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istopia.net/zbxe/7848
주산군도와 주호국
2004.06.27 17:41:19 조약돌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 큰 섬에 주호라는 땅이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키가 작다. 말도 한(韓)나라와 같지 않고 모두 머리를 깎은 것이 선비족과 같다. 가죽옷을 입고 소와 돼지를 잘 키운다. 그들의 옷은 윗도리만 있고 아래는 없어 마치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다니면서 한(韓)나라 안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삼국지』권 30「오환선비동이전」<한전>
“마한의 서쪽 바다에 있는 섬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 배를 타고 오가면서 한(韓)나라 안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후한서』권 85「동이열전」<한전>
역사학계는 이 두 기록에 나오는 ‘주호’를 제주도로 보아왔다. ‘마한(:삼한백제)’에서 멀리 떨어진 섬 가운데 ‘나라’를 세울 만한 섬은 제주도 뿐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제주도는 금강 유역의 ‘서쪽’이 아닌 ‘남쪽’에 있는 섬이기 때문에, 만약 제주도가 주선국이라면 도대체 후한/위에 주호국에 관한 정보를 전해준 삼한(백제) 사람들이 어째서 주선국을 ‘남쪽에 있는 섬’이 아닌 ‘서쪽에 있는 섬’이라고 적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윤내현 교수는 이 문제점을 풀기 위해 주호국이 있던 곳을 “마한의 서쪽이라 했으므로, 그 방향으로 보아 지금의 강화도로 추정된다(『한국열국사연구』).”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그 가설대로라면 강화도가 경기도와 너무 가깝기 때문에 “말이 한(韓)과 다른” 현상이 나타날 리가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호국의 위치를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할까? 우선 지도를 펼쳐보고, 마한이라고도 불리우던 삼한백제의 일부분에서 배를 타고 갔을 때 “서쪽”에 있는 섬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황해와 남해의 섬들은 너무 가까우므로 후보에서 제외함). 그런 섬 가운데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러면 발해만의 섬들과 주산군도, 그리고 대만과 해남도를 ‘유력한 후보군’으로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서 대만은 백제인들이 들어와 ‘담로’를 세운 다음에야 담로계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빼고, 해남도의 원주민에게는 “모두 머리를 깎은 것이 선비족과 같”은 풍습도 없었으므로 이 섬도 주호국은 아니다. 그렇다면 발해만에 있는 섬들과 주산군도 가운데 하나가 ‘주호국’일 텐데, 발해만의 섬들은 삼한백제가 요서에 담로를 세울 때 징검다리로 삼은 섬들이므로 그곳에 독립국이 오랫동안 남아있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주산군도는 금강 유역의 서남쪽에 있기 때문에 마한(삼한백제)사람들이 주호국을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 큰 섬”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으며, 두 나라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주호국 사람들의 말이 삼한 사람들의 말과 다른 것도 자연스럽다. 또 주산군도는 발해만 일대의 섬들과는 달리 “진나라 때”까지 백제의 발길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주산군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백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모든 조건이 중국 기록에 나오는 ‘주호’와 딱 맞아떨어진다. 결국 기록에 나오는 ‘주호국(주호)’은 주산군도에 있던 나라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들은 반고가 말한 “동제인”이나『한원』에 나오는 “제학인”일 가능성이 높으며『삼국지』에는 이들이 “단주”에 있는 ‘오랑캐’로 나온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이며,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일까? 나는 변한의 속국 가운데 하나인 주선국(州鮮國)이 제주도일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그들이 침미다례 왕국이 있던 제주도에서 주산군도로 건너와 해외 식민지를 만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호(州胡)’로 불리웠으리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같은 여진(쥬르첸)족이라도 이미 요나라에 굴복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숙(熟)여진과 생(生)여진으로 나뉘었듯이, 백제인(삼한인) 사신은 같은 침미다례 사람이라도 이미 백제에 굴복한 사람은 ‘아름다울 선(鮮)’자를 쓴 ‘주선국(州鮮國)’ 사람으로, 아직 백제에 굴복하지 않고 있던 사람은 ‘오랑캐 호(胡)’자를 써서 ‘주호국(州胡國)’ 사람으로 불러 이들이 처한 정치적인 상황을 나타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수가 단주(亶洲 : 김성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주산군도임)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진시황 때의 도사인 서복”을 들먹이고, “그곳은 너무 멀어 쉽게 갈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주산군도에 살고 있던 침미다례 사람들은 서복(서불)이 제주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간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으며(제주도 서귀포 남쪽에 있는 정방폭포의 암벽에는 19세기까지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함), 그 이야기를 자신들과 거래하던 오나라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에 바다를 잘 알지 못하는 오나라 사람들이 단주를 곧 침미다례(:봉래)라고 잘못 받아들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국인 침미다례와 분국(分國)인 ‘동제인들의 나라’를 같은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 경우 침미다례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나라를 신라 상인들이 중간에서 쉬어가는 ‘기착지’로 내어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도 배를 띄워 신라 사람들과 함께 식민지를 만들었는데, 그래서 침미다례 사람들은 “먼저 와서 주산군도 일대를 장악”하고 신라 사람들은 “아직 중국의 행정권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절강성 연안에 자리잡았던 것”이 된다.
