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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백제 무왕과 왕흥사
선대왕의 복수' 꿈꾸며 12차례 신라 공격
2011. 05. 25 00:00 입력 | 2013. 01. 05 06:50 수정
부여 낙화암에서 바라본 왕흥사지의 모습. 634년 왕흥사 확장은 성왕의 비참한 죽음 이후 신라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백제가 완전히 힘을 회복해 신라보다 우위에 서게 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필자 제공
왕흥사의 건립 유래를 보여주는 왕흥사 사리구의 명문.
참혹한 전쟁이 반복되던 시기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634년 음력 2월이었다. 백제 수도 사비의 들과 산에는 신록이 드리우고 있었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강의 푸른 물 위에는 여느 때보다 크고 화려한 배들이 많이 떠 있었다.
사비의 왕성에서는 궁인들이 분주하게 오갔고 아침 일찍부터 귀족과 고위 승려들의 수레가 성의 정문에 연이어 도착했다.
입궐한 그들은 무왕의 집무실 앞 광장에 도열했다. 왕이 나오자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였고, 앞으로 나아가자 차례로 뒤를 따랐다. 무왕이 일생 동안 준비한 행사가 거행되려 하고 있었다. 장소는 왕성 앞 강 건너 대안에 있었다.
승려들의 범패(梵唄)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왕성 앞에서 선착장으로 이르는 길가에 백성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불교의식에서 사용하는 깃발인 번개(幡蓋)와 향화(香花)를 든 소년 소녀들이 앞장 선 화려한 국왕의 행렬에 눈과 귀가 집중됐다. 왕과 신하들은 왕성에서 선착장으로 가서 배를 탔다.
강 너머에서 왕흥사(王興寺)의 낙성식이 거행됐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봄 2월에 왕흥사가 낙성됐다. 절은 강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화려했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했다.” 왕흥사는 무왕이 즉위한 600년 정월에 수리·확장을 시작해 34년 만에 낙성된 불사였다.
왕흥사는 2007년 10월 24일의 발굴 성과로 새롭게 세상에 알려졌다. 왕흥사 목탑의 지반을 조사한 결과 가로·세로 1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의 존재가 밝혀졌다. 목탑의 심초석 부분에서 사리장엄구와 각종 장식품이 나왔다. 훼손되지 않은 완전한 모습의 사리용기에서 백제 위덕왕(554∼598)의 이름이 각인된 명문이 발견됐다.
왕흥사 사리구의 명문은 이러하다. “577년 2월 15일, 죽은 왕자들을 위해 백제왕 창(昌·위덕왕)이 입찰(立刹)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신이한 가호로 사리가 3매로 늘었다.” 577년 위덕왕이 왕흥사에 목탑을 세웠고, 왕 동생의 손자인 무왕(600∼641)에 의해 최종적으로 낙성된 사실이 밝혀졌다.
위덕왕은 45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누구보다 심적인 고통을 받고 살았다. 자신 때문에 신라와의 전쟁에서 아버지 성왕이 전사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야기는 5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백제 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함께 북진해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찾아야겠다는 열망이 있었다. 당시 고구려가 내분에 휩싸여 있었고 성왕은 놓칠 수 없는 기회라 여겼다.
신라의 결정은 쉽지 않았다. 고구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국이 힘을 합쳐서도 막아내기 벅찬 강국이었다. 지금 고구려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내전이 벌어졌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붕괴하거나 사라질 나라는 아니었다. 언젠가 서서히 힘을 되찾고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553년 신라가 어렵게 전쟁에 동참하기로 했다. 백제의 성왕은 북진해 쉽게 승리를 거두고 한강 하류의 5개 군을 탈환했다. 꿈에 그리던 한성 백제지역의 회복이었다. 신라군도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상류에서 고구려군과 싸웠다.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백제군이 한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고구려군은 물러났다. 신라군은 순조롭게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개 군을 차지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553년 동맹을 맺고 함께 북진했던 신라가 한성을 급습했다. 명백한 신라의 배신이었다. 신라에 밀린 백제군은 한성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신라의 장군 김무력이 이끄는 사단이 한성을 점령했다. 그는 김유신의 할아버지였다.
등에 칼을 맞은 백제 성왕은 분에 떨었다. 그러자 아들 태자 창(昌·훗날의 위덕왕)이 거대한 대가를 주고 가야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는 병력이 보충되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현 충북 옥천에 위치한 신라의 관산성을 향했다.
