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80139
가야 마지막 왕자,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가야문화권 답사 23] 금관가야의 멸망과 김무력
09.12.12 11:30 l 최종 업데이트 09.12.12 14:26 l 송영대(greenyds)
우리에게 가야의 왕자로 알려진 인물들은 크게 2명이 있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인 월광태자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자인 김무력이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왔으며 같은 가야의 왕자라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둘의 인생을 살펴보면 여러모로 차이점이 많다. 대표적으로 월광태자는 가야의 마지막 왕자로 비운의 인물로서 알려져 있지만, 김무력은 신라의 장군으로 더 이름이 높다.
월광태자의 경우 대가야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으로도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반해 김무력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아들로서 신라에 항복하였었다. 그리고 신라의 장군으로서 활약을 하였다.
이 김무력의 아들이 김서현 그리고 손자가 바로 김유신이다. 삼국통일을 이끈 명장의 할아버지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김무력. 그에 따른 기록은 많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가야 마지막 왕자이자 신라의 장군으로 지내야 했던 그의 자취를 돌아보도록 하자.
가야의 마지막 왕자, 신라에게 항복하다
▲ 구형왕 영정 금관가야 10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영정이다. 김무력에겐 아버지, 김유신에겐 증조부이다. ⓒ 선현의 표준영정
가야는 여러 개의 소국이 서로간의 이해에 따라 다양한 구심점을 가지는데, 주로 이 중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를 중심으로 뭉쳤었다. 초기에는 금관가야가 바로 그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로서 한때는 신라의 강한 경쟁국가, 혹은 이를 넘어 신라를 압박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였다.
하지만 이러한 금관가야의 영광도 광개토태왕의 남정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후부턴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며, 맹주자리 또한 대가야가 차지하게 되며 소국의 하나로서 쓸쓸하게 연명하게 된다. 또한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나라, 그리고 전기 가야연맹체를 이끌었던 영광은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게 된다.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신라는 재기의 기반을 다지고 서서히 세력을 키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경쟁자였던 가야와 맞붙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결국 가야는 신라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게 된다.
가야의 마지막 왕은 구형왕(仇衡王)이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구형왕은 521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그리고 532년, 신라의 제 23대 임금인 법흥왕의 군대와 대적해서 싸우게 된다. 법흥왕이 군대를 일으켜 금관가야를 공격하였고, 이에 구형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지휘하였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 전 구형왕릉 경남 산청에 있으며 구형왕의 무덤이라 전해진다. 하지만 축조방식을 보았을 때 가야 왕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사적 제 214호) ⓒ 문화재청
결국 구형왕은 왕비 및 세 아들과 함께 항복하게 된다. 그 세 아들 중 첫째가 노종(奴宗), 둘째가 무덕(武德), 그리고 막내가 무력(武力)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이들을 예에 맞게 대우하고 상등의 직위를 주며, 금관국을 식읍으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가야의 마지막 왕자인 김무력은 더 이상 왕자로서의 신분이 아닌, 신라 장군으로서 그 삶을 보내게 된다.
가야 왕자에서 신라의 장군으로
▲ 성왕 영정 백제의 26대왕인 성왕의 모습. 성왕은 백제의 수도를 사비로 천도하고 중흥을 이끌었던 군주이다. 하지만 관산성전투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결국 전사하게 된다. ⓒ 선현의 표준영정
이후 김무력에 대한 기사는 드문드문 보인다. <단양신라적성비>를 보면 '무력지 아간지(武力智阿干支)'라 기록되어 있다. 아간지란 신라의 17관등 중 6번째인 아찬(阿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로 알려져 있다. 단양신라적성비 축조연대는 진흥왕 6~11년(545~550)으로 보고 있는데, 이를 보아 당시 김무력의 지위를 알 수 있다.
이후 <삼국사기>를 보면 진흥왕 14년, 즉 553년에 신주 군주로 임명된다. 신주(新州)는 같은 해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만든 곳으로서 지금의 한강유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의 명칭이다.
