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92118
김해하면 떠오르는 거, 가야 말고 없을까
[가야문화권 답사 26] 가야 멸망, 그 이후의 김해
09.12.30 11:30 l 최종 업데이트 09.12.30 12:18 l 송영대(greenyds)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에게 사실상 항복하면서 망하게 되고, 이후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다. 금관가야의 왕족들은 대가야와는 달리 신라에게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력은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에 이르는 가야계 진골귀족 가문이 안정적으로 정립되는 기틀이 된다.
그럼 가야 멸망 이후 김해는 어떻게 되었을까? 김해는 신라의 일부로서, 그리고 고려와 조선의 일부로서 존속하였으며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 남았다. 멸망 이후에는 금관소경으로 불렀지만, 그 이후부터는 주로 김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 나라의 중심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중요성이 떨어져서 잊혀버린 도시, 혹은 과거의 영광에 비해서는 축소되어 볼품없는 도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김해 또한 이러한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김해의 중요성은 인정되었고, 이는 향토사적인 측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수로왕이 터를 닦았던 금관가야의 수도 김해, 가야 멸망 이후의 사적을 잠시 살펴본다.
신라 5소경 중 하나, 금관소경
▲ 김해 구산동고분군 금관가야 멸망 이후에 조성된 고분군이다. 이 고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금관가야 계통의 고분은 조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사적 제75호) ⓒ 부경대학교박물관
가야멸망 이후 김해에 있던 왕족들은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형왕은 상등의 직위를 받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구형왕 이후의 가야왕족들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남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서서히 김해와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무력이 한강유역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주 군주로 임명된 사실이나, 김유신이 만노군, 즉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에서 출생하였다는 점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또한 <가락국기>에서도 멸망 이후 제사가 간혹 빠뜨려지기도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을 통해서도 실추된 김해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문무왕의 즉위로 인하여 변화하게 된다. 가야계 진골이자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에게서 태어난 문무왕은 김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종묘와 제사를 복원시킨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680년에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때부터 김해를 다시 중요시 여기기 시작한다.
신라에서 소경(小京)이란 특수한 행정구역으로서 오늘날의 광역시와 비교된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는 동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보니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5군데의 도시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이는 문무왕~신문왕 때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북원소경(北原小京 : 지금의 원주), 중원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주), 서원소경(西原小京 : 지금의 청주), 남원소경(南原小京 : 지금의 남원), 그리고 금관소경이 그것이다.
소경이 설치된 지역은 신라의 영토 중 과거의 변방이었거나 다른 나라의 주요 도시였던 곳들로 이루어져있다. 김해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금관가야의 수도였고 남쪽에 있던 주요 도시였기에 소경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무왕의 외가라는 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소경과는 달리 방위에 따라 작명되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그러나 이러한 김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김인광과 김율희 등이 있는데, 이들은 김해와 창원의 경계에 있는 진례산성(進禮山城)을 근거에 두고 김해지역을 아우르는 세력이 되어 지방호족으로서 활약하였다. 신라의 멸망 이후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 금관소경을 김해부(金海府)로 낮추는데, 이를 보아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김해부에서 안동도호부로 변모한 대왜교역의 중심지
▲ 김해 분산성 가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산성이다. 이후 증축을 거듭하였는데, 특히 고려시대 때엔 왜구의 방비를 위해 널리 활용되었다.(사적 66호) ⓒ 오은석
고려 건국 이후 금관소경에서 김해부로 낮춘 것은 행정구역에서 사실상 강등조치를 행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김해는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지고, 이는 그에 따른 명칭변화로 살펴 볼 수 있다. 김해부로 낮춰진 이후 또 임해현(臨海縣)으로 낮춰졌다가, 다시 임해군(臨海郡)으로 올려졌다. 그리고 광종 22년(971)에 다시 김해부로 복귀되고 성종 14년(995)에 10도를 정하면서 영동부의 김해안동도호부(金海安東都護府)로 크게 승격된다.
그리고 목종 3년(1000)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두었다가, 12년 뒤인 현종 3년에 금주(金州)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로 강등되었다. 이후 한동안 변화가 없다가 원종 11년(1270)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충렬왕 19년(1293)에 금녕현(金寧縣)으로 강등되었다. 충선왕 1년(1309)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되었지만 다시 2년 뒤인 충선왕 3년에 김해부로 고쳐지게 된다.
