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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신라의 대야성 함락
부하 앞선 위세 떨고 대야성주 패전 자초 적 앞선 공포에 떨어
2011. 10. 19   00:00 입력 | 2013. 01. 05   07:17 수정

고소산성에서 바라본 대야성 옛터(사진 중앙의 야산). 멀리 갈마산이 보인다.



합천댐 주변의 항공사진. 주변 일대에서 642년 백제와 신라의 결전이 벌어졌다. 합천군청 제공
 
장군 윤충은 먼저 눈앞에 위치한 금성산성과 악견산성을 한꺼번에 공격해야 했다. 금성산 정상부 아래 동북쪽 능선을 보면 석축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악견산에는 1.8㎞의 석축이 남아 있고, 2중 성벽의 흔적이 보인다. 두 성은 나란히 있는 세트였다. 해발 592m인 금성산에서 악견산은 바로 눈앞이다. 

성에서 농성전을 펼치는 것은 최후의 방법이었다. 포위되어 성이 외부로부터 고립되면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농성은 외부에서 원군이 올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움을 벌일 때 성은 유용한 장치였다. 비축된 식량과 예비 병력이 대기하고 있는 성을 배후에 두고 싸움을 하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의 차이가 크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하는 측도 가까운 성에 인적 물적 자원을 비축해 놓고 적의 성을 공격했다. 거창 분지에 집결시킨 것으로 추측되는 보충 병력과 그곳에서 수확한 곡물이 백제군에게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윤충은 수적인 우위를 무기로 금성산성과 악견산성을 한꺼번에 포위했고, 신라군은 성안에서 농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야성주 품석이 전술적인 판단력이 있었다면, 대야성과 그 외의 자성에서 병력을 이끌고 나와 대병 쪽에 집중시켜 백제군과 한판 승부를 벌였을 것이고, 전쟁은 양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품석은 부하들에게 목에 힘을 주고 폼을 잡는 사람이었지만 강적인 백제군 앞에서는 겁부터 냈고, 똑똑한 부하들의 전술적 판단도 듣지 않았으며, 자신이 최고 지휘관이라고 거듭 들먹일 뿐이었던 인물이었다. 

품석은 그저 성에 틀어박혀 부하들을 휘어잡는 데 집착했던 것 같다. 품석은 진짜 뼈대 있는 진골(眞骨) 가문 출신이었다. 왕실과의 혼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력했다. 떠받침을 받으면서 살았고, 전쟁이 뭔지도 몰랐던 애송이였던 것 같다. 그저 부하들을 집안에서 부리던 ‘종놈’ 정도로 여겼다.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그 능력 있고 유능한 김춘추가 어떻게 품석에게 자신의 딸을 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 

백제군의 공격이 본격화되고, 전쟁의 함성이 대병계곡에 울려 퍼지면서 하나 둘씩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비명, 이들 두 성의 함락(陷落) 순간에 금성산과 악견산의 하늘에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죽음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 떼가 물려오는 장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직후 백제군이 합천 분지로 몰려갔고, 대야성 최후의 보호막인 갈마산성과 고소산성이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두 성 가운데 현 합천군 대양면 정량리 대야산(大也山) 22-1번지 일대에 위치한 고소산성(姑蘇山城)은 황강 건너 대야성 내부의 모든 움직임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성곽은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나 둘레 1㎞ 높이 1m의 석축이 남아 있다. 동쪽 성문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백제식 삼족토기가 출토되었다. 윤충과 그의 군대가 이곳에 성을 쌓아 대야성 공격의 거점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 정상부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지가 있고, 조망권이 탁월하다. 황강 넘어 분지가 한 눈에 들어오고 서남쪽으로 갈마산성이 보인다. 

대야성을 공격하는 백제군의 입장에서 최적의 장소인 고소산성의 점령은 필수적이었다. 그것을 위해 백제군은 갈마산성을 공격했고, 그 다음 고소산성이 공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갈수기인 가을 얕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대야성과 갈마산성ㆍ고소산성이 서로 교차 지원을 해야 백제군의 전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하나의 성이 포위된다고 해도 다른 성에서 신라군이 문을 열고 나온다면 백제군은 따로 병력을 떼어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품석은 자신이 있는 대야성의 병력이 소모될까 봐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위기의 순간에 어린아이의 이기심 같은 것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고, 다른 성은 다 무너져도 창고에 식량이 가득한 대야성은 버틸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단단히 문만 걸어 잠그면 되는 왕경의 자기 집처럼 말이다.

