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77822
김유신은 스스로를 가야인이라 생각했을까
[가야문화권 답사 22] 김유신과 가야
09.12.09 15:18 l 최종 업데이트 09.12.09 15:18 l 송영대(greenyds)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는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삼국시대 후반 신라의 선덕여왕과 당시 신라 정치계의 중요한 인물들이었던 김유신, 김춘추, 비담 등이 등장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역시 김유신으로, 김유신은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야왕족 출신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끈 명장이자 정치가였다.
그런 그에 대하여 때 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드라마 상에서 나오는 가상 단체인 복야회가 그것이다. 복야회의 '월야'라는 인물과 김유신을 상호 비교함으로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군과 친일파의 모습이 보인다는 식의 비교가 올라오고, 이에 대해 누리꾼들 간에 서로 다른 의견을 오갔다.
사실 이 문제는 드라마 상에서의 인물에 대한 문제일 뿐이지 역사적 사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약간의 역사적 해석을 해본다고 할 때, 대가야왕족의 후손인 월야와 금관가야왕족의 후손인 김유신을 직접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특히 가야에 대해서 김유신은 과연 어떻게 인식하였을지에 대해서도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관가야의 멸망, 그리고 대가야의 멸망
▲ 선덕여왕의 월야 드라마 <선덕여왕>에 출연하는 대가야 왕실의 후손인 월야(주상욱 분)의 모습. ⓒ MBC 드라마 <선덕여왕>
한때는 신라에 버금가는 국력으로 신라를 위협하기도 하였던 가야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남정을 계기로 세력판도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금관가야는 광개토태왕의 공격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되고, 이후 대성동고분군 축조가 더뎌지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반면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대가야는 가야제국(伽倻諸國)의 새로운 맹주로 떠오르게 되며 후기가야연맹체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이러한 금관가야와 대가야는 결국 신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 법흥왕 때 항복하여 역사에서 사라지며,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 진흥왕 때 이사부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이렇게 항복과 정복이라는 다른 과정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는데, 이는 두 나라 출신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금관가야는 신라에 항복하게 됨으로서 귀족들은 그들의 권한을 인정받게 된다. 신라 진골귀족에 편입되어 활동을 하게 되는데, 골품제의 신라로선 정통 진골이 아니었기에 배척을 당한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하위귀족들에 비해서는 대접을 받으면서 그들의 삶을 영위해 나가게 된다.
이에 반하여 대가야는 이사부와 사다함에 의하여 정복당한다. 대가야의 수도를 사다함이 이끄는 5천의 기병이 전단문이라는 문으로 들어가 흰 기를 꽂고, 이사부도 진격해 옴으로서 정복당하게 된다. 대가야의 귀족들은 금관가야의 귀족처럼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죽죽이나 강수 등 소수의 인물들이 약간의 활약을 펼칠 뿐이다. 반면 금관가야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그들의 권한을 인정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이는 신라의 정책에 의한 것이다.
월야는 가상인물이지만, 그의 입장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금관가야계인 김유신과는 다른 의미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유신과 신라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그들 속에 흐르는 피, 즉 혈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김유신은 스스로를 가야인으로 생각하였을까?
▲ 김서현과 김용춘 드라마 선덕여왕에 출연하는 김서현(정성모 분)과 김용춘(도이성 분)의 모습. ⓒ MBC 드라마 <선덕여왕>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다. 우리는 이 때문에 김유신이 가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과연 그랬을까?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일단 김유신의 혈연관계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는 김무력이며, 아버지는 김서현이다. 김서현은 입종갈문왕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과 결혼하였다. 입종갈문왕은 진흥왕의 아버지이자 법흥왕의 아우로서 신라 왕족의 일원이었다. 즉 김유신으로서는 신라인 어머니의 아래에서 자란 셈이며, 그의 부인인 지소부인 또한 김춘추의 딸로 신라왕족의 일원이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세 번째 아들이다. 가야가 멸망 할 때 아버지와 형들과 같이 항복하고 신라 장군으로서 활약하였다. 또한 그의 아들인 김서현도 마찬가지로 신라 장군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이는 김유신도 마찬가지였다. 즉 가야 후손 3세대인 김유신으로서는 가야인으로서의 자각보단 신라인으로서의 자각이 더 컸으리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 선덕여왕의 김유신 드라마 선덕여왕에 출연하는 김유신(엄태웅 분)의 모습. ⓒ MBC 드라마 <선덕여왕>
이러한 김유신은 과연 얼마나 자신을 가야인이라고 자각하였을까? 아마 가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긍정적인 부분에서가 아닌 그와 상반된 부분에서의 자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을 비롯한 가야계 진골귀족들은 신라 중앙 정계에 쉽게 융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유신이 역사에 그 이름을 비친 첫 사례는 629년 고구려와의 낭비성전투 때이다. 이때의 활약 이후 642년에 이르러서야 역사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때 김유신의 나이가 47세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다른 이에 비해 그 본격적인 활약이 꽤 늦은 시기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사다함의 경우 15세에 대가야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는 점에서 서로 비교가 된다.
