상들 앞에서 결혼의식을 할 수 있었고 비로소 새로운 정비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백제 무왕은 누굴 태자로 삼아야 할 것인지 긴 세월 동안 생각해야 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왕실에 여자를 시집 보낸 가문들은 태자 책봉이란 게임에 매달렸고, 그들의 희망을 무왕은 이용했다. 그들은 무왕이 신라를 침공하는 데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순순히 내놓았다. 태자 책봉이 단번에 결정되면 희망을 상실한 귀족들은 왕에게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이었다. 무왕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귀족들 입장에서 새로운 왕의 즉위에 따라 권력 관계가 단숨에 바뀌게 된다. 그 전초전이 태자 책봉이다. 이때 귀족들은 태자, 나아가 그의 즉위로부터 자신들의 안전을 초미의 관심사로 여기며 비상하게 득실을 셈할 수밖에 없었다. 무왕이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 귀족들이 제일 안심할 수 있는 인물인 의자를 낙점하게 됐다. 

귀족사회의 이해 통합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여러 왕자들이 경합하는 상황에서 완덕(完德)을 지닌 의자의 품성은 귀족들을 안심시키기에 족했다. 의자는 특히 수많은 이복형제 간의 우애가 있었다. 의자에 대한 칭송은 즉위 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인적인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해동증민이라는 완덕은 의자가 왕자로서 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됐다. 그의 덕은 일반적인 평가였다. 의자는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귀족들까지 호의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의자에게는 여러 처의 자식들을 제외하고도 첩의 몸에서 태어난 41명의 서자가 있었다. 25년 후인 657년에 그들은 모두 좌평(재상)으로 임명됐을 정도로 장성해 있었다. 한 배(腹)에 남자만 2명 출산했다고 하더라도 20명 이상의 첩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의자는 왕자 시절부터 다양한 귀족 가문과 혼맥으로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귀족 가문들의 혼사의 대상으로 구매력이 있었다. 무왕의 원자(元子)로서 왕위계승 가능성이 높았고, 고상한 인격과 품성을 가진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가 태자가 된 후 귀족 가문들이 줄을 대는 경향은 더욱 가속화됐다. 의자왕의 즉위 기반의 하나는 혼맥으로 결속된 다양한 귀족 가문의 지지가 한몫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자왕의 어머니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였다. 그녀의 미모가 매우 뛰어나 의자의 아버지 서동(무왕)이 사모해 두 사람이 남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를 지어 신라의 왕경에 퍼뜨렸다고 한다.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돼 가던 중 서동에게 구출돼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됐고, 미륵사의 창건을 무왕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복원을 위해 해체 중이던 미륵사지 서탑에서 ‘사리봉안기’가 출토되면서 ‘서동요’는 믿을 수 없는 설화가 됐다. 2009년 1월 19일의 일이다. 새로운 기록이 발굴되면서 ‘삼국유사’ 서동설화에 등장하는 선화공주의 존재는 뿌리부터 흔들렸다. 새로 발굴된 기록의 일부는 이러하다. 

“우리 백제왕후(百濟王后)는 좌평 사택적덕(沙?積德)의 따님으로 오랜 세월에 착한 인연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바다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었다. 그 까닭으로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 정월 1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였다.”

무왕의 왕후는 사택적덕의 딸이었다. 그녀가 재물을 희사해 절을 짓고 사리를 봉영했다. 사택왕후는 의자의 생모였다. ‘수서’ 백제전에 사택씨는 백제 8개의 귀족 가문 첫머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택씨는 백제국의 최고위 관등인 상좌평 또는 대좌평이 많았다. 사택씨는 본래 충남 부여 지방에 기반을 둔 세력으로 백제 성왕(聖王)에게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를 적극 추진하게 했고, 사비천도와 함께 백제 최대의 가문이 됐다. 의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의 외가가 백제 최고의 가문 사택씨였다는 데 있다. 

백제왕들에게는 혼인으로 엮인 많은 귀족 가문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의 딸이 낳은 왕자의 즉위를 항상 열망했다. 귀족들은 자신의 외손자를 즉위시키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그것이 귀족들이 왕에게 경쟁적으로 충성하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백제를 분열로 몰고 가는 구조이기도 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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