태자 창은 관산성 앞에 구타모라새(久陀牟羅塞)라는 요새화된 지휘본부를 세웠다. 그리고 관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처음에 거대한 돌이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성벽이 일부 무너지자 백제군들이 그곳을 향했다. 화살이 빗발치는 가운데 백제군이 성벽에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올라갔다. 전세가 불리하자 신라의 군주(軍主) 우덕과 탐지가 원군을 요청했다.
신라의 한성지역 사령관 김무력의 군대가 관산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들이 걱정된 백제 성왕은 휘하의 경호원 50명을 거느리고 전장으로 향했다. 움직임을 감지한 자가 신라 측에 있었다. 그는 옥천지방의 말 먹이는 노비(飼馬奴) 도도(都刀)라는 자였다.
성왕은 구천(狗川)이란 곳에 닿았다. 기다리고 있던 도도가 성왕 일행에 급습을 가했다. 경호원들이 모두 죽고 성왕이 홀로 포로가 됐다. 두 손이 결박된 성왕과 도도가 주고받은 말은 ‘일본서기’에 전해지고 있다. “백제의 왕인 내가 미천한 노비인 너에게 죽는 것이 억울하다.” “우리 신라에서는 국왕이라도 약속을 어기면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553년 성왕은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고 양국의 평화를 약속한 바 있다.
운명이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그에게 강요하자 성왕은 연방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을 포기한 성왕은 노비에게 자신의 칼을 주고 머리를 늘였다. 신라의 노비 도도는 성왕을 참수하고 역사에 그의 이름을 영원히 남겼다.
성왕의 죽음이 전해지자 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김무력의 원군이 도착하자 신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기세가 꺾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싸움 결과는 뻔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좌평 4명과 군사 2만9600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나라의 뿌리를 흔들어 놓은 패전 속에서 태자 창이 왕위에 올랐다.
얼마 후 위덕왕은 신라로부터 아버지의 뼈를 송환받았다. 머리가 없었다. 신라 왕경의 북쪽 관청(北廳) 계단 아래에 매장된 성왕의 머리는 그곳을 오가는 신라 관리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영겁의 형벌이었다.
위덕왕은 죽어서도 수모를 당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괴로워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를 모셔와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야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신라의 중요한 거점을 빼앗아 교환해야 했다. 위덕왕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그렇게 됐다는 죄책감은 신라에 대한 광포한 적개심으로 바뀌었다. 위덕왕은 자신의 아들들을 신라와의 전쟁 일선으로 내몰았다.
561년 위덕왕은 신라 변경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라군의 역습을 받고 1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다. 576년에 소백산맥을 넘어 일선군(경북 구미 지역)을 공격하다가 역습을 받고 3700명의 희생자를 뒤에 남기고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위덕왕은 자식들을 잃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577년 2월 위덕왕은 죽은 왕자들을 위해 왕흥사 목탑을 세웠다. 불사와 함께 위덕왕은 모든 것을 접었고 전사한 아들들을 가슴에 묻었다. 왕은 왕궁에서 매일 강 건너로 목탑을 바라봤으리라. 이후 26년 동안 신라와 전쟁이 없었다. 여생 동안 국가의 내실을 다졌고, 과제를 후대에 남기고 598년 눈을 감았다.
살아남은 자식이 없었다. 동생 혜왕이 즉위했다. 하지만 동생은 이듬해 유명을 달리했고, 혜왕의 맏아들 법왕도 그 이듬해에 그렇게 됐다. 600년 법왕의 아들 무왕이 즉위해 위덕왕의 비극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무왕은 즉위 3년인 602년에 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신라와 운봉에서 전투를 벌였다. 당연히 이러한 준비는 위덕왕대를 빼놓고 상상할 수 없다. 위덕왕대야말로 무왕의 웅비를 만들어낸 초석이었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선대왕과 왕자들의 비극을 무왕은 평생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602년을 필두로 605년·611년·616년·618년·623년·624년·626년·627년·628년·632년·633년까지 12회에 걸쳐 신라를 공격했다. 결국 무왕은 소맥산맥을 넘어가는 2개의 길목인 나제통문과 운봉을 장악하고 낙동강 서안의 성주지역과 남강유역을 점령했다.
군사력에서 백제는 신라를 압도했고, 존망의 위기의식이 신라에 팽배했다. 634년 무왕은 위덕왕에게 물려받은 왕흥사를 크게 확장해 완성했다. 낙성의례는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선 신라의 땅을 점령해 힘의 우위에 서게 됐다는 사실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퍼포먼스였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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