신라 왕경에 파발을 띄워 원군을 요청도 했으니 그때까지만 기다릴 심산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사람은 절망적인 순간에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희망을 머릿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위기의 통증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유리한 대로 생각하지 않는 현실적인 사람은 사태를 그렇게 만들지도 않고 불가항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대개 깨끗이 자살을 택한다. 

갈마산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백제군의 소수 일부 병력이 대야성이 바라보이는 강가 부근에 진을 쳤다. 고소산성을 공격하는데 신라군이 혹시 성문을 열고 지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대부분의 병력은 대야성에서 빤히 보이는 고소산성의 가장 낮은 곳으로 몰려갔다. 신라군은 유능한 지휘관 윤충이 지휘하는 백제군의 기세에 처음부터 눌리고 있었다. 

강 건너 고소산성에서 싸움이 시작되자 품석은 그 성이 오래 버텨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고, 고소산성의 정상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 눈앞에서 백제군이 몰려가 아군들을 죽이고 고지의 성을 점령하는 과정을 바라본 대야성의 신라인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으리라. 자욱한 연기와 피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절망의 그림자가 엄습했다. 

고소산성을 점령한 윤충은 신라 병사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그곳에 대야성 함락을 위한 지휘본부를 차렸다. 그의 병사들은 백제의 깃발이 펄럭이는 그곳을 뒤로하고 황강으로 내려왔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강을 건너 대야성 북문이 바라다 보이는 지점에 집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대야성지는 합천읍 근린공원으로 변모해 있다. 해발 90m 취적산 쌍봉이 있다. 그 정상에 서서 바라보면, 북동쪽으로 고령ㆍ대구 방면, 서북쪽으로 대병 ㆍ거창방면, 남쪽으로 삼가ㆍ진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동쪽으로 황강을 따라 초계방면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성벽은 주로 5~6부 능선에 구축돼 있다. 그 전체 둘레는 약 2㎞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문은 북문지가 확인됐는데 양쪽 봉우리가 연결되는 계곡부로서 성지 내부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다. 신라의 방어력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평지와 같이 낮은 그곳은 백제군의 투석기와 충차공격에 노출돼 있었다. 대야성은 평지성에 가까웠다. 

화살이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 투석기에서 돌들을 쏟아냈고, 백제군들이 사다리를 들고 몰려와 성벽에 포도송이처럼 매달렸으며, 충차가 성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신라 병사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항전을 했다. 아직 희망이 있었다. 성에는 충분한 식량이 있었고, 황강이 마르기 전에는 식수 걱정도 없었다. 그런데 어둠이 내리고 불길이 치솟았다. 화염은 사방의 창고와 집채를 쓸어 삼켰다. 군량 창고 앞에서 불길은 섶단을 타고 한 차례 세찬 회오리를 일으켰고, 타닥타닥 불타는 곡식의 매캐한 연기와 불똥이 허공에 자욱이 날았다. 방화범은 아내를 성주 품석에게 빼앗긴 검일이었다. 

그날 밤 성벽을 지키던 검일이 소수의 백제 군사들을 끌어들였고, 그들과 함께 창고를 지키던 보초병들을 처리하고 불을 질렀던 것 같다. ‘삼국사기’는 660년 사비에서 체포된 검일의 죄 하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앴다.”

642년 8월 말 백제군 1만 명이 거창분지를 출발했다. 그들이 떠난 넓은 들판에는 곡식이 남아 있지 않았으리라. 황강을 따라 합천 대야성으로 향해 가는 요소에 있는 산성들은 백제군이 상당수 점령한 상태였다. 합천군 지역에 들어온 백제 장군 윤충은 현 대병 부근에서 군대를 멈추고 재정비해야 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대야성까지 물길 따라 신라의 성들이 깔려 있었다. 대야성은 여러 자성(子城)들과 교차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대병 합천댐 둑 앞에 금성산성과 악견산성이 있었고, 그곳에서 합천분지로 내려가면 황강을 사이에 두고 대야성과 갈마산성·고소산성이 있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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