김성호 박사는 “백제인들이 먼저 와서 주산군도 일대를 장악함에 따라 이들(신라인들 - 옮긴이) 아직 중국의 행정권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절강성 연안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2』에서).”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에서 “백제인”을 ‘침미다례인(동제인)’으로 바꾸면 당시 상황과 아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얘기다.
(주산군도에는 ‘신라’라는 땅 이름이 없고, 손권이 이주와 단주를 함께 치라고 명령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둘은 서로 손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나라 - 신라와 침미다례 -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주거지를 따로 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침미다례 사람들도 서기 1세기경에 주산군도에 온 것으로 보이며, 이 때 신라인과 함께 바닷가에 자리잡은 뒤 한(漢) 나라나 삼한과 무역을 했을 것이다(『삼국지』와『후한서』에 주호국 사람들이 “한(韓)나라 안에 있는 시장에서 물건을 판다.”는 구절이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들이 후한 뿐 아니라 삼한과도 교역하면서 이익을 챙겼으리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신라는 자신의 식민지로 건너가려면 우선 남해의 몇몇 항구와 침미다례를 거쳐야 했으므로 침미다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을 것이며, 침미다례도 삼한백제라는 커다란 적을 눈앞에 놔두고 신라와 식민지를 놓고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신라의 요구 - 침미다례의 항구를 신라 배의 ‘중간 기착지’로 쓰게 해달라는 요구 -를 들어주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이는 바이다.
(즉, 나는「▩월주신라 8. - 오나라와의 만남」을 쓸 때에는 “동제인”이 신라인이지 제주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검토해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이야기이다)
서기 25년부터 서기 220년까지의 역사를 다룬『후한서』「한전」에는 주호‘국(國)’으로 나오는 무리가 서기 220년부터 280년까지의 역사를 다룬『삼국지』「한전」에는 ‘나라 국(國)’자를 빼고 단지 ‘주호’로만 나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주호국은 서진 말기에 백제에 정복당해 독립을 잃고 삼한의 담로가 된 듯하며, 그들은 서기 396년 삼한백제가 무너졌을 때 잠시 삼한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누리다가, 5세기 이후에 다시 백제에 복속했을 것이다.
『수서』「백제전」에는 “나라의 서남쪽에는, 사람이 사는 섬이 열 다섯 곳이나 있는데, 모두 성읍(城邑)이 들어서 있다(國西南, 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고 적혀있고,『괄지지(括地志)』에는 “백제국은 발해(渤海)의 서남쪽에 큰 섬 열 다섯 개를 지니고 있는데, (그 섬들은) 모두 읍락이 있고 사람이 살며, 백제에 속한다(百濟國. 西南渤海中, 有大島十五所. 皆邑落有人居, 屬百濟).”고 적혀있어 6세기경에는 ‘백제의 서남쪽’이고 일찍이 “20개 국(國)”이 있던 주산군도가 다시 백제 땅이 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정창은 그의 책에서 “이 15개 도서는 그 많은 섬 중 어느 것을 지칭한 것인지 미상(『백제사』에서)”이라고 하면서도, “경상남도 남해(南海)의 섬은 이 15개 도서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주장과 “오늘의 전라남북도가 가진 서해(西海) 안의 섬들 가운데 그 옛날 성읍(城邑)을 가졌으리라고 생각되는 도서는 창선도, 남해도, 청산도, 진도, 안면도, 제주도, 대흑산도 등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덧붙여『수서』와『괄지지』의 섬들이 황해(서해)나 남해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나,
만약 그의 주장대로라면 “발해”의 ‘동남쪽’에 섬들이 있었다고 적어야 할텐데 그러지 않고 “서남쪽”에 “큰 섬 열 다섯 개”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문정창이 예로 든 섬들은 “15개”가 아니라 ‘7개’이기 때문에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이 섬들이 주산군도라면 발해만(또는 발해군)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섬들이 “서남쪽”에 있다고 설명할 수 있으며, 주산군도는 - 일찍이『한서』「지리지」가 지적했듯이 - ‘동제인’들이 “20여 국(國)”으로 나뉘어서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15개”의 성읍(城邑)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문정창과는 달리 섬들을 주산군도로 보며, 이들은 수나라 대에는 백제에 속했다가 당나라가 세워질 때에는 -『구당서』「백제전」에 나오는 대로 - “월주(越州)”라는 이름으로 독립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참고 자료
―『한글 동이전』(서문문화사)
―『한국열국사연구』(윤내현, 지식산업사, 서기 1998년)
―『백제사』(문정창, 인간사, 서기 1988년)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2』(김성호, 맑은소리, 서기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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