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71231

분산성에서 가야를 내려다보다
[가야문화권 답사 21] 김해 분산성
09.11.30 11:13 l 최종 업데이트 09.11.30 11:13 l 송영대(greenyds)


▲ 김해 분산성 가야시대 때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성곽으로서 층단형식으로 성벽이 쌓여 있는게 독특해 보인다.(사적 제 66호) ⓒ 정동귀

봉황동유적을 지나 김해 답사 일정의 마지막을 장식할 분산성으로 떠났다. 김해유적을 다니면서 여러 유적들을 보았었는데, 그 중에서도 늘 눈에 들어왔던 유적이 있다. 그 유적이 바로 분산성. 수로왕비릉, 구지봉, 수로왕릉, 구산동고분군, 대성동고분군, 봉황동유적에 가서 주위를 조망 할 때면 언제나 분산성이 보였다. 가까이 있는듯 하면서도 멀고, 먼듯하면서도 가까운 분산성. 김해답사를 마무리하는 코스로 우리는 분산성을 선택하였다.

분산성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나마 자동차가 있어서 망정이었지 걸어서 올라가기는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구불구불하게 한창 이어진 길을 계속 따라가고 나서야 분산성 임시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난 뒤, 우리는 간단하게 채비를 하고 천천히 분산성을 향해 올라갔다. 분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자그마하게 나 있는 산길이었는데, 등산이라는 느낌보다 산책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였다. 등산로도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 가는데 큰 불편을 느끼진 못하였다.

이윽고 분산성에서 도착하였고 우리는 거대하고 높은 성벽과 맞닥뜨렸다.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가는 성벽


▲ 분산성으로 오르는 길 분산성 주차장에서 분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이 걸어가면 된다 ⓒ 오은석

분산성(盆山城)은 김해시내에 있는 분산에 축조된 산성이다. 분산(盆山)은 해발 330m로 산 정상부의 평탄한 지형을 이용하여 긴 타원형을 이루는 석성(石城)이다. 분산산성이라고도하며 사적 제 66호로 지정되어있다. 분산성은 산봉우리를 감싸듯이 성벽을 둘렀는데, 이를 고고학에서는 테뫼식산성이라고 부른다. 테뫼식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의 주요 특징으로 보고 있는데, 그러한 점에서 분산성을 가야시대 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현재 시내 쪽으로 900m정도 되는 성벽이 남아있으며, 성 안에서 몇 개의 건물터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시대나 신라시대의 토기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곳에 세워진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葳築城事績碑)>에 의하면 이 산성은 고려 말에 김해부사 박위(朴葳)가 왜구를 막기 위해서 옛 산성에 의거하여 수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허물어졌던 것을 고종 8년, 즉 1871년에 부사 정현석이 다시 현재의 성벽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분산성의 성벽을 올라가고자 하여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는 여름인지라 곳곳에 수풀이 우거져 있어서 다짜고짜 성벽을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 입구를 찾아보았다. 그래도 잘 보이지 않자 한쪽에 성벽이 조금 무너진 곳으로 타고 올라갔다. 나중에 올라가고 나서 안 것이지만 그 옆쪽에 성문지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북문으로 추정되었다.


▲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가는 성벽 동문에서 만장대로 바라본 모습. 마치 뱀이 기어가듯이 성벽이 큰 곡선을 그리며 쌓아져있다. ⓒ 김사현

성벽으로 올라오니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졌다. 마치 뱀처럼 스멀스멀 설벽이 기어가는 듯 하였다. 분산성의 성벽은 말끔하게 복원시켜 놓았는데 그 때문인지 2가지 느낌이 들었다. 하나는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이 보기 좋다는 것과, 또 다른 것은 너무 깔끔하게 해 놓음으로서 옛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벽을 오늘날에 와서 복원하는 예가 많은데, 이는 관광지로 활용하기 위한 정리 차원과 관광객의 안전 차원 등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옛 모습이 파괴되는 안타까운 일은 없어야겠다.

성벽은 특이하게도 2~3줄로 되어 있었다. 다른 성벽의 경우 일정하게 하나의 성벽이 쭉 이어지는 반면에 분산성은 2줄의 성벽이 군데군데 이어지는 모습이라 꽤 특이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양식을 층단형식(層段形式)이라고 부른다. 층단형식은 성벽을 축조하기 어려운 지역에 석축시설을 쌓은 다음, 그 상부에 성벽을 축조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자연스럽게 보축(補築)과 층단(層段)이 생기게 된다.