김유신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김춘추와의 정치적 연계를 통해서이다. 애초에 김유신의 청년시절 활약상에 대한 기록이 적은 것은, 사료의 부족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야 출신으로서 정계에서 제대로 활약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금관가야인과 다른 대우를 받은 대가야인
▲ 신라충신죽죽비 고려시대에 건립된 비로서 합천 대야성 아래에 위치해있다. 죽죽은 대가야의 후손으로서 사후 급찬으로 추증되었다.(경남 유형문화재 제 128호) ⓒ 김사현
그럼 여기에서 대가야인들을 잠시 살펴보자. 금관가야 출신의 가야 후손들은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활동함을 알 수 있지만, 정작 대가야 후손들은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가야 출신으로 신라인으로 활약한 사람은 크게 3명이 있는데 우륵, 죽죽, 그리고 강수이다. 우륵의 경우 대가야 멸망 이전에 신라에 항복했기에 논외로 친다면 죽죽과 강수가 대가야인들의 후손이라 하겠다.
죽죽과 강수는 역사에서 몇 번 이름을 비추지만 그렇게 큰 비중은 없는 편이다. 죽죽은 대야성전투에서 활약하였는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무장이다. 이로 인하여 나중에 신라 조정에 의해 급찬으로 추증된다. 급찬은 신라 17등 관계 중 9번째에 해당하며 6두품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강수는 신라의 뛰어난 문장가로서 머리가 뾰족하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석체의 경우 17등 관계 중 11번째인 나마에 해당하며 이는 5두품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그리고 강수는 나중에 실력을 인정받아 사찬의 작위를 받는데 이는 8번째로서 6두품에 해당한다.
이렇게 죽죽과 강수를 보면 그 벼슬이 진골에 이르지 못하고 5두품과 6두품에서 머무르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금관가야의 후손들이 진골귀족으로 활약했던 점과 대비되는 점이다.
애초에 이는 금관가야와 대가야 멸망 시 신라에 우호적이었는지, 적대적이었는지에 따른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례는 많은데 극렬히 대항하다가 투항한 경우 그에 따른 철저한 차별대가를 치르게 하였었다.
드라마 상에서 나온 김유신과 월야의 대화나 관련 내용들은 가상의 내용이지만, 역사적 상황에 미루어 보았을 때엔 서로 다른 입장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지만 겉돌았던 금관가야인들, 그리고 신라의 귀족에선 배제되고 개인의 능력으로 6두품 정도로 활약한 대가야인들로선 서로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 수로왕릉 가야를 세운 수로왕의 무덤으로서 현재 김해시내에 위치해 있다. 가야 멸망 이후 드문드문 이어지던 제사를 문무왕 때에 이르러 복구시켰다.(사적 제 73호) ⓒ 오은석
그럼 과연 김유신의 경우 가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였을까? 이를 살펴볼 만한 구체적인 근거는 없지만 그 또한 가야를 위해 무엇인가 하려고 했던 노력을 간접적으로 찾아 볼 순 있다. 문무왕의 어머니인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661년 조서를 내려 수로왕을 종묘에 합하고 제사를 지내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여기에서 그는 서운잡간, 즉 김서현과 문명왕후를 언급하는데 이는 신라 왕실의 혈연에 가야인들이 합하였음을 인정한 사안이다.
가야 멸망 이후 수로왕에 대한 제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였으나 이로부터 정기적으로 제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이는 김유신의 활약으로 신라가 융성해지고, 또한 그의 여동생이 신라 왕실과 혼인함으로서 외척가문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김유신은 이러한 노력을 행하였고 결국 그 결실로서 가야의 시조와 가문에 대한 대우를 향상시켰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당시 금관가야인과 대가야인의 후손은 서로의 입장이 다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망국의 후예라는 점에서 신라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유신은 비록 혈통적으로서는 가야인의 피에 신라인의 피가 섞여있어 가야인으로서 정체성을 크게 느끼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무관하게 진골귀족 내부에서 차별대우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김유신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개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이에 대한 보상의 하나로서 수로왕의 능묘와 제사가 복구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가 가야인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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