김무력을 신주 군주로 임명한 것은 그에 대해 자신이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부러 김해와 먼 지역으로 보내어 지방 세력과 멀게 하고 그의 충심을 살펴보는 한편, 그를 전쟁에 적극적으로 기용하겠다는 진흥왕의 의지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김무력에게 뜻밖의 기회가 1년 뒤에 찾아온다. 바로 백제가 대가야, 왜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진격해 온 것이다. 신라에서도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서 싸웠는데 불리하였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보면 이 당시 관산성이 백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전하니, 당시 신라군이 얼마나 최악의 상황이었는지 쉬이 알 수 있다.
신주의 군주로 있던 김무력은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오게 된다. 이 당시 백제군을 이끌고 있던 자는 부여창(扶餘昌), 즉 후대의 위덕왕(威德王)이다.
부여창은 뛰어난 무예를 지닌 왕자로서 백합야전투에서는 고구려의 장수에 맞서 대결을 펼쳐 적장을 죽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던 자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관산성에 있는 부여창을 걱정하여 군사를 이끌고 간다. <삼국사기>에는 이 당시 50여명의 소수 인원만 대동하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일어났다. 김무력군에 속해 있던 고간 도도(高干都刀)가 성왕 일행을 재빨리 공격하여 생포하게 된다. 성왕은 결국 도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관산성의 백제군들은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기세를 몰아 김무력은 백제군을 공격하게 되고, 백제군은 결국 패배하게 된다.
이 관산성전투에서 보여준 김무력의 활약은 그에 걸맞게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진흥왕척경비>에는 '무력지 잡간(武力智迊干)'으로 적어놓고 있는데, 잡간은 17관등 중 세 번째 등위에 해당한다. 대가야 마지막 왕으로 보이는 도설지(道設智)의 경우 그 등위가 <단양신라적성비>에서는 급간지로 9등위, <창녕진흥왕척경비>에서는 사척간으로 8등위임에 비하면 김무력의 승진이 얼마나 빠른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김무력의 등위는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에서도 그대로 잡간으로 나와 등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후 김무력에 대한 기사는 나오지 않지만 위의 자료들만 보더라도 그가 신라인으로서 얼마나 큰 활약을 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호랑이는 고양이를 낳지 않는다
▲ 선덕여왕의 김유신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출연하고 있는 김유신(엄태웅 분)의 모습. 김유신은 김무력의 손자이자, 김서현의 아들로서 가야왕족의 후손이다. ⓒ MBC드라마 <선덕여왕>
호랑이는 고양이를 낳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 걸맞은 사례가 바로 김무력의 후손인 김서현과 김유신이다. 김무력의 아들은 김서현이다. 김서현도 신라 장군으로서 활약하였는데 양주총관으로서 백제와 싸워 전공을 세웠었다. 그리고 진평왕 51년, 즉 629년에 낭비성전투에 김용춘, 김유신과 함께 참전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김서현의 아들은 삼국통일을 이끈 당대의 명장인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이처럼 김무력 이후 금관가야 왕족의 가문은 크게 부흥하였고, 또한 그만큼의 다양한 활약을 펼쳤다. 김유신 이후에도 신라 조정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었다. 이처럼 망국의 후예인 가야의 왕족들이 신라에서도 명문가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무력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관산성전투에서는 재미있는 장면이 포착된다. 바로 백제가 당시 대가야, 왜와 연합해서 신라와 전투를 치렀으며, 신라에서는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무력이 지휘를 함으로써 맞서 싸웠다는 점이다. 이를 보고 대가야의 입장에서는 금관가야의 후손이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당시 대가야의 경우 백제에 의해 동원된 느낌도 적잖이 있다.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자신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당시 신라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백제의 편에 들어 군사를 보내 도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산성전투 이후 대가야는 신라에게 잠식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점을 보고 김무력을 동족을 배반하였다고 비판할 이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야는 생각보다 서로간의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상황에 따라, 혹은 시세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했다. 가야제국 내부에서 서로의 이득을 위해 싸우기도 하였으며 세력의 강약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면모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가야에게 오늘날처럼 동족관념을 부여하여 해석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김무력은 자신의 환경 내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다 하였다고 평가해야 한다. 이에 대해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오늘날에 입장에만 맞춰서 생각하는 것으로써 가장 중요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간과하는 것이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에 대해 자세히 다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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