분산성의 특이한 성벽은 바로 이런 예에 해당한다. 특히 앞선 시기의 성벽을 보축으로 이용하고 후대에 층단을 쌓아 올린 예로서 다른 지역에서 쉽게 보기 힘든 일례이기도 한다. 전쟁 시에는 보축에서도 목제 여장을 설치하여 적을 1차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다.

만장대에 올라 가야를 바라보다!


▲ 분산성 동문 층단형식으로 쌓아올린 성벽이 특이해 보인다. 마치 페루의 마추픽추를 보는 것처럼 견고하고 섬세하게 쌓아올렸다 ⓒ 김사현

분산성의 성벽은 잘 정비되어 산봉우리 아래를 휘감듯이 돌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자연의 모습을 최대한 이용하다보니 직선적이지 않고 곡선적이다. 분산성은 그러한 우리나라 성벽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자연과의 어울림으로 인하여 기막힌 장관을 자랑한다. 외국의 성곽과는 또 다른 느낌의 매력이라 하겠다.

성벽 위로 걸어가다 보면 동문을 보게 된다. 성벽에서 바라본 동문의 모습은 돌을 섬세하게 쌓아 올렸다. 성문 옆쪽으로 성벽이 돌출되어 있어서 방어에 더 용이하게 되어 있다. 옹성을 쌓아 성문을 막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 정도의 시설을 설치 할 만큼 부지가 넓지 않아서 간단하게 치를 약간 돌출 시킨 정도에서 마무리 한 것으로 보인다. 성문이 좁아서 암문(暗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적들로서는 이런 성을 넘어와서 공격하기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으리라.

성벽을 보면 곳곳에 자연 바위를 그대로 활용하거나 지형지세를 이용한 곳이 많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분산성으로 쳐들어오는 적들로서는 분산성의 견고한 지세와 굳건한 성벽의 모습 때문에 쉬이 공격해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이 분산성은 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방어성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 만장대 분산성의 봉수대인 만장대의 바위. 이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며 도장도 새겨져 있다. ⓒ 김사현

성벽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만장대라고 하는 봉수대가 보인다. 김해 시민들이 분산성을 만장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장대(萬丈臺)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臺)'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99년에 봉수대가 다시 복원되었는데, 그 근처 바위에는 만장대라고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도장이 새겨져 있다.

만장대에 올라서 주변을 둘러보면 김해시내는 물론 낙동강과 남해안, 심지어 부산까지도 보인다. 날이 더 좋은 날이라면 그 시야가 매우 넓게 펼쳐졌을 텐데, 이렇게 전망이 트여있기 때문에 적들의 움직임을 보고, 또 그에 따른 대비를 할 수 있었으리라. 특히 봉수대가 있다는 것은 주변 지역에 적들의 침입을 재빠르게 알릴 수 있는 정교한 체제가 갖추어져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김해는 예로부터 활발한 대외교역을 통하여 성장하였기 때문에 분산성의 의미는 그만큼 중요하다. 어떠한 상단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혹은 수상한 집단은 보이지 않는지, 그리고 적들의 움직임 등을 살펴보는데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가야 또한 자신들의 세력을 보호하기에 현재의 김해 시내는 한정된 공간이고, 또한 적극적인 대응의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분산성 같은 방어시설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분산성 옆에서 들리는 포클레인 소리


▲ 분산성에서 바라본 김해 분산성에서는 김해시내 뿐만 아니라 부산, 낙동강, 남해안까지 모두 조망 할 수 있다 ⓒ 오은석

만장대를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산성을 내려가기로 하였다. 산성 내에 보이는 작은 길을 따라서 내려가는데 중간쯤에 작은 절이 하나 보였다. 해은사(海恩寺)라고 하는 절인데, 해은사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고 전하는데,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 승병이 주둔하였었다고 한다.