그럼 고려시대의 김해는 왜 이리 행정구역의 변천이 많았을까? 그 이유로 고려의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연관되어 보거나, 행정구역이 안정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신종 3년(1200)의 농민항쟁과 충렬왕(1293) 19년에 있었던 폭동이 있다. 특히 충렬왕 19년의 폭동은 임대, 허반, 김언이 일으켰는데, 이로 인하여 금주목에서 금주현으로 강등 당한 바 있다.
김해는 일본과의 외교교섭의 창구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문종 3년(1049)에 쓰시마 관청이 표류해갔던 고려인 김효 등 20명을 데리고 금주에 도착하였으며, 문종 10년(1056)에는 일본의 사신들이 금주의 관에서 묵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종 30년(1243) 금주 방어관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면서 표류해갔던 고려인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와 일본 사이에서 수많은 사신들이 오갔던 곳이 김해라는 점은 꽤 의의가 깊은 사실이다.
또한 이와 동시에 김해는 왜구와의 잦은 싸움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김해가 남해 해운의 중심지이기 때문이었는데, 몰려드는 물산을 노려 왜구의 주요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왜구와의 싸움이 자주 벌어졌으며, 이 와중에 활약한 이가 김해부사였던 박위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분산성도 적극 활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왜구의 방어기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당시 출발 전에 주둔하고 준비하였던 곳이 김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임진왜란의 김해성전투와 사충신
▲ 김해 사충단 표충사 김해성전투에서 전사한 사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묘단이다. 본래는 송담사, 송담서원으로 지어졌다가 후예 철폐되고 최근들어 표충사로 복원하였다.(경남기념물 제99호) ⓒ 문화재청
조선시대의 김해는 태종 13년(1413)에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가 되었다. 그리고 세조 5년(1459)에는 김해진관(金海鎭管)을 설치하였다. 이때 웅천과 완포 2현이 행정적으로, 창원, 칠원 등을 군사적으로 김해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중종 5년(1510)에 한반도 남부에서는 이른바 삼포왜란이 일어난다. 일본거류민들이 쓰시마도주와 통하여 일으킨 난리로서 이때 김해부사 성수재(成秀才)는 현감 한윤과 협력하여 웅천성을 구하게 된다. 이때 왜적에게 큰 타격을 안겨 주었던 부대가 돌팔매를 특기로 하는 석전군(石戰軍)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매년 4월 8일이 되면 아동들이 읍성 남쪽에 모여 석전을 연습하고, 단오날에는 청장년들이 좌우로 나뉘어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돌을 던졌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석전군이 실제로도 전투에 투입되어 큰 활약을 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김해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엿새 만에 화마에 휩싸이게 되었다. 1592년 4월 18일 일본군이 다대포를 건너 죽도에 진출하자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이들과의 전투를 준비한다. 그리고 19일 새벽부터 김해성전투가 벌어지며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투에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이 참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하지만 경상우병사 조대곤이 원병을 보내지 않고, 왜군이 저녁에 허수아비를 성안에 던져 넣어 소란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초계군수 이유검과 서예원이 도망가자 김해성은 수세에 몰리게 되고 결국 20일에 성이 함락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사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은 사충신으로서 훗날 송담사(松潭寺)와 송담서원(松潭書院)에 위패가 모셔졌다고 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송담서원이 철폐되었고, 대신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해부사 정현석이 표충사를 건립하였다.
김해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낙동강 하류의 중심도시로서 큰 역할을 하였지만, 위의 예처럼 지리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주요 전투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도 그 지리적 이점을 인정받아 수운의 중심지로 활용되었다.
금관가야의 멸망 이후 김해는 여러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변동에 따라 그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였으며, 지리적인 특색으로 인하여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기도, 왜구의 침탈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김해를 위해서, 그리고 고려나 조선을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또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김해를 떠올리면 주로 가야를 생각하지, 그 이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또한 역사라는 점에서 한번 쯤 살펴보고 김해의 색다른 면을 진지하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덧붙이는 글 | 금관가야 멸망 이후의 김해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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