해은사를 지나 다시 우리가 올라왔던 성문 쪽으로 갔다. 이번엔 앞서 올라 올 때처럼 엉뚱한 길이 아닌 제대로 나 있는 길로 내려가는데 옆에 표지판이 하나 보였다.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이었는데 멀리서 포클레인 등 중장비가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산중에 무슨 공사인가 싶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내려왔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야역사테마파크 조성공사 현장이었다. 가야역사테마파크는 김해시에서 경주 신라밀레니엄파크나 부여 백제역사재현단지처럼 가야라는 테마를 가지고 당시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도록 만든 관광단지이다. 얼마 전인 26일에 이곳에 세운 가락왕궁 상량식이 열렸으며 이제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조성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의 보도에 따르면 MBC에서 드라마 <가야>를 촬영하기로 하고, 여기에 김해시가 적극 협조하기로 하였다. 가야역사테마파크를 드라마 촬영 장소로 허가해주고, 동시에 이를 통하여 가야역사테마파크를 홍보할 계획으로 보인다.

가야역사테마파크는 앞서 살펴본 분산성과 근거리에 위치해있다. 분산성 또한 가야시대의 중요한 유적으로서 그 모습을 잘 복원해 놓았기에, 가야역사테마파크가 조성된다면 이 둘을 김해시의 유용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보인다. 다만 입지가 조금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이에 따른 교통편을 늘리고 다양한 볼거리를 조성하며, 적극적인 가야사 조명 등 여러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러한 문제들도 김해시와 김해시민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인다.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葳築城事蹟碑)

『금관지(金官志)』를 살펴보면, 공(公)은 홍무(洪武) 기묘년(우왕 1, 1375년)에 김해부사(金海府事)에 제수(除授)되어 여러 차례 왜적(倭賊)을 물리치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큰 공(功)을 세웠다. 그리하여 김해 산성(金海山城)에서 왜구(倭寇)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포은(圃隱) 정공(鄭公)이 지은 '김해산성기문(金海山城記文)'의 대략(大略)에, "김해(金海)는 왜적이 출몰하는 요충지(要衝地)로 비록 명성(名聲)이 있는 자라도 다스리기가 어려운 곳이다. 이에 밤낮으로 정신이 지치도록 생각을 다하여 계획을 세워 임금의 은덕(恩德)을 미루어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자로 하여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하였고, 고통에 신음하는 자로 하여금 태평한 세상을 노래하도록 하였으며, 살아남은 자로 하여금 장대하게 집을 짓게 하여 한 달 사이에 온갖 폐단(弊端)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오히려 얼굴에 근심을 띠며 말하기를, '경내(境內)가 물로 둘러싸여 있는 바닷가의 고을은 만약 요새화(要塞化) 하지 않으면 왜적을 당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 이에 옛 산성(山城)을 수축(修築)하여 확대(擴大)하였다. 역사(役事)를 마치고 아래에서 바라보니 천 길 높이로 벽처럼 우뚝 서서 한 사람이 관문(關文)을 막더라도 만 명이 열 수가 없었다. 내가 장차 새로 쌓은 산성 위에서 술잔을 들어 공이 성공을 거둔 치적(治績)에 대해 축하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아! 공의 풍부한 공로(功勞)와 두터운 은택은 천 년이 지난 뒷일지라도 경탄(敬歎)할 만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이후로 성이 무너져서 폐하여졌는데 지금 내가 조정(朝廷)의 명령을 받들어 개축(改築)하였다. 공의 후손과 김해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공의 치적을 기록하니, 내가 세대를 뛰어넘어 추모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를 서술하여 기록하였다.

때는 성상(聖上) 9년 신미년(고종 8, 1871년) 3월이고, 부사(府使) 정현석(鄭顯奭)이 기록하다.

按金官志▨公於 洪武己卯除金海府使屢却倭賊擊對馬島建大功築▨
山山城寇戢民安圃隱鄭公爲之記其畧曰金海倭衝也雖有智者難爲治▨
乃日夜疲精竭思設計推恩使凍餒者飽煗呻吟者謳歌煨燼者奐輪旬月▨
間百廢擧矣猶憂形於色曰海曲之邑水環其境苟非施險無以爲也於是▨
古山城擴而大之功旣訖自下望之壁立千仞雖使一夫當關万夫莫能開▨
將擧酒於新城之上以賀政績之有成也噫 公之豊功厚澤雖在千載之▨
可敬也已自壬燹以後城圯而廢今余承 朝命改築之公之雲仍與邑人▨
立石紀公績余不禁曠感之思遂述此以識之時
聖上九年辛未三月也 府使鄭顯奭記 

※ 참고문헌
조동원 편저,『한국금석문대계』4,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5 
 
덧붙이는 글 | 김해 분산성에 대해서 써 